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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용산(龍山)에서

테오리아2 2016. 3. 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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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山)에서

                                        오규원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幻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근사한 이야기의 意志와 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詐欺도  詐欺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중에서

 

 

  시는 무슨 근사한 것이 아니라고, 오규원은 귀띔한다. 어투에서 느껴지듯 힘을 쏙 뺀 담백함으로. 그러나 그의 담백함이 이 세상 담백한 언어의 전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서의 담백함이다. 아이러니와 위트를 섞어 쓰는 그의 시법은 60년대 이후 물신의 풍조와 조악한 자유 등으로부터 모로 삐딱하게 서서 뒷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조금은 비아냥이 섞인, 그렇기 때문에 풍자와 사실의 중간을 매개하려는 면모를 보여준다.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강의를 죽음으로 끝마친 그의 생은 사라지고 시들만 남아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정말 그렇다. 시는 다른 예술들처럼 무슨 근사한 치장품이 아니다. 그저 갑갑한 현실에서 발꿈치나 들고 몇 센티 위를 가늠해 볼 뿐인 것이다. 그런 시에게 고답스런 사상과 위대한 사기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런지도 모르겠다. 시는 남아 있는 생에 조금의 덧칠로써 조금 더 생을 생답게 만들어야 하는 생의 소모품 딱 그쯤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자신이나 시를 위한 변명으로 사용하지는 말자.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생-詩-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그맣거나 말거나 창문처럼 어두운 곳에 빛을 던지기도 하고, 우릴 꿈꾸게도 하면서.  

  그는 편하게, 편하게 언어를 부리는 재주를 가졌다.  그 편함 때문에 그나 그의 시를 얕보아선 결코 안 된다. 어느 한 군데 늘어지거나 모나게 흘러가는 구석이 이 시에는 없다. 루즈해지려는 순간, 아이러니한 어법이 우릴 툭 치고 깨우며 간다. 다 남는 말 같은데 덜어낼 데도 없이 모난 리듬 하나 없이 유려하다. 얼마나 부리면 말이 이렇게 말을 잗 듣게 될까. 최근의 뒤틀린 시문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서 여유와 자유로움을 느끼게도 한다. 부러운지고.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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