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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수필]아버지의 빚? / 정재호

테오리아2 2012. 7. 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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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빚 / 정재호

 

 

일생 동안 빚을 한 번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나도 젊었을 때는 가끔 빚을 얻어 썼다. 대구에 와서 처음 살림을 차릴 때는 빚투성이였다. 집에서 가져 온 것은 숟가락 하나도 없었으니 모두가 빚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상과 빚에 맛을 들여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나 빚을 얻고 빚을 갚는 것을 예사로 알게 되어 씀씀이가 헤퍼져 가계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또 어쩌다가 빚을 제떼에 갚지 못하여 몇 번 언짢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빚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하고 차라리 현금이 없으면 아예 사지 않기로 작심을 했다.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 씹는 것처럼 그럭저럭 빚을 지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는 집을 사거나 이사를 할 때에는 갚을 수 있을 만큼만 빌리고 부조를 할 때나 갑작스런 사고 같은 경우가 아니면 외상이나 빚을 얻지 않고 살았다.

그런 결심을 한 데는 빚 때문에 몇 십 년을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가난한 선비의 종손으로 태어나 마을의 동서기로부터 출발하여 일제시대 때 시골 면장이 된 분이지만 오랜 가난에서 탈출해 보려고 재직 중에 정미소를 차려 운영하면서 쌀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쌀을 많이 사 모았는데 쌀값이 갑자기 폭락하여 과중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 후 온갖 수단을 써서 그 빚을 갚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빚이 너무 많아 친척과 친지의 돈을 빌려 겨우 공금을 변상하고 나니 빈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다가 채권자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면장의 자리를 내어 놓고 몽민이 되었지만 남의 논을 얻어 농사를 지어 봤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여덟 식구를 먹이고 입히는 일도 힘에 겨웠지만 종손으로서 제사지내기와 손님 접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빚은 점점 늘어나서 갚을 처지가 못 되었다. 채권자들도 아버지의 형편을 알고는 빚 독촉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채권을 포기하는 이도 있고 돈이 생기면 갚아 달라고 하며 빚 독독촉을 하지 않았지만 빚을 못 갚는 아버지는 죄인처럼 자존심을 죽이고 참회하면서 일생을 살다시피 했다.

내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아직도 빚을 갚지 못한 것이 얼마쯤 된다고 하면서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 빚의 몇 분의 일이라도 갚았지만 엄○○라는 사람에게는 한푼도 갚지 못했으니 ‘내가 생전에 끝내 갚지 못하거든 사후에라도 큰형과 상의해서 반드시 갚아 주어야 지하에서 편히 잠들 것 같다.’고 하며 뒷일을 내게 당부했다. 그 후 아버지는 갑작스레 이 세상을 떠났고 큰형도 뒤이어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의 빚이 얼마인지 모르는 처지여서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하도 답답하여 어머니에게 물어 봐도 엄씨라는 것밖에 모른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아직까지 아버지의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내가 못난 탓이다.

나는 그 동안 남에게 돈을 빌려 주고 몇 차례 떼인 적이 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나의 돈을 갚지 않는 이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기억조차 희미해져 미워하는 마음은 없어졌지만 가끔 기억을 하곤 한다.

나도 이제 나이 70세가 넘어 언제 눈을 감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과거를 청산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갚지 못한 빚을 내가 갚은 셈치고 내 돈을 떼어먹은 이들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내 빚을 갚지 않은 이들 중 몇은 갚으려고 하면 갚을 능력이 있는 이도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나의 성질을 이용하여 내가 독하지 못한 것을 알고 일부러 갚지 않은 이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도 남의 빚을 다 갚지 않고 이승을 떠났는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악착같이 받으려고 하는 짓이 염치없는 짓이라 생각되어 괴롭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묘한 방법으로 빚을 떼어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삼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나는 아버지의 빚을 갚지 못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보려고 약간의 돈을 모아 사회에 환원시켜야 하겠다고 마음먹고는 지금도 종이 한 장, 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면서 날마다 부지런히 한 푼 두 푼씩 모르고 있다.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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