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미․양․가
곽 흥 렬
대체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막내가 하늘에 해 박혔을 때 집에 들어오기는 근래에 드문 일이다. 고등학생으로 올라가고부터, 방과 후 보충수업이다 자율학습이다 학원 과외다 해서 막내의 귀가는 언제나 자정 어름이 되어서였다. 그런 녀석이, 오늘은 여느 때보다 일찌거니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것이다.
“야~, 내일 아침엔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 걸!”
적이 의아스러워 하며 은근슬쩍 농조로 던지는 나의 반응에 아이가 고무공 튕기듯 되받는다.
“오늘이 여름 방학 하는 날인 줄도 모르셔요, 아빠는?”
그런 아이의 목소리에 가벼운 들뜸과 회흑빛 피로가 묻어 있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인가. 오랜 갈증 끝에 목을 축여 주는 상큼한 샘물 같은 시간이다. 우리네 삶이란 이처럼 대개 비구름 아흐레에 햇빛 하루쯤이 아닐까 싶다.
막내가 수저를 들려다 말고 주저주저하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종잇장 하나를 내민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떨군다. 뭔가 해서 펼쳐보니, 다름 아닌 학기말 성적표다. 아이가 근 반년 동안, 밤잠과 싸우고 취미생활을 반납해 가며 흘린 땀의 대가가 이 한 장의 인쇄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질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단순한 종잇장 이상의 무게가 마음을 짓눌러 온다.
어디 보자, 지난 한 학기의 학교생활을 녀석은 어떤 기록으로 남겼을까. 설레는 기대를 안고 펼쳐드는 손끝에 바르르 긴장이 실린다. 부모로서의 욕심 같아선 전 과목이 모두 ‘수’였으면 싶었는데, 쌀에 섞인 뉘처럼 간간이 ‘우’도 끼여 있고 ‘미’까지 눈에 뜨인다. 동실동실한 알곡만 영글기를 고대했으나 태반을 쭉정이인 채로 거두어들인 농부의 심정이 된다. ‘학업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아.’, 이렇게 자아류의 변설로 애써 위안을 삼으면서도 못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막내의 통지표는, 불현듯이 삼십 년을 훌쩍 뛰어넘어 나의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의 필름을 되감아 놓는다.
수․우․미․양․가 가운데 노상 ‘가’만 도맡아 놓고 받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통지표에는 ‘가․가․가․가․가․가․가……’, 이런 식으로 오랏줄에 묶여 감옥소로 끌려가는 죄수들처럼 ‘가’가 주르르 행렬을 이루었다. 오죽했으면 그 아이의 부모가 ‘양’이라도 하나 구경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 했었을까.
그에 반해 내 통지표는 온통 ‘수’ 일색이었다. 원체 타고난 약골이었던 탓에 어쩌다 체육 과목에서 ‘우’를 받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수․수․수․수․수․수․수……’, 그 모양새는 마치 뭇 병졸들을 거느리고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개선장군마냥 나를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세상살이에서의 우등생까지나 되는 줄 분별없이 우쭐대며 거들먹거렸었다.
그리고 삼십 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우리는 이제 어느덧 중년의 유역에 닿아 있다. 그 삼십 년이란, 사람의 처지를 백팔십도로 뒤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물 나도록 ‘가’만 받아오던 그 아이가, 어느 날 성공한 사회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쩌다 참석한 동기회 만남 자리에서였다. 있어 보이는 말쑥한 차림새, 품격이 묻어나는 세련된 몸가짐, 좌중을 휘어잡는 유창한 말솜씨,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수월찮은 액수의 찬조금을 선뜻 동기회 발전기금으로 내놓는 호기로운 모습도 보여주었다. 장내가 떠나갈 듯 요란스런 박수갈채에 파묻힌 채 그 순간 그는 모든 동기들의 우상이 되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는 이렇게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 박수 소리와 조명이 무대 맞은편 구석자리의 나를 헝겊인형처럼 납작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기름 값을 걱정하고, 어쩌다 커피 한 잔 접대하는 데도 먼저 주머니 사정부터 따져야 하는 그렇고 그런 생활인으로서의 초라한 내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내가 ‘수’만 믿고 토끼처럼 자만심에 빠져 요리조리 잔꾀나 부리고 있을 동안, 그는 ‘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북이같이 앞만 보고 한 발 두 발 뚜벅뚜벅 걸음을 재촉해 왔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먼 지점에까지 달아나 버린 것이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이 곧 사회의 우등생은 아니며, 학교에서의 열등생이 곧 사회의 열등생은 아니라는 사실을 요즈음 들어 절절히 체감한다. 인생역전, 이따금 갖게 되는 동기회 만남 자리는 이 드라마틱한 새옹지마의 상황을 확인하기에 다시없이 좋은 기회이다. ‘수’가 세상이 우러를 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도, 물색 모르고 우쭐거릴 만치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겉만 번드레한 빈 조개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결국 삼십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학업성취도를 평가할 때, 우리의 ‘가’에 해당하는 등급을 나타내는 말로 서양에서는 ‘F’를 쓴다. 이른바 권총학점으로 불리는 이 ‘F’는 ‘불가不可’ 혹은 ‘낙제’라는 뜻을 지닌 영어단어 ‘failure’의 머리글자이다. 그것은 실패한 열등생, 구제불능의 낙오자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이다. 그래서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들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잔인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그들다운 발상이다.
우리의 ‘가’에는 가可 곧 ‘가능성’이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 있다. 철 따라 유행이 바뀌듯 세상 이치란 돌고 도는 것이어서,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의 가지마저 꺾어서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애초 가능성의 싹조차 매몰차게 잘라 버리는 영어식 표현에 비해 우리의 ‘가’는 얼마나 너그럽고, 그래서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르겠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배려가, ‘가’의 대명사였던 그 아이를 오늘의 그로 다시 태어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도 같다. ‘수․우․미․양․가’, 이는 수직적인 높낮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질서일 따름이다.
오늘, 막내가 받아온 통지표를 앞에 놓고 혼자서 곰곰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골똘하다 보니, 밤은 시나브로 깊어 있었다.
<2012년도 '열린수필' 제5호 '초대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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