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수필을 쓰는가
(2008년 가을 세미나 중)
김종완
저는 수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당신 3년 안에 수필로 떼돈을 벌 가능성이 있어? 라고 묻는다면, 떼돈은 무슨, 잡지나 낼 돈이나 벌었으면 해,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개떡 같은! 이런 실정이라면 안해야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는 걸 보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 친구가 미래를 보는구먼, 그래서 물을 것입니다. 당신 죽기 전에 떼돈을 벌 자신은 있는 거지? 그러나 나의 대답은 똑 같을 것입니다. 돈 걱정 없이 잡지나 냈으면 해. 정말, 이건 정말 빌어먹을 일 아닙니까? 그는 의아해 하며 질문 할 거예요. 사람이 희망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어디 세상이 부자들만 사는 곳입니까? 부자 되어야만 성공하는 것입니까?
나에게 정말 희망이 없냐? 아니에요.
대학에서조차 인문이 몰락하는 이 시대에 한국에선 대중이 역으로 작가가 되려고 합니다. 이 기운은 보통 예사로운 기운이 아니에요. 저는 가끔 희망에 부풀어 잠을 못 잘 때도 있어요. 어느 시대에도 글 써서 밥 먹고 살았던 때는 없었고, 파생상품을 팔아먹고 살았지요. 세익스피어 박지원 박제가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시절은 세종조와 영정조 시대일 것입니다. 저는 드라마 <대왕세종>을 봅니다. 노무현 정권이 물러났을 때 정조에 대한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전 그걸 보면서 민중의 한을 봅니다. 깨우쳐진 민중이 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려요.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는 솔론의 개혁을 낳았던 아테네의 시민이 있어서 가능했었지요. 정신의 승리지요. 격변기엔 대중을 깨우는 새로운 정신이 나왔어요. 러시아 혁명기, 유럽의 68 세대 그리고 우리가 ‘정신의 그 시대’를 열 것 같아요. 촛불집회를 지켜보며 그 조짐을 감지했습니다. 분명 칼 같은 문장만이 역사의 세월을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거창합니까? 그러면 가장 작게 이기적으로 이야기 합시다. 남는 장사여야 하니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겨요. 돈으로 유산 남겨 주어봐야 3대가 못 가요. 재벌가의 교육열을 소문이 나 있지요. 돈도 남겨 주고 글도 남겨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 글을 남겨주라고 권하겠습니다. 문집을 남기면 정신을 남기는 것 얼을 남기는 것,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고스란히 남기는 것이지요. 글 쓰는 게 남는 장사지요. 왜 글 써? 남는 장사하려고 쓴다. 그런데 문제는 글을 재미없게 쓰면 자손들의 누구도 안 읽는 다는 거지요. 쓰레기가보(家寶)인 거지요.
처음부터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지만 분명한 것은 수필 써서 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니 바닥부터 시작했으니 우리에겐 희망밖엔 없다는, 이거 얼마나 희망찬 미래입니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썼는데 이렇게 희망차니 우리는 랄랄라 수필을 쓰고 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수필을 씁니까? 여러분은 이런 제목의 강연이라고 하니까 속으로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단정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유사 이래 이런 식 질문에 답을 준 적이 없어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그 많은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궁극으로 제기한 질문이 그거지요. 그러나 그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지금까지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존재하는 거지요. 하지만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나 많은 것이지요. 그 수많은 답이 다 답이지요.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각자가 했다는 답이 다 답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이 아니라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 로 질문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왜 쓰냐? 마려워서 써요. 왜 똥 싸? 마려워서 싸?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왜 마려워? 지요.
그 답을 헤겔이 멋지게 했어요.
헤겔은 원래 관념론자입니다. 태초에 하늘엔 정신이 먼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 1절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 로고스 즉 정신이지요. 그런데 정신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것이라 실현이 안 되고 그냥 정신적인 상태로만 남아있어. 어느 날 정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 싶었던 거야(내가 누구지? 내가 어떻게 생겼을까? 한마디로 마려운 거지요). 그래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투사해서 자연을 만들었습니다. 관념에서 물질이, 자연이 나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관념론입니다.(물질에서 정신이 발생 - 유물론).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어? 자기가 누군지 궁금했던 것이지요. 누굴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지요.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했다는 예수도 궁극엔 메시아로서의 자기를 위해서 죽은 것이지요. 명색이 메시아인데 빌라도에게 날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고 매달렸다면 인상 팍 구긴 것이지요. 이왕 죽을 거라면 폼나게 죽자. 그래서 3년 동안 이룬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다 이루었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폼이 납니까. 니이체는 그걸 알아버렸어.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통쾌한 농담으로 시작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이 유쾌한 농담을 들으면서도 웃지를 않아. 괜히 너무 심각하는 거야).
서른 살에 산속으로 들어간 다음 10년 후, 마음에 변화가 왔어.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말하는 거야.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 비추어 주었다. 내가 그리고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다면 너는 필경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으리라.”
태양더러 네가 날 비춰준다고 폼 잡지 말라는 거지. 되려 지켜봐준 나에게 감사하라는 거야. 싸가지가 하나도 없지요. 우리 아이놈이 “날 위해 날 낳았어요? 둘이 좋다가 내가 생긴 거자나? 나 키우는 재미로 살았지 나 없었으면 심심해서 어쩔 뻔했어?”라고 말 하는 격이잖아요?
로고스의 자기 투사. 하나님의 자기투사, 그것이 자연이에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한자가 뜻글자인데 이렇게 그 뜻을 잘 살린 한자는 없는 것 같아. 그러면 거꾸로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냐? 이렇게 생긴 거지요. 허나마나한 말이지만 엄청난 말이지요. 모든 진리는 동어반복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헤겔에 의하면 그 정신이라는 것이 막 마려웠던 거야. 그래서 자신을 투사해서 드러난 것이 자연이야. 여기까지만. 더 설명하면 바로 바닥 드러나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갑시다. 천지창조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창1장 26-7) 그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슴에(머리인가?) 어쨌든 내 안에 있는 걸 투사해서 드러낸 것이 우리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야. 그런데 우리는 수필을 써놓고 그럴 수 있었나? 우리는 “보시기에 비참했노라”야. 하도 이상해서 나온 작품을 놓고 그 앞에서 물었어.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작품이 말하는 거야. 나는 바로 너다. 요즘 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낯설어. 아저씬 누구세요? 그러면 똑 같이 그 아저씨도 물어. 아저씬 누구세요? 똑 같은 걸 보면 틀림없는 나지. 도대체 그 잘났던 나는 어디로 가고 이런 후줄근한 거죽만 남은 거야?
헤겔은 정신의 자기투사가 자연이라 했어요. 어릴 때 거울을 보고 자신인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신은 자연을 대할 때 자신이 외화(外化)된 모습이라는 걸 몰라. 자연은 일종의 타자가 되는 거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볼 수 있는 것만은 보았다는 걸 알게 되고 곧 그것은 자기 정신의 투영임을 인식하게 돼. 자기 동일성의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연이 정신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신이 또 다시 정신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런데 이때 정신은 옛날의 정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식에 도달한 정신, 즉 자기자신의 실현에 도달한 정신이 되는 것. 이걸 헤겔은 ‘외화(外化)’라고 하지요.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지요.
후줄근한 아저씨를 보고 “응, 나구나!”하고 끝나면 안 돼요. “오매, 아저씨가 바로 나란 말여! 그런데 어찌 그렇게 되야뿌렀수?” 하고 거기에서 나를 찾는 거예요. 새롭게 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어야지요. 아까 과거의 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바로 여기에 있어요. 내가 스무 살의 때를 거기에 두고 온 것이 아니잖아요. 두고 온 줄 알지만 두고 올 공간이 있어야지요. 존재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과거란 온전히 현재에 있어요. 내 사상 내 감정의 변천의 족적이 온전히 거기에 있어. (타임머신이란 불가능 해. 왜? 가야할 과거도 미래라는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는 것이니까.)
내가 쓴 작품을 봐. 그게 나라는 걸 아는 것.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작가라면 독자가 만나는 당신은 바로 작품 속에 있어요. 외화(外化)를 통해서 비로소 나를 봐. 못나고 늙어 후줄근한 외모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면, 그 내면의 나는 어떻게 생겼냐고? 내 사상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나의 내면의 외화인 나의 작품이 나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얘기합시다. 왜 쓰냐?가 아니라 왜 쓰이나? 제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답은 외화를 통해서 작품을 통해서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직접적이지요).
앤디 워홀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앤디 워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냥 내 그림과 영화의 표면을 보고 나를 보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다.” 진짜 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외화 속에 내가 있다. 그는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복사하듯 연작으로 그렸다. 워홀에게 진짜 마릴린 먼로는 저 유명한 여배우, 영화나 신문이나 잡지 속에서 만들어져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이지요. 피상적 이미지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진정한 모습? 이 따위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요? 있다하더라도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가 아는 마릴린은 어차피 미디어의 산물이지요. 진짜 마릴린은 있는 그대로의 마릴린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각색된 대로의 마릴린입니다. 먼로의 이미지 너머? 사진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에겐 작품으로 말해지는 모습 말고는 다른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인식은 곧 자기실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헤겔은 외화라 한다고 했어요. 왜 글을 써? 마려워서. 왜 마려워? 자기실현하려고. 여러분의 작품이 여러분이 그리려는 것으로 바로 그려졌을 때, 그게 여러분의 자기실현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시기에 심히 안 좋더라예요. 이게 뭐야!’ 이수태의 <취중대오>란 글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술을 마시다가 그러다 보면 어디메쯤에서 넘어가고, 그러다 어느 순간 기똥찬 진리를 깨닫는 거야. 그래서 나중엔 괴발새발 적어놓고는 다음 날 읽어봤더니, 이건 깨달음은커녕 그저 너무나 평범한 거에 불과해요. 나는 이수태에게 반했어요.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걸 고백 안 해요. 끝내 대단한 걸 깨달았다고 우기지요.
누구든 작가라면 마음속에선 거창한 용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토하거나 싸지요. 그런데 토해놓고 보니 용은커녕 지렁이에 불과해요. 토한 당사자도 처음엔 용이 좀 이상해 보여. 그런데 보고 또 보니까 서서히 용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얼마 전 그 흐리멍텅하게 보인 것은 걸작이 내는 후광, 즉 아우라였다는 착각에 빠져. 내가 꿈으로 잉태해서 낳은 저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내 눈엔 분명히 용이야. 잡지에 글 내 놓고, 잡지 오면 자기 글만 백번도 읽었다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그런 사람은 자기만 알아볼 용의 어머니이겠지요. 그 사람들이 하는 말. 요즘 비평이 주례사에요. 세게 강하게 하세요. 그도 눈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 글이 지렁이라는 게 보이거든. 그런 지렁이와 함께 자기 글이 있으니까 그 용스러운 게 보이지 않고 묻혀버렸다는 거지요. 그런데 누가 그거 용 아니고 지렁이라고 말하면 원수 되는 거지. 이런 괘씸한 놈이 있나. 저 놈은 좀 괜찮다고 해서 용을 용으로 볼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더니만 저 놈도 눈이 삐었지. 뭐, 지렁이라고? 야단이 납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말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게 토룡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 정직한 한마디가 당장은 그를 죽일지라도 결국은 그를 살리는 길일 겁니다. 그런데 수필계는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니 인격이란 너그러워야한다고 그 지렁이를 보고 틀림없는 용이라고 사기를 쳐요. 서울에 오서 처음 수업을 열었을 때 모인 이들이 어디에도 뿌리 내리길 거부하는 낭인들이었습니다. 합평을 하는데 거기 모인 작가들이 평론가들보다 말을 더 잘해요. 뻔드르한 허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완전히 칭찬에 질이 나 있더군요.
자기 깨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자가 어디 작가입니까. 절망해서 몇 번 죽어보지 못한 작가가 어디 작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모두들 다 죽어보았대. 바보야, 그렇게 죽은 것은 죽은 것도 아냐! 내 눈으로 그게 토룡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죽은 거지요. 우리가 창작과정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게 이런 것 아닌가요? 분명 용을 그렸는데 나온 것은 토룡뿐. 그렇다면 내가 가슴속에서 키웠던 것이 지렁이에 불과했었구나! 왜 내 가슴속에는 토룡만 사는 거야! 하며 가슴을 치는 경험이 있어야지요.
자기실현이란 무엇일까요? 내 가슴속에 살고 있는 용을 용답게 그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사고가 명료화 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게 토룡이었던 것이지요. 그 증거를 하나 들어 볼까요. 제목보고 내용 맞추기. 수필이 답찾기 게임인가봐. 그런데 그 답이라는 게 너무나 뻔해. 이 뻔한 말 하려고 그렇게 생폼을 다 잡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들이 성공했다는 ‘낯설게 하기’의 지랄 맞을 가벼움이여!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오늘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어떤 변화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가슴엔 처음부터 용이 살고 있었을까? 용은 처음부터 용이 아니라 이무기가 변한 것이잖아. 누구나 처음엔 토룡으로 살다가 그게 미꾸라지로 변하고 그게 뱀으로 변하고 이무기로 변하고 드디어 그게 승천하면 용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토룡을 용으로 키워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실현입니다. 어떻게 키워? 담론을 통해서.
참문학이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와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괴테와 <파우스트>의 괴테는 같은 사람인데도 틀려. 초기의 헤르만헷세와 <유리알유희>의 헷세는 틀려.
조정래의 <태백산맥> 1권과 10권의 차이. 80년대 현대사나 역사철학 등 거대담론의 발전 없었다면 태백산맥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작가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엔 자기실현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수필 같습니다. 수필은 미래에 가장 적합한 장르입니다.
요즘은 각 대학마다 문예창작과가 있어 창작을 가르쳐. 문예창작과는 그해 신춘에 몇 명을 당선시키느냐에 목숨을 겁니다. 창작의 노하우를 가르친다는 것인데, 우리 땐 서라벌 예대라는 게 있었지만 문학을 글쓰는 방법을 배워서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저도 수필선생인데, 동아문화센터에서 수업 때 일인데, 사람들의 눈초리는 수필창작 매뉴얼을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누구의 문하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흠모한 선생이 있으면 그분께 쓴 작품을 보이는 것이고, 그러면 간단한 논평을 듣는 것. 그럴 때 선생은 흠모의 대상이면서 극복의 대상이지요. (바둑에서 이창호가 조훈현의 문하생)
선생으로 나서면서 저의 1성은 나는 당신의 선생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속으론 당신들 복 터진거야. 이렇게 말하는 선생 보았어? 선생이 아닌 선생이 진짜 선생이지요. 그러면 선생노릇 하는 대신에 내가 할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당신의 독자가 되어 주는 것. 전 안 가르쳐요. 왜? 다행히 아는 게 없어서 가르칠 것이 없어. 그래서 당신께 질문하는 거야. 당신이 당신을 가르치는 거지. 덤으로 나도 배우면 좋고. 안 가르치고 돈을 버니 백 % 남는 장사이지요. 어디 처음부터 안 가르치나. 처음엔 나도 봐줘.
고비는 문장을 이 잡듯 봐 주는 단계. 평면에 삼각형을 그리는 단계. 이 단계만으로도 수필계에선 대접 받어. 문장을 봐 주면 공부 많이 했다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데 사실 그것 하자고 한 것 아니거든. 선생 있고 학생 있는 단계란 작가와 작가가 만나는 단계가 아니에요. 그 단계를 넘으면서부턴 왈 담론의 단계가 펼쳐져요. 글짓기의 단계를 넘어서 문학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학생이 선생이 되는 단계. 선생인 나는 공짜로 거저 먹는 단계. 하지만 그런 수업 하고나면 녹초가 되지요.
가장 고약한 친구들, 비밀도 많아. 밀제조창으로 알아. 행여 <에세이스트>에서 공부하는 게 소문날까 봐 쉬쉬해요(날 위해서 그런대. 자기 선생이 무서운 사람이어서 자기가 여기에서 수업하는 지 알면 자기선생이 날 죽인대. 언제 내가 당신 오라고 했어? 찾아 온 손님 어쩔 수 없어서 수업에 동참시킨 건데). 그러다 작품 완성되면 발표해서 박수 짝짝짝, 그 사람 속으로 말 할 거야. 수강료 냈잖아. 엣기 여보 쇼, 그 돈 벌자고 수업한 것 아니지. 당신 속에 잠자고 있는 진정한 작가를 깨워 만나지고 수업한 거잖아. 그런 사람 그 거지근성 버리지 못하면 평생을 해도 작가가 못 돼. 왜? 독립적이지 못하고 남의 눈치나 보는 사람이란 아직 노예지. 거지지. 그런 사람은 항상 거기까지, 글짓기 단계에서 머무르고 말아요.
차원의 문제. 평면과 공간. 삼각형과 정사면체.
3차원의 물체가 2차원에 오면 어떻게 보일까? 그림자만 보여.
평면에 삼각형 그리기도 못해. 삼각형을 그리는 것은 글짓기가 된 거야. 이야기 꼴이 갖춰져 있는 차원. 그런데 우리 수필 선생들은 그런 걸 훌륭한 글쓰기라고 해.
예: <봉선화> 시적 표현, 사물을 빗대서 인간의 심리를 그림.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이야기 아니 줄거리만 있어. 즉 등장인물의 성격이 없어. 다 죽은 거지.
요즘 수필계는 마이너 리그는 활성화 되어 있어. 분명 메이저 리그도 있었는데 요즘 선수가 없어. 노장들은 늙었고, 중견들은 자고 있고, 왜? 신인다운 신인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야. 스타가 없으니 관중이 없지. 그러다가 판의 주도권을 마이너리그에게 뺏길 것. 그러면 수필이 그들이 쓰는, 글짓기도 못 되는 게 되어 버려.
평면의 세 점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생명력 때문에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욕망하기 시작하고, 그러면 꼴리는 거야(도올의 ‘꼴림’) 불끈불끈 일어서서 드디어 한 점을 찍는 거야. 평면이 3차원의 공간이 되는 것. 삼각형이 정사면체의 되는 것. 그 한 점이 바로 정점이야. 그 전복의 점.
<구양근의 상수리 숲을 지나며>
수업이란 끝없이 질문해서 서로 담화함으로써 그 점을 찍도록 하는 것이야. 나는 그때 그 사람들의 감격한 표정들을 잊지 못해. 사람이 변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 그는 삶에 각이 나와.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져요. 한마디로 질이 나는 것이지요. 머리 좋은 친구들은 그것도 흉내를 내. 세상에 깨달았다는 놈들의 태반은 흉내내기야.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나쁜 놈들입니다. 도를 닦다보면 돈오할 수 있지요. 돈오란 천지개벽 같은 충격으로 옵니다. 그 혁명은 순간일 수도 있고 얼마간의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뼈를 깎는 점수(漸修)가 없으면. 점수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유지가 안 되고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사유만큼 부패가 심한 게 없을 것입니다. 본인도 믿기지 않는 거지요. 따르는 사람들의 기대는 있고, 어쩔 수 없이 그 다음은 흉내를 내는 거지요. 사람들은 까빡 속아요. 호모사피언스란 말이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라지만 보통인간들의 사유세계라는 얼마나 한심한가(상상력의 위대함이여. 그러나 상상력의 빈곤함이여!). 우리가 현대에 사는가. 우리는 중세에 살아. 근대란 신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해요.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드러 선 것이요. 점치러 가는 사람. 교회에 가서 복 주라고 비는 사람. 그의 사고는 아직 중세에 있는 거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그리스 사람들이 배운 유크리트 기하학을 지금까지 배운 것이지(학교에선 비유크리트 기하학은 가르치지 않아) 대중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크게 보면 너무나 소박해.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 삶에 각이 나오는 것. 그 자는 문학을 쓰기가 아니라 직접 되기한 거야. 내 생각엔 그것이 참다운 점수야. 혁명이야.
<최진석의 예> 라깡되기 노자되기.
완성된 되기의 세계가 문학으로 되는 4차원이 아닐까요. 몸으로 되기. 4차원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해. 상대성 원리. 평행선의 공리. 블랙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수신의 의미는? <데미안>의 알이 깨어지는 아픔.
평천하의 의미는? 휴먼이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지요. 생명사상.
촛불은 치국의 단계에 머물렀어. 소의 생명권에 대한 고찰이 없어. 도룡룡이 고소를 했어.
세상의 기득권자들은 우리에게 수신한 다음 제가나 하라고 해. 그러나 수신이 완성될 때가 평천하 하는 것이고, 평천하하는 게 바로 수신하는 것.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삼보일배. 티벳의 3보 1배처럼 극락왕생코자 한다면 난 비웃고 말아. 이게 바로 평천하운동. 곧 수신이야. 제가야 치국이야.
우리는 왜 수필을 쓰는가. 왜 써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아 보았습니다.
수필의 내가 경험한 것을 쓴다고 할 때, 그 경험에는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한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때, 수필은 내 (과거의) 삶을 도막 내 이야기 화(化)하기입니다. 삶은 서사가 아닙니다. 시작도 전개도 클라이막스도 대단원도 없는 밋밋한 것이지요. 내가 경험한 걸 쓰면 수필이라고 하더라며 내밀면 안 됩니다. 플롯을 짜고, 그런데 왜 이런 번거로운 짓거리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나를 찾기 위해서 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냥 밋밋하게 살아 온 나의 과거의 삶을 조각내서 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의 삶을 완성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절로 부여 돼? 똑 같은 짓을 또 반복하면 안 돼. 하늘 아래 새 것이 없어. 모든 이야기는 이미 다 해진 이야기야.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의 글을 쓰는 거야. 그러면 눈을 떠냐 돼. 어떻게 눈을 뜰 것인가? 그 유일한 수단은 담론이라 했습니다. 담론이란 만남입니다. 오늘 한국수필에 필요한 것은 담론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합니다. 수필가들이여, 대구에서 떼로 만납시다가 아니고, 담론으로의 만남. 만나야 할 사람들이 헐렁한 네트웍을 통해서 사랑으로 뼈 드러날 때까지 토론하는 만남. 한 발 앞서 열기가 힘들지. 일단 열면 따르기는 쉬워요.
나라는 존재가 나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된 존재라는 면에서 수필의 대상은 무엇인가 등 더 해야 될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한 된 시간으로 여기에서 끝내고 다음을 기약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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