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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바라기-울산예총 가작

테오리아2 2013. 10. 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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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바라기

 

                                                                                                              김민영

 

    울산 배의 명성이 자자한 만큼 울산에는 배 밭이 많다. 꽃 피는 시절이 되면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곳곳의 산야에서 배꽃이 층층으로 피고 진다. 작고 하얀 꽃잎은 창백한 어머니 얼굴을 보는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꽃가지가 자그마한 어머니 몸짓으로 다가올 때면 생인손처럼 가슴 한쪽이 저미어진다.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있다. 한동안 요양원에 계셨을 때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 야윈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았다.

너 따라가면 안 되겠나?”

퀭한 눈으로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길을 외면할 수 없어 모시고 오게 되었다.

  며칠 동안 어머니는 고향에 가보기를 원했다. 세상 떠나기 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는 처음 가는 고향길이지만 어머니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떠났다. 내 가슴 속의 고향은 풋풋한 그리움보다 아픈 추억이 살아있어 외면해 왔었다.

  진주시를 지나고 산청군으로 접어들었다. 도로를 끼고 흐르는 강물이 잦은 봄비 탓에 어머니 인생만큼이나 거센 황톳물을 토해내며 일렁거렸다.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어 서러운 물소리를 낼 것 같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마을의 처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내기 위해 처녀공출로 어수선하던 때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오간 혼담이 성사되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고된 시집살이에 지쳐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잠이 들어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하고, 밥을 태우는 날이면 굶기기를 예사로 하여 배고픈 서러움을 참았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외처를 데리고 와서 어머니와 한방에서 지내게 했다. 함께 살면서 그녀가 낳은 아이를 어머니 손으로 받게 했으니 어머니는 더는 견디지 못하여 강에 몸을 던졌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은 어머니를 다시 모진 삶 속으로 내밀었다.

  산청군 이정표만 보아도 나 역시 가슴이 아린다. 어머니는 대목 장사를 하기 위해 출산 징후가 올 때까지 장터에서 난전 장사를 하고 그믐날 나를 낳았다. 세밑 추위로 천지가 얼어붙은 새벽녘에 땔감을 마련하지 못한 채 출산하였다 하니 그 고통이 오죽했으랴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해산 직후에 양식이 떨어지자 자식을 모두 굶겨 죽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는 태어난 지 보름도 안 된 나를 업고 정월 보름장사를 나섰다. 장터로 가는 트럭에 짐을 싣고 그 위에 걸터앉아 갓난쟁이와 함께 매서운 정월 찬바람을 맞았다. 붓기도 빠지지 않은 산모가 장사를 나섰으니 출산 후유증이 평생 어머니를 괴롭혔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푸석한 얼굴로 병색이 떠날 줄 몰랐다. 천식으로 밤새도록 잠을 설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아침이 되면 신경통이 더욱 심해져 자식들이 허리와 다리를 주무른 뒤에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쉰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거란 말을 들어와서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죽음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난 마을로 접어들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어머니는 시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궁핍한 살림에 내가 태어났으니 자식 없는 집에 아이를 주라는 말을 듣자 어머니는 한과 고달픔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이곳에서 자식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대한 추억은 없고 애틋한 마음만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용하게도 우리가 살던 곳을 찾았다. 앞마당에 하얗게 꽃을 피운 배나무가 어머니 기억을 끄집어냈다. 고목이 된 배나무를 짚으며 맥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꽃잎이 솜털처럼 흩날렸다. 어머니도 자연의 일부 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한 생이 상처와 고달픔으로 이어지니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집은 밭으로 변하고 돌담은 허물어져서 밭의 경계가 되어 있었다. 찾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돌담 넘어 수많은 헛눈질을 했을 어머니, 이제 당신도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아시고 계실까.

  어머니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지 동네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말을 하니

산 넘고 물 건너와도 핏줄이 있어야 찾아가지 이마가 허연 할매를 누가 반겨줄 거냐.”

정신이 맑은소리를 했다. 녹음에 묻혀있는 마을도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듯한 폭의 수채화로 가슴에 와 닿았다.

  언제부터인지 푸석하게 부어 있던 어머니 몸이 조금씩 야위어 가더니 이제는 가랑잎처럼 가벼워져 혼자서 거동도 잘하지 못한다. 한생을 피어보지 못하고 *대바라기 되어 서산으로 넘어가는 노을 끝자락을 잡고 계신다.

  귀천하는 날까지 얼마 동안 맑은 정신을 가지고 계실지. 좁은 집에 아이 셋과 함께 있으니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으시겠지만, 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고 싶다.

들을 하얗게 수놓고 있는 배꽃을 바라보며

꽃이 참 곱다.”라고 하신다.

  어쩌면 매몰찬 세파 속에 버겁게 피우고 가꾸어낸 당신의 삶이 진실이었는지 모른다. 어스름 저녁 바람에 지는 배꽃이 저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14)

 

 

 

 

 

 

 

 

*대바라기: 끝물에 따 들이지 못하여 서리를 맞고 말라 버린 고추나 목화송이.

 

 

 

 

 

 

출처 : 에세이 울산
글쓴이 : 김민영(5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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