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버릴 수 없는 인간
인간으로서 인간성이 그립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 같건만, 실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이것은 이미 인간성을 그립도록 상실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이것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또한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인간성이 아직도 살아 있고, 아니, 인간성이란 영원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환기(喚起)시키렴인지 <인간성에의 그리움>이란 제목으로 글을 물으니, 다시금 인간성을 맛보는 듯 반갑다. 여기에 생각나는 바 있어 왕년(往年)의 일을 하나 적어 보기로 한다.
나는 원래 고독(孤獨)을 사랑했다. 따라서 사람을 싫어했다. 남과 접촉하기를 괴로워할 뿐 외라, 길에 지나가는 사람, 눈에 띄는 사람이 모두 싫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을 피하고, 길을 가도 사람 없는 으슥한 고샅을 택했다. 사람의 냄새조차 가까이 하기 싫어서,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개벽 이후 인간 미도처(未到處)가 있다면 그 속에 들어가서 세상과는 절연(絶緣)하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신선(神仙)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구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아는 까닭에,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 없는 깊은 산 속이 그리웠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어느 날 정처 없이 깊은 산 속으로 헤매게 했던 것이다. 다행히 나무꾼의 발자취 하나 없는 유피(幽避)한 곳을 찾았다. 아마 천지가 생긴 후 이곳만은 한 번도 인간의 발자취가 와보지 못 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높은 바위가 하나 솟아 있었다. 나는 가진 애를 쓰며 그 바위 위에 올라가 오래 앉아 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늘이 끝없이 푸를 뿐, 인간 세계와는 격리된 먼 뫼뿌리에 떠가는 구름이 솜같이 피어 날 뿐,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따금 늙은 수림(樹林)에서 태고(太古)의 음성이 울릴 뿐, 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해도 걸음을 멈춘 듯 고요한 하루는 십년같이 길었다. 이 때, 나의 즐거움, 이런 인적미도(人跡未到)의 땅을 홀로 밟아보는 자랑스러움, 이것에 홀로 영주(永住)할 수 있다면 곧 신선이 아닌가. 참으로 오랜 동안을. 이윽고, 나는 일어서서 좌우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오직 정적(靜寂)과 정적(靜寂), 바위 주변을 배회(徘徊)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와락 반가웠다. 손이 먼저 집었다. 그것은 누가 피다 떨군 담배 꽁초 하나. 왜 집어들었는지 왜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 나와 같이 고독이 그리워 이 자리를 찾아와 앉았다 간 사람이 또 하나 있었구나. 그 사람이 누구일까. 불현듯 만나보고 싶다.’ 눈에 눈물이 도는 것을 느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을 그리워하고 고독에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사람을 그토록 싫어한 것은 진실로 사람이 그리웠던 탓이었구나.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끊던 심정이 이것이었구나. 옛 사람이 백년지기(百年知己)를 구하던 심정이 이것이었구나. 사람이 그립되, 사람 속에서 사람을 못 찾으니 차라리 사람이 싫었다. 만인주좌중(萬人稠坐中)에서 웃고 지껄이되 스며드는 고독이 외로운 고독보다 더 컸다. 내 사람을 미워함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그렇다, 인간이 인간을 떠나서 갈 곳이 어디냐. 나는 도로 산에서 내려왔다.
나는 인간성을 점점 상실해 가는 현실을 증오한다. 그리고 슬퍼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다시 인간성과 인간미(人間味)를 발견하고 기뻐도 한다. 인간을 떠나서 인간성은 찾을 곳이 없고, 또 동시에, 인간에서 인간미가 가셔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인간성을 상실하며 살아가지는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이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괴로움, 미워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미운 인간들.
“인간성에의 그리움”이란 명제(命題)는 여기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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