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동서문학상 금상 수상작]
바지랑대 / 허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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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장마인가 보다. 잠깐 해가 나더니 금세 퉁퉁 부은 하늘에서 횃대비가 쏟아지고는 하다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이 열렸다. 그 동안 궂은 날씨로 볕을 보지 못한 이불은 습기가 차고 쾨쾨한 냄새가 났다. 문득 이불에서 나는 햇살 냄새가 그리웠다. 여름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 가을바람이라도 쐬어 줘야겠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릴 쯤, 이불 걷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에서 폴폴 날리는 햇볕 냄새와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질 때,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땀이 밴 속옷과 여름살이 흰옷을 모아 찜통에 넣고 푹푹 삶았다. 밥 짓는 소시랑게처럼 북적거리던 거품이 이내 찜통 밖으로 울컥 끓어 넘쳤다. 속옷에 묻어 있던 세상의 때가 비눗물에 녹아 풀어지면서 뿌옇던 물이 자꾸만 시커멓게 변하고 있다. 내 깊은 곳의 때도 푹 삶아 한 번쯤 저렇게 세상구경 시키고 싶다. 나도 살아가는 동안 갓 삶아 말려 놓은 빨래처럼 때묻지 않는 빳빳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날은 베란다가 소란스럽다. 하얗게 제 모습을 찾은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더니 문 밖을 지나던 햇살도 거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몰래 스치던 바람도 놀러 왔는지 젖은 빨래가 풀럭거린다. 흰 옷가지들이 해만큼이나 눈부시다. 그런 날은 내 마음도 부뚜막의 정화수에 헹궈 낸 듯 맑은 사람이 된다.
시골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기다란 빨랫줄이 있었다. 처마 밑 서까래의 굵직한 못과 앞마당 감나무를 이어 놓은 빨랫줄에는 늘 여러 색깔의 빨래가 널려 있었고, 옷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사라락사라락 소리를 냈다. 이불 호청이라도 널어 놓은 날이면 까상까상한 호청 사이를 헤엄치듯 다니며 장난을 쳤다. 그 틈새로 언뜻언뜻 내다 보이는 빈 하늘은 물결 없는 바다였다. 빨랫줄 귀퉁이, 널브러진 엄마의 옷 아래 서곤 했다. 축 늘어진 빨래는 해질 무렵 녹초가 된 엄마의 모습처럼 가년스러웠다. 엄마는 삶에 물꼬를 트느라 늘 들녘의 차지였다. 뒤꼍을 돌아온 바람이 불자 코끝에 수채화처럼 엄마의 냄새가 번지고, 설음 섞인 그리움이 가슴팍을 누볐다.
철철 넘치는 갈매빛 샘물은 차고 맑았다. 하늘의 구름도, 아랫마당 감나무도, 때 이른 가을 소국도 그 안에 다 있었다. 샘 속에 비친 그림자에 반해서 행여나 잡을 수 있을까 손을 담그고 휘적거려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잡힐 것 같던 그림자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듯 흩어지고 말았다. 한 입 베어 물면 폭신할까? 손에 닿으면 무서리처럼 사라져 버릴까? 구름을 손 끝에 느껴 보고 싶었던 조무래기의 소망이 마침표의 여운으로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방금 가져온 빨래를 널자 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빨랫줄이 축 늘어져 옷들이 땅에 닿을 만큼 내려오자, 어느 날 아버지는 날씬하고 긴 나뭇가지를 잘라 와서 껍질을 벗기고 잘 다듬었다. 속살을 드러낸 나무는 손이 착착 감기도록 매끄러웠다. 브이자로 갈라진 가지 끝부분에 빨랫줄을 걸어 하늘 높이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바지랑대'라고 불렀다. 그날부터 빨래는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바지랑대도 그것들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너울대며 제 무게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하늘 한가운데서 나풀거리던 빨래는 잠자리와 한 무리가 되어 자꾸만 푸른 지구 밖으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바지랑대는 먼 하늘과 나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그 끝에 위태롭게 내려앉은 빨간 고추잠자리는 내 어린 애를 태웠다. 어쩌다 무리지어 지나가던 소담한 구름도 바지랑대 꼭대기에 걸렸다. 내가 애타게 잡고 싶은 구름과 잠자리는 그 주변에서 뱅뱅 맴돌았다. 언젠가 내 키보다 몇 배 긴 바지랑대를 끌고 뒷동산에 올랐다. 동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그것을 세우면 하늘에 맞닿을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하며, 마른 먼지 날리는 가파른 흙길을 걸어 바위에 올라섰다.
바지랑대를 세워 보았다. 긴 바지랑대를 하늘 끝에 걸치면 가득찬 물주머니에 구멍이 생겨 물이 쪼르륵 새어 나오듯, 터진 하늘에서 푸른 물감이라도 또로록 떨어질 것 같았는데 티끌만한 상처도 없었다. 구름 한 스푼이 그 끝에 묻어 내 손바닥 안에 놓일 줄 알았지만, 조각구름 또한 아무 일 없이 제 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하늘로 향하던 단 하나의 길이었던 바지랑대는 땅 위로 길게 드러누었다. 그 옆에 나도 하늘을 마주보고 누웠다. 하늘과 나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어린 꿈이 질질 끌려오던 바지랑대 끝의 흙먼지 속으로 천천히 흩어져 버리자 아득히 멀리 보이는 마을의 집만큼이나 내 마음이 작아졌다.
지난 주말, 안개가 흩뿌릴 때 차창 밖으로 달리는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인적 드문 시골집 마당에 시선이 머물렀다. 잊고 살았던 것들이 거기 있었다. 빈 빨랫줄을 가볍게 받쳐 든 바지랑대는 허공으로 솟아 있었고, 그 위로 안개가 바삐 쫓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안개구름이다." 어렸을적 바지랑대에 잡히지 않던 구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산허리가 점점 드러나며 그곳을 감싸고 있던 희뿌연 무리는 서둘러 산등성이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것은 안개였다. 그러나 산마루로 올라가 잿빛 하늘가에 들어서면 그것은 구름이 되었다. 구름이 내 곁에 있었던 것이다. 안개의 이름을 빌어서, 그렇다. 꿈은 구름처럼 잡지 못할 곳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형체 없이 내 삶 속에 있었다.
풋내 나는 시절, 구름을 만져보고 싶은 희망으로 혼자서 뒷동산을 올랐던 옹골찬 일 이후, 나는 해야 할 일을 제외하고 소망하는 것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기억이 끊어졌다. 아니 그런 기억이 없었다. 회초리를 처음 맞던 날처럼 마음 안이 아프고 쓰라려 왔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처럼 두 갈래의 갈림길이 내 선택을 강요했다.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길을 택하는 것은 마뜩찮은 가늠질이었다. 그때부터 꿈은 푸른 나무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삭정이 신세였고,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계륵(鷄肋)처럼 내 삭신에 빌붙어 삶의 무게를 더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다듬잇돌 하나를 안고 살았다. 그것은 간이 센 인생의 맛이자 형벌이었다. 그 꿈이 내 가슴팍에 수직으로 꽂혔다.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찾은 것처럼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울컥하며 느꺼워졌다. 잠시 안개보다 더 짙은 혼돈이 나를 흔들었다. 그 혼돈의 맨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드러났다. 삭정이에 새순이 돋는 것처럼 몸 안에 새로운 기운이 샘 솟았다. 몸이 가벼워졌다.
마흔이 넘어 여린 꿈을 꾼다. 아직 실하지 않은 꿈이라 고갱이가 없어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 능청거리나 쓰러지지 않는 바지랑대를 닮아 가련다. 어릴 때 바지랑대는 내 소망을 꺾어 내리는 훼방꾼이었지만 지금은 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처진 빨래를 추스르듯 내 바람을 하나 하나 곧추세워 주기도 한다. 세포 하나 움직일 마음이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날, 두레박을 타고 오르던 나무꾼처럼 나를 하늘가로 끌어올려 다독거려 주기도 하고, 땅바닥으로부터 몸이 붕 뜨는 날에는 나를 꼭 붙잡아 주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마당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빛바랜 바지랑대에게 삶의 단편을 전해 듣는다. 드센 바람이 부는 날은 똑바로 서 있기보다 옆으로 비스듬히 비껴서는 법을 배웠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서서 모진 바람을 맞기보다는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며 고꾸라지지 않는 지혜를 배운다. 빨래를 널듯 잃어버린 꿈을 찾아 빨랫줄을 채워간다. 아직 쭉정이 같은 꿈이지만 소망으로 여무는 보름달처럼, 가을 바람에 깊어지는 풀벌레 소리처럼 내 꿈도 더 여물어지고 깊어지기를 소원해 본다. 그리고는 늘어진 마음을 다잡듯 바지랑대를 하늘 향해 크게 한 번 추켜세워 본다.
- 『월간문학』2010년 12월호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 금상 수상작
< 작법 해설 >
창작문예수필 작가는 소설가나 시인이 되려다 못된 3류 문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소설과 시가 각기 독자적인 창작세계와 그 창작양식을 가지고 있듯이 창작수필도 창작수필만의 독자적인 창작세계와 창작양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현대문학 이론에서는 몽테뉴의 작품을 통하여 에세이의 작품 세계와 그 제작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필계에서 수필의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홍매의 ‘붓 가는 대로’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이며 그 작품제작 양식은 어떤 것인가? 그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여기의 문학’, ‘서자문학’, ‘신변잡기’, ‘수필도 문학이냐?’라는 것이었다. 수필가라는 사람들은 이런 글쓰기를 무려 1세기 동안이나 아무 이렇다 할 근본적인 이론적 해결책 없이 해 왔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가?
혹 ‘붓 가는 대로’가 우리의 고전문학의 전통을 이어 받은 현대적 개념이라면 이상과 같은 지적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전문학이 ‘붓 가는 대로’를 개념으로 삼고 쓴 글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고전수필의 개념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잡문론이 있는 줄 알지만 그것이 곧 홍매의 ‘붓 가는 대로’에 의한 글쓰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필자가 알기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쓰기를 ‘붓 가는 대로’ 한다는 발상은 어디에도 없는 줄 안다. 수필계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붓 가는 대로’에 대한 창작론적 이론을 내어 놓든지 아니면 이제라도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에 문학인다운 솔직한 태도로 앞장서야 될 것이다.
필자는 그나마 ‘붓 가는 대로’의 개념을 가지고 써 온 현대수필문학 1백년사 안에서 주로 시인, 소설가, 음악가, 미술가 등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창작활동을 하여 온 예술가들에 의하여 제작된 수필작품들 중에서 현대문학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창작론에 부합되는 새로운 양식의 수필문학 작품들을 발견하여 이를 창작문예수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기초이론 창안에 부족하나마 힘을 쏟고 있다.
필자가 그 동안 조사 · 연구한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적 창작세계는 문학적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은 창작문예수필만의 창작세계는 아니다. 모든 예술은 본질상 대상 · 사물과의 교감에서 창작발상을 얻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대상 · 사물과의 교감에서 얻은 창작발상을 음악으로 형상화하고, 미술은 그림으로 형상화한다. 소설은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을 허구적 서사로 형상화하고, 시는 창조적 언어(시어)로 형상화한다.
그렇다면 창작문예수필은 다른 예술이나 문학과 어떻게 다른가? 창작문예수필은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을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다는 점이 다른 예술이나 다른 장르의 문학과 다른 점이다.
허이영의 <바지랑대>는 이 같은 창작문예수필의 창작양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문학적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을 직접 작품 창작의 제재로 삼고 있는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에서 폴폴 날리는 햇볕 냄새와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질 때,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문장을 일반적인 지시어 진술법의 문장으로 바꾸면, ‘하루 종일 햇볕에 내다 말린 이불에 따스함이 배어 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하루 종일 햇볕에 내다 말린 이불에 따스함이 배어 있다.’는 것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진술일 뿐이다. 거기에는 작중 화자 혹은 작품 서술자가 대상 · 사물과 사이에 나눈 생각이나 감정이 일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화자의 사물과의 교감이 빠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예시한 작품 ?바지랑대?의 인용문에는 화자의 대상 · 사물에 대한 교감뿐 아니라 사물들끼리의 교감까지 구현되고 있다.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은 햇볕과 이불간의 교감이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은 따스함이 주체가 되어 화자의 손바닥을 간질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의 결과 화자는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다음의 인용문을 다시 보자.
“옷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사라락사라락 소리를 냈다. 이불호청이라도 널어놓은 날이면 까상까상한 호청 사이를 헤엄치듯 다니며 장난을 쳤다. 그 틈새로 언뜻언뜻 대다 보이는 빈 하늘은 물결 없는 바다였다.”
이 문장을 사실적으로 진술한다면 ‘옷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가 전부 다일 것이다. 그러나 ‘사라락사라락’은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이고, ‘까상까상’은 촉감을, ‘언뜻언뜻’은 시각을 감각적으로 구현한 의태어다. 누가 그렇게 대상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는가? 화자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화자만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아니다. ‘바람이 호청 사이를 헤엄치듯 다니며 장난을 친다.’ 이것이 사물과의 교감이다.
수필문학의 운명은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만약에 수필이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지 않을 것이라면 굳이 수필양식의 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소설처럼 소재를 작품 밖에서 허구화하여 거기서부터 창작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시처럼 언어 존재화 하는 창작을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문예수필이 그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 사실의 소재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못보고 집은 나갔다가 홈빡 비를 맞았다’는 이야기뿐인가?
기존의 수필이 ‘신변잡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온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못보고 집은 나갔다가 홈빡 비를 맞았다’는 사실적 경험만을 진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글쓰기를 하여왔기 때문이 아닌가?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작품의 제재로 채용하는 사실의 소재의 실체는 ‘비 오는 날의 교감’에 있다. 비 오는 날과의 교감이 빠진 비 오는 날의 진술은 사실적, 과학적, 신문기사적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체험은 일반인의 체험과 다르다. 작가의 체험이 일반인의 체험과 같은 것이라면 예술작품이 어디서 나올 수 있겠는가? 작가가 작가 일 수 있는 소인은 일반인이 체험하지 못하는 작가만의 독특한 예술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작가적 능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경우 대상 · 사물과의 교감 체험이 그것이다. “하얗게 제 모습을 찾은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더니 문 밖을 지나던 햇살도 거기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몰래 스치던 바람도 놀러왔는지 젖은 빨래가 풀럭거린다”는 것이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작품의 제재로 채택하는 사실의 소재의 실체, 즉 교감의 세계다. 빨래 건조대에서 수다 떨고 있는 햇빛과 빨래를 풀럭이면서 놀고 있는 바람을 발견하기 전에는, 즉 작가의 인식 능력이 그 같은 상상력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는 빨래 이야기는 아직 창작수필의 작품 제재로 채택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창작문예수필은 대상 · 사물과의 교감만 형상적으로 구현하면 창작이 끝나는가? 만약에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창작수필작품이 아닌 일반산문수필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을 형상적으로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창작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을 만들고자 한다면 대상 · 사물과의 교감을 형상화해야 할 것이다. 형상적인 구현과 형상화는 다른 문학적 작업이다.
대상 · 사물과의 교감 자체는 아직 형체가 없는 정서일 뿐이다. 정서가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형체를 가진 존재 · 사물화가 이루어져야 된다.
“형상화란 모양을 지니지 못한 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가리킨다. 일정한 테두리를 이루고 형태를 가지지 못하면 그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이름이 허용되지 않는다.”([현대시 원론] 김용직 학연사 46쪽)
허이영의 '바지랑대'는 빨래와 햇볕과 바람과의 교감을 ‘바지랑대’라는 사물에 접목하여 형상화해 내고 있다. “아직 실하지 않은 꿈이라고 고갱이가 없어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 능청거리나 쓰러지지 않는 바지랑대를 닮아 가련다”가 그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대표적인 형상화 양식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 · 상징) 창작이고, 두 번째는 사실의 소재에서 느낀 시적 정서를 운문의 시 양식이 아닌 산문형식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스토리, 즉 서사 구성법에 의한 형상화이다.
- 월간『조선문학』2011년 4월호 <이달의 수필 비평>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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