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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십 년 만의 귀향

테오리아2 2013. 1. 18.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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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만의 귀향


곽 흥 렬




   영창에 비친 달이 오늘따라 유난히 환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뭉게구름 조각들이 둥실둥실 떠 흐른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당에 드리워진 달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풍경화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 달도 나하고 눈맞춤을 하느라 움직임이 없다. 그 광경에 취해 있노라니 지나간 날들의 영상이 활동사진처럼 주르륵 떠오른다.

 

   이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노래처럼 부르고 주문처럼 되뇌어 왔다.

 

   고향 언저리의 산골에다 새 둥지를 마련하면서 마침내 그 원을 풀었다. 푸른 세월을 타관 객지에서 다 보내고 머리에 서리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서야 이룬 성취다. 턱을 괴고 가만히 헤아려 보니 그새 어언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백석이 읊었던 절창이 지금의 내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해 준다. 그렇다고 백석처럼 나도 세상이 더러워서 산골로 숨어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세상과 씨름하느라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지나간 날들을 조용히 되돌아보며 후반전 인생을 의미 있게 가꾸어 갈 꿈을 꾸었다.

 

   수필가 ㅎ씨의 글귀가 생각난다. 아직 한창일 나이에 저세상으로 떠난 친정 오라버니의 죽음을 두고 장례미사 때 신부가 들려준 강론의 말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000의 영혼은 너무 순수해서 이 세상에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한테는 영혼의 순수까지야 언감생심일 노릇이지만, 마구 정신을 휘둘리게 만드는 도시의 복닥거림이 어쩐지 생리에 맞지 않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지난 사십 년은 끊임없이 도시와 헤어지는 연습을 해 온 시간이었다. 누구는 도시의 활기 넘치는 역동성에서 삶의 에너지가 샘솟는다고 했다. 시골은 고여 있는 물 같아서 도무지 사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데서 나는 오히려 재미를 느낀다. 사람 대신 만나게 되는 무수한 생명체들, 그들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의 소중한 가치를 아프도록 일깨워 준다. 그것은 회색빛 일색인 콘크리트 숲으로부터 벗어나 초록이 지천인 산과 들에서 풍겨오는 건강한 생명의 냄새를 원 없이 맡을 수 있게 되면서 얻어진 무가보無價寶의 수확이다.

 

   사방 어디라도 눈만 돌리면 풀과 나무들이 펼치는 초록의 향연이 연출되고 있다. 그 성대한 축제를 지켜보노라니,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풀려 내려가는 듯 마음이 편안해 온다. 그러면서 지금껏 생각 없이 잘도 누려오던 편리를 박차고 구태여 군색함을 선택한 스스로의 결정이 참으로 잘한 판단이었음을 절절히 깨닫는다.

 

   어느 하룬들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인한 정신의 시달림에서 자유로운 적이 있었던가. 순간순간 숨이 가빠오고 나날이 영혼은 황폐화해 갔었다. 이런 나를 향해 고향은 자기를 찾아오라며 줄기차게 손짓을 보냈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면서 오랜 세월 찰거머리처럼 괴롭혀 온 고질병으로부터 마침내 놓여날 수 있었다.

 

   산골 생활은 문명과의 거리 두기다. 문명과 멀어질수록 호흡은 조금씩 골라지고 영혼은 부쩍부쩍 자라난다는 것을 이곳 산골로 삶터를 옮기고 나서 실감한다.

 

   사십 년 만의 귀향으로, 나는 사람을 잃고 자연을 얻었다.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데가 어디 있으랴. 어느 하나를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사람살이의 이치 아니던가.

 

   손익계산서를 뽑아 보니 그래도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는 성싶다. 이만하면 나로선 충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2012년 8월15일 광복절>

출처 : 온새미로문학
글쓴이 : 곽흥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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