토리를 주우며 / 박은숙(부산시 북구 화명동)
나무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언젠가 우연히 땅 속에 묻혀 있던 나무들의 뿌리를 보고 난 후부터 더욱 그렇다. 제법 큰비가 내린 후였다. 불어난 계곡물이 계곡 흙까지 다 쓸고 가서 나무들의 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물가에 서 있던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흙까지 뿌리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여태껏 나는 여름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들이라든가 긴 등을 올곧게 편 전나무의 당당함을 보며 감탄해왔다. 그러나 의연하게만 보이던 나무들도 살아가기 위해 손등의 핏줄이 불거지도록 세상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의 나는 알지 못하였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나를 채찍질 한 적도 있었다. 겉으로는 평안한 듯 근심 걱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집마다 잔걱정 없는 집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산다는 것이 때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손등의 핏줄이 불거지도록 저마다 안간힘을 쓰며 보이지 않는 가슴속 희망 한 줌 꽉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참나무 늘어선 길을 걷는다. 아름드리 참나무는 그늘조차 푸짐하다. 천천히 나무껍질을 쓰다듬는다. 메마른 껍질은 거칠고 투박하다. 밤새워 이불 흩청을 하얗게 삶아 빨고 풀을 먹이시던,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등 같다.
물든 나뭇잎마다 비바람을 맞거나 벌레 먹은 상처가 무성하다. 자식은 부모의 상처를 먹고 자란다. 저 무성한 상처들이 가지마다 매달린 도토리를 키웠을 것이다. 상처마다 열매를 품고 아픔으로 키워냈을 것이다.
바람이 이따금 세차게 분다. 나무가 ‘툭’하고 도토리를 떨쳐낸다. 탯줄이 잘린 도토리들은 길 위거나 길섶, 풀밭 위거나 돌멩이 틈새에 떨어진다. 마치 부모의 품을 벗어나 저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자식들 같다.
곰실곰실 마른 잎들 사이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도토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놀다 이불 밖으로 빼꼼 내다보는 장난기 많은 아이의 얼굴 같다. 눈에 띄기 좋게 길섶에 나와 있는 도토리는 양팔을 흔들며 안아달라고 보채는 유치원생 같기도 하고 길 위로 뛰쳐나와 당당하게 버티고 선 씨알 굵은 도토리는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을 보는 것도 같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달아나다 개울 속으로 빠진 개구쟁이 도토리들도 몇 있다.
길섶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토리와 눈이 마주친다. 도토리는 초롱한 눈망울로 반짝거린다. 그 눈망울은 막 목욕을 끝내고 방실방실 웃는, 티 하나 묻지 않은 아가의 눈망울 같다고나 할까. 새까맣고 맑기만 하여 내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급기야 내 눈에는 도토리들만 보인다.
아쉽게도 나무는 도토리를 한몫 내어놓지 않는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품안의 도토리를 조금씩 풀어놓는다. 더 이상 주울 것이 없어 돌아서려 하자 바람은 나무를 부추겨 또 도토리 몇 알 내어놓게 한다, 아이들을 종일 곁에 두고 싶어 과자 부스러기를 틈틈이 쥐어주시던 그 옛날 할머니들 같다. 마침 내 나무는 내 하루해를 온통 붙들어버린다.
참나무 늘어선 길을 저만치 앞서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뒤따르는 나보다 한 발 먼저 도토리를 줍는다. 내 몫의 도토리가 적을까봐 나는 안달이 난다. 살면서 내게 우선순위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내가 거둘 내 몫이 적을까봐 초조해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바람은 간간이 불어 와 뒤에 가는 내 앞에도 도토리를 풀어놓아 주었다. 앞서간 이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도토리도 있어 뒤따르던 내가 굵은 도토리를 줍는 횡재도 있었다.
인생이란 참나무 늘어선 길을 걸으며 도토리를 줍는 일 같아서 지금 앞서 간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뒤쳐졌다고 낙심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내겐 내 몫의 도토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를 줍다보니 한나절이 훌쩍 지나버렸다. 어쩌면 한 생이 지난 것도 같다. 잘 여물어 떨어지는 도토리가 행복의 또 다른 말이라면 행복은 내 생에 걸쳐 쉬엄쉬엄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평생 동안 사는 재미를 잘 찾아보라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지냈다. 병원비가 나가지 않았으니 그만큼 돈을 번 셈이고 내 몸을 내 의지대로 부렸으니 고마운 일이다. 행복은 주위에 널려있다. 다만 행복은 사방으로 흩어진 도토리를 줍듯이 찾으려고 애쓰는 자의 눈에 띈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계양산에 관한 소묘/ 진상용 (0) | 2014.08.22 |
---|---|
[스크랩] 준경묘와 미인송/ 이분희 (0) | 2014.08.22 |
[스크랩] 2013 산림문학상 은상-아버지의 등산화/이상렬 (0) | 2014.08.22 |
[스크랩] 2012 제4회 철도문학상/ 그 플랫폼엔 당신이 있었다/전지원 (0) | 2014.08.22 |
[스크랩] [제11회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스타킹-김경희 (0) | 2014.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