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김희자
참 용하게도 야물다. 시기를 봐선 벌써 삭고 없을 텐데 알맹이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놀랍다. 지난 여름 어머니께서 보내온 마늘이다. 손수 재배는 못하지만 다랭이 논밭에서 마늘이 수확되면 사서 보내주신다. 싹이 나오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며 마음이 쓰였으나 부질없는 기우였다. 어머니의 온정을 생각하며 한 톨도 버리지 않고 다져 냉동실에 저장한다. 다진 마늘은 양념으로 필요할 때 꺼내어 쓰면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마늘의 독특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니 고향의 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고향 남해는 푸른빛으로 물이 든다. 가을에 심은 마늘이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돋우기 때문이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논밭을 제외하고는 온 대지가 푸르다. 남쪽 바다에서 달려온 봄바람은 다랭이 논밭을 한 계단씩 오르며 마늘의 심을 키운다. 기온이 올라가고 햇볕이 드세어지면 겨우내 해풍을 이겨낸 대궁은 씨앗에게 마지막 공을 들인다. 아기를 잉태한 여인처럼 벼를 심기 전까지 혼신을 다해야 씨알이 여물 수 있다.
소싯적, 파종 시기가 다가오면 어머니는 고방에 앉아 갈무리해 둔 마늘을 풀었다. 씨알이 굵고 튼실한 것을 골라 한 쪽 한 쪽씩 쪼개면 종자가 되었다. 대개 마늘 한 톨은 여섯에서 여덟 개의 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그마한 마늘 한 쪽이 한 톨의 질 좋은 마늘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땅에 심을 때도 간격이 필요하다.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해야 제대로 여물 수 있기 때문이다. 흙덮기의 깊이 또한 중요하다. 흙을 얇게 덮으면 겨울 동안 땅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씨가 땅 위로 노출될 수 있다. 흙의 높이가 너무 두터우면 봄에 더디게 싹이 올라오고 수확할 때 뽑기가 힘들어진다.
씨마늘을 파종할 철이 되면 온 동네가 분주했다. 부산한 농사철에는 고사리 같은 아이 손도 요긴했다. 농사보다 바깥일에 관심이 더 많았던 아버지라 꼿꼿하던 어머니의 허리는 하루하루 굽어 갔다. 소를 앞세워 논밭을 가는 일은 아버지가 하셨지만 대부분의 일거리는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가 소로 밭을 갈아 놓으면 어머니와 피붙이들은 흙을 다듬어 씨를 심었다. 등 너머 있는 큰 밭에 마늘을 다 심으려면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어머니가 고랑을 치면 고만고만한 딸들은 씨를 줄지어 심었다. 뿌리가 잘 내리도록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였다. 엄지와 중지의 간격만큼 거리를 두고 심은 후 흙과 짚으로 덮었다.
모든 자연의 법칙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쪽 하나가 삭아 마늘 한 톨을 만들려면 긴 겨울이 가고 봄도 뒷모습을 보여야 한다. 언 땅에서 해풍을 맞으며 찬 겨울을 거뜬히 이겨낸 마늘은 이른 봄에 쑥쑥 자란다. 겨우내 숨겨두었던 생명을 봄에 모두 발산하는 채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성장을 위한 웃거름을 넉넉히 주어야 한다. 비료가 귀했던 시절에는 마늘밭에 거름을 내어야 했다. 소 마구간에서 나온 퇴비와 뒷간에서 퍼 올린 오물로 거름을 숙성시켰다. 썩히고 발효시킨 거름을 밭에 내려면 대야를 이고 밭으로 수 십 번씩 오고 갔다.
마늘밭에 잡초가 무성해지면 어머니는 호미를 들고 논밭으로 나갔다. 마늘 한 쪽이 제 몸을 삭여 한 톨의 마늘을 키워내듯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의 몸은 사위어갔다. 정형적인 조선의 여인이었다. 열여섯 살에 무지개 재를 넘어 시집을 왔다. 층층시하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 갖은 고생 마다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워냈다. 세 아이를 가슴에 묻는 고초 또한 겪었지만 남은 자식들한테 인내하는 법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부모는 죽어도 자식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인내심이 강한 어머니의 피를 참 많이 물려받았다. 팔순이 넘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농사를 접었지만 이태 전만 해도 마늘을 심어보겠노라며 감나무 아래서 쪽을 내셨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 그해 가을에 마늘을 심을 수 없었지만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던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또 다른 잉태를 꿈꾸며 사위어 가는 모든 것은 위대하다. 마늘 한 쪽에도 숨은 진리가 있다. 쪽 마늘 하나가 마늘 한 톨이 되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잘 숙성해야 양질의 거름이 되듯이 토양의 질이 좋아지면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것들도 튼실하다. 찬 겨울을 이겨낸 마늘은 봄이 되면 대궁을 쑥쑥 밀어 올려 종이 나오게 만든다. 줄기에 올라온 마늘종은 뽑아주어야 땅 속에 있는 알이 영근다.
마늘의 효험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마늘은 어느 부분 하나 버릴 것이 없어 한국인의 식탁에 자주 오른다. 알은 알대로 종은 종대로 다양한 음식이 되고 잎과 몸통은 장아찌가 된다.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 등교하기 전에 풀 한 망사리를 베어오면 어머니는 마늘종을 맛나게 무쳐놓았었다. 손수 담근 고추장에 설탕과 참기름을 넣어 버무린 종무침은 참으로 맛이 일품이어서 지금도 추억의 음식으로 남아 있다.
마늘의 강한 향은 음식의 맛을 좋게 하고 식욕을 증진시키는 효과까지 있어 사랑받는 식품이다. 살균 항균작용과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며 정력과 혈액순환을 증진시켜 신진대사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늘의 인기가 도드라지는 것은 암을 이겨내는 식품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일화까지 단군신화에 등장하지 않는가. 그래서 마늘은 슈퍼푸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터는 비우고 채우면서 생명을 키워내듯, 만물은 마주하는 고통이 깊을수록 더욱 성숙한다.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자란 남해 마늘은 거친 환경에서 단단해졌기에 알이 여물 수밖에 없다. 해풍과 맞서지 않은 평지의 마늘보다 더 영글고 효험이 있다. 쌀이 귀해 내남없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청보리가 푸름을 과시했지만 땟거리의 걱정에서 벗어난 지금은 마늘이 대세다. 남해 특산물인 마늘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로가 되고 있다. 고향에서 보내온 마늘은 베란다에 방치해도 쉬이 삭지 않는다. 그 만큼 명품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파란 마늘의 알싸한 향이 코를 자극하는 봄이다. 봄이 찾아든 다랭이 논밭에는 온통 마늘로 파란색일 것이다. 눈만 감아도 훤하게 보이는 고향 남해. 손에 배인 마늘 냄새를 맡으니 또 향수병이 도지려고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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