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동백 -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 2000년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
고래의 꿈 - 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 창작과 비평』 2006 여름호 발표
봄날 -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시집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2000) 중에서
담쟁이 덩굴이 동물해부학을 들여다보다
오후 세 시, 동물병원은 고요하다
뚱뚱한 의자와
털이 잘 빗겨진 의자와
리본과 방울을 단 의자와
발톱에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의자가
둘러앉아 소근거리고 있다
오늘은 출장 진료도 없었고
전화벨 소리도 조용하다
수의사 김표상 원장은
줄곧 동물 해부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를 담기 위한
여우의 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창문을 넘어온 담쟁이 덩굴이
푸른 장미를 봉합하려다
실패한 수술가위와
바늘과 핀셋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 한 번의 진료가 있었다
모호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두통이 심한 환자
자, 미스터 도그씨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세요
술, 매혹될 수밖에 없는
항아리에 말을 가득 부었다
항아리 속에서 말들이 소용돌이친다
가장자리에 닿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말은 항아리를
끌어올리다 그대 매혹의 입술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을 불러낼 것이다
죽음은 옷 입혀질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죽음은 다시 어느 한 생애의 집이 될 것이다
뒤엎어진 잔이 기억을 되찾는다
한때는 복면이었고 어느 땐가는 부재자였던 그대
지금은 그대 입술에 감옥이 모여 있으니
말,닿으면 부패하는
감옥이 되는
그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다시 잔을 비운다 모든 말들이
그들이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터질 듯한
매혹 거품 입술들만 남기고
외투
처음 우리는 거뭇한 그것이
누군가 내다버린
트렁크인 줄만 알았다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무언가 신성한 것을
소유하고 있기나 한 듯이
일테면 성경을 싼
검은 가죽 케이스처럼,
얇은 외투 하나가
부랑자인 어느 사내를
꼬옥 감싸고 누워 있었다
턱까지 단추를 채우고
팔과 다리를 오그려 넣고
트렁크처럼 등을 부풀린 채,
이른 아침,
추운 날씨 때문에
우리는 곧 그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마치 조개이거나
달팽이 껍질이거나 한 듯이
누구나 한번쯤 그 앞에
불려가 시험을 받을 법했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도 입구에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지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꽃밭에서
탁란(濁亂)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고 했으나 마중나가진 못 하겠다
개들 고양이들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問)도 세우지 못 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 겠다
바지랑대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비평가가 뽑은 2002년 올해의 좋은 시에 선정된 시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
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룻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
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
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
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
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
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
가 산다
- 2005년<현대문학> 10월호
- 2005년 문예지에 발표된 162명 전문가가 좋은 2006년 최고의 詩
채송화 -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커다란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수염으로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 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이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긴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가을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이 여태 거기서 뭐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 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20008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가 방 - 송 찬 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촛불 - 송찬호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계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칸나 -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은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 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구리고 앉아 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초원의 빛 - 송찬호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을 뿐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재촉하는,
한 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병뚜껑 - 송찬호
분명 저 여자는 그 동그란 입술을
재빨리 닫지 못했던 것 같다 삽시간에
그 육체의 더운 내용물이 흘러나와 버렸으니
어느 목격자는 저 여자에게 갑자기 사슴이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기 위하여 그 사슴이 저렇게 피로 변했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무지막지한 자동차가 함부로
저 여자에게 뛰어들었다고 생각할 순 없는 일이야
여자의 꺾여진 목은 유난히 희고 깨진
무릎 위로 하얀 레이스의 속옷이 얼핏 보인다
가슴 앞 단추들은 그 육체의 파탄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지런하고 완강하게 붙어 있다
그렇다 저 육체는 어떤 경우에도 저렇듯 품위와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탄식의 연속인 것이다
저처럼 한마디 비명으로 삶이 끝날 수 있는데도
놀라움과 기쁨과 슬픔 따위의 육체의 서랍을
그토록 많이 달고 열어 보여줄 수 있으니
그리고 횡단 보도 밖으로 튕겨나간 저 하이힐을 보라 참 신기한
구름이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어떤 처녀의 발을
사로잡던 마술 상자였던 자신을 까마득히 잊은 듯
도로 옆 화단에 처박혀 콧등에
앉은 나비와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누군가 앰뷸런스를 부른다
우선 저 여자를 덮을 시트가 필요하다
얼굴만이라도 덮을 모자도 좋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그 동그란 입술을 덮을 만한
병뚜껑이 운명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었어도……
나는 그 병뚜껑만도 못한 시를 옆에 놓고 지나간다
우리들의 찐빵에 대하여 - 송찬호
설레는 마음으로 늦은 저녁 당신과 마주 앉았지요
진열장 유리 밖에서 처음 춤추는 당신을 보았을 때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당신의 춤은 참 보기 아름다웠습니다
설탕처럼 반짝이는 불빛 아래 둘러선 사람들은 듬뿍 동전을 던졌구요
난 그런 당신을 사모했습니다 내 발걸음은 늘 당신의
거리를 향했습니다만,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포근한 그릇에
파묻혀 당신은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어요
짐작건대 거리 맞은편 진열장 속 그 행복이란 보석을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오늘 가까이서 당신을 보니
퉁퉁 부어오른 당신의 발, 부어오른 당신의 얼굴,
오오 당신은 부푼 것이 아니라
부르튼 거군요 춤을 추다 지쳐 그대로 주저앉아 빵이 된 거군요
촛불 - 송찬호
캄캄한 그들이 다시 왔나이다 그들에 의해,
밤이 불려왔나이다
불려와 무릎 꿇어졌나이다
캄캄한 칼로 밤을 내리쳤나이다
상수리나무 열매는
그리 되게 하사,
단단한 돌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나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나이다
밤이 둘로 쪼개졌나이다
희미한 빛에 사로 잡혀,
촛불은 둘로 쪼개졌나이다
뜨거운 촛농이 흘러내렸나이다
금단추가 굴러 왔나이다
돌잉어도 헤엄쳐 왔나이다
희미한 빛이 시종이 되게 하사,
캄캄한 그들이 왔나이다
코스모스 - 송찬호
지난 팔월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와
코스모스 가을신상품을 소개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가늘고 긴 꽃대와 석청 냄새가 나는 꽃은
밀교에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헌데 나는 모가지가 가는 꽃에 대해서는 오래 바라보다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 얹어두는 버릇이 있다 코스모스가 꼭 그러하다
가을 운동회날 같은 아침 조무래기 아이들 몇 세워놓고
쉼없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근육없는 무용을 보아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 때를 벗어난 오후,
젊은 날은 아름답다 코스모스 면사무소 첫 출근날
첫 일과가 하늘아래 오지의 꽃밭을 다 세는 일이었던,
스물 한 살 지방행정서기보
바람의 터번이 다 풀렸고나 가을이 길어간다
대체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의 통점은 어디쯤인가
나는 오늘 멀리 돌아다니던, 생활의 관절
모두 빠져나간 무릎 조용히 불러 앞세우고
코스모스길 따라 뼈주사 한 대 맞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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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생.
경북대 독문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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