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창작인생의 오작교
곽 흥 렬
하나의 인연이었다고 해야 하리라, 학창 시절부터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특별히 수필을 좋아했었던 것은. 속임 없는 작가의 진솔한 내면세계며 맑은 정신의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르로는 수필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국어책에 실린 주옥같은 수필들은 내 어린 감성의 심지에다 불을 당겨주었다. 나도향의「그믐달」, 김진섭의「백설부」, 이양하의「신록예찬」,「노천명의 「설야산책」, 유달영의「슬픔에 관하여」 등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가슴에 싸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교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배웠던 K수필가의「거룩한 본능」에 유달리 애착이 갔다. 한 여린 생명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밀렵꾼의 분별없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꾸짖으면서, 죽은 짝을 차마 버려두고 떠날 수 없어 무서리 내린 어느 늦가을 날 아침 서로 목을 감싸 안고 죽은 황새의 본능적인 숭고한 사랑을 클로즈업시킨 장면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은 울림이 전류처럼 저릿하게 가슴을 타고 흘렀었다. 이것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황홀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작가가 우리 고장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끌리게 하는 데 한몫을 거들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품격 높은 글을 쓰신 작가는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떤 특별한 삶을 살고 계신 분일까. 무엇을 꿈꾸며 무엇에다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분일까. 물론 흑백사진을 통해 대강의 윤곽은 그려볼 수 있었지만, 그 고고한 정신세계가 한없이 가마득하게 여겨졌었다.
그저 글이 좋아서 읽고, 읽고, 다시 또 읽었다. 때로는 눈으로, 때로는 목청으로, 때로는 가슴으로 읽었다. 거듭해서 읽다 보니 거의 전문을 욀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라는 구절에 와서는, 여남은 살 어린 시절의 나른하도록 한가로웠던 고향의 정취에 흠씬 젖어들어 객지생활의 목마른 외로움을 달래 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훗날 수필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대학에서 전공을 국문학으로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던 수학 과목으로부터의 해방은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특히 수필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 수필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수필만 가까이하고 싶었고 수필에 목말라 했다. 하지만 ‘교양 국어’에 실린 몇 편 안 되는 작품만으로는 이 갈증을 채워 주지 못했다. 그 사 년 동안 틈나는 대로 시내 서점가를 전전하거나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부지런히 수필집들을 구해다 읽었다. 그 때 읽었던 대표적인 책들이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김우종의 『밤이 길어서 남긴 사연』, 조병화의 『마침내 사랑이 그러하듯이』같은 감성 에세이집이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수필의 아아한 세계에 서서히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학업을 마친 후 일선학교에서 교편을 잡음으로써 이제껏 배움을 받던 처지에서 가르침을 주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게 되었을 때, 그 사이 몇 차례에 걸쳐 교과서 개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본능’이 여전히 책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옛 연인이라도 다시 만난 듯 야릇한 흥분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배울 때의 기분과 가르치게 된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물론 본문 내용이야 토씨며 구두점 하나까지 예전 그대로였지만, 같은 작품도 상황이나 처지가 바뀌고 나서 대하면 그 정감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이를테면 학창 시절엔 미처 몰랐던, 작품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미감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어릴 적부터 교내외 백일장에 부지런히 불려 다니던 알량한 글 솜씨를 되살려, 학교에 근무하는 짬짬이 수필쓰기를 다시 시도해 보게 되었다. 지금 들여다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습작품들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젊은 혈기 하나로 부지런히 긁적여 대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식이 용감하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덜렁 자그마한 책자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필 문학인의 모임인 ‘Y수필문학회’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겨우 이십대 후반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금도 물론 어설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아직 인생이 뭔지도, 더더구나 제대로 된 수필이란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던 풋내기 시절이었다.
참으로 넓고도 좁은 것이 세상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마음에 두고 그리던 「거룩한 본능」의 작가 K선생님을 천만 뜻밖에도 바로 그 Y문학 동호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가르치고 배우는 사제의 관계가 아니라 글과 글로써 마주하는 대등한 관계로, 그냥 어쩌다 한 번 마주치고 마는 일회성이 아니라 아예 한 달에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대면하면서 문학을 말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글쓰기 도반道伴으로서 말이다.
선생님은 당시 Y수필문학회의 회장 직책을 맡고 계셨다. 그때의 첫인상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훤하게 벗겨진 이마, 부리부리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매, 사람 좋아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초로의 선비풍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국어책에 실린 수필이 인연을 맺게 해 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아스라하여 도저히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아만 보이던 그 세계가 눈앞의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직나직한 음성, 구수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말솜씨에는 좌중을 압도하는 신비로운 힘이 담겨 있었다. 해박한 식견과 막힘없는 언변은 가히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저런 튼실한 밑바탕이 갖추어져 있기에 「거룩한 본능」같은 웅숭깊은 작품을 써낼 수 있겠구나 하고 나는 스스로 단정해 버렸다.
함께 머리 맞대고 작품 발표와 토론을 하고, 연례행사로 문학기행을 다니고, 그리고 애송이 작가가 이 문단의 대가와 나란히 작품이 실린 수필동인지를 엮었다. 그러는 사이 K선생님께서 심사를 맡으신 어느 문학지를 통해 신인상을 받는 가외의 행운도 누렸다. 그건 나의 수필 인생에 특별한 인연이었고, 이 일로 해서 평소에 품었던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염은 더 한층 깊어졌다.
그러면서 이십여 년의 세월이 한 줄기 바람처럼 흘러갔다. 선생님은 원로가 되셨고, 나는 문인의 방명록에 수필가란 꼬리표를 달았다. 이 세월 동안 사백여 편에 달하는, 결코 적달 수 없는 작품들을 부지런히 써내었다. 그 가운데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게 여겨지는 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푼어치도 마음에 차지 않는 쭉정이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해 쓰려고 나름대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내 나이 이제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넘어섰다. 이 날 이때까지 한결같이 품어 온 하나의 절실하고도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혼을 쏟아 쓴 작품 한 편이 학생들의 국어책에 실리는 일이다. 훗날 어떻게 이 소망이 이루어져서, 내가 「거룩한 본능」에서 받았던 그 아아한 정신적 감동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수만 있다면 여기서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다시 또 바통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넘겨줄 것이고, 이리하여 길이길이 역사의 끈은 이어지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도록 나는 내 생애 끝나는 순간까지 글쓰기에 신명을 바칠 각오이다.
설사 이 소망이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꿈이 있다는 것은 애초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아름다운 법이며, 또한 꿈꾸는 삶은 그 자체로서 생활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더없이 값진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아니하고는 어떤 큰 존재자의 뜻에 맡겨 두려 한다. 흔해서 외려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여섯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부지런히 쓰고 다듬는 일에다 바치는 생애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싶다.
학창 시절의 국어책은 내게 수필로 다리 놓아 준 창작인생의 오작교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예비 되어 있었던 인연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이 인연을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늘 수필 쓰는 일을 생활의 활력소로 삼고서 부지런히 삶의 밭을 가꾸어 갈 작정이다.
<'호미예술' 제 20집(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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