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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이 설 때마다 어김없이 꼭 같은자리에 돗자리 펼쳐놓으시고
늘 같은 자루에 채소류를 담아 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오늘은 장소를 빼앗겼는지, 몇 자리 건너 바람이 제법 몰아치는
구석진 곳에 누렇게 익은 콩가지 들을 입 벌린 자루 안에서 꺼내어
깍지를 까면서 작은 소쿠리에 담고 계셨다
작은 사기그릇 한 대접에 천 원이라며 오가는 손님들을 부르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가위질장단으로 엿판에 춤판까지 곁들인,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엿장수가 얼룩한 가면의 모습을 하고
소리 장단까지 곁들인 소리에, 할머니의 소리는 자꾸만 묻혀버린다.
할머니의 콩 자루를 어림짐작으로 살펴보니 콩자루 모두 꺼내놔도
만원도 안될 것 같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툭툭 갈라진 할머니의 손은
차라리 거북 등 같고 구리 빛 피부의 주름은 밭이랑 같아서 그 주름 속에
씨앗이라도 심겨지면 피부 속에 뿌리라도 내릴 듯 어찌 저리도 주름이
계곡처럼 패였을까 생각하며 할머니를 바라보는데 시린 바람이 몰아치듯
가슴이 아려온다
저 할머니의 주름만큼 숱한 사연이 시간을 함께 하였으리라 아이적,
소녀적, 처녀시절, 새색시, 그리고 어머니의 길 뒤로하고 저리 늙으셨을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깊은 주름이다
아침 6시30분 경부터 오후 6시정도면 파해버리는 5일장,
할머니의 앉아 계신 모습이 대지에 착 달라붙어 피어나는
민들레꽃, 아니 앉은뱅이 그보다 작은 곰취 꽃 같다.
땅바닥에 착 달라붙듯 앉아 한 알 두 알 콩알마다에 세월을 담아내시듯
콩을 털어 내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땅이 조심스럽게 받쳐 주는 듯 하다
장터를 몰아치는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할머니의 머릿결에
하얀 갈대꽃이 보여지고 억새풀이 보여 진다. 저할머니의 삶이란
5일 장날이면 삭아지다 다시 피어나는 가물거리는 불꽃이 생각나고,
고목의 등걸을 헤집고 나오는 연록색의 새순이 생각나는데,
할머니 자신도 생활의 활력을 느끼시듯 5일마다 한번도 거르지않고
등 굽은 허리에 한 자루 머리에 얹으시고 종종걸음을 하시는 것이리라.
저 거북등 손에서 생명이 흘렀으며 굽은등 속으로 인내와 사랑이 깊게
숨겨있을 것 같다. 몇 사람인가 할머니앞에서 사기그릇에 담겨진 콩을
바라보며 살 듯하다가 그냥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속으로 마술을 걸 듯 ‘사라! 사라! 제발 콩을 사라!’ 하고
중얼거리지만 소용이 없다.
‘할머니! 콩은 좀 파셨나요?’
‘어디 오늘은 여태 한 사발도 팔지 못 했어.’
‘할머니! 연세는 얼마나 되셨어요?’
‘왜? 나는 한 스무 두어 살 먹었지. 그래 스무…….두어 살 먹었지.
아낙은 얼마나 먹었나?’
‘저요? 저도 많이 먹었어요. 쉰 두어 살 돼요.’
‘한창이네, 나이 먹지 말아. 절대로 먹지 말아.’
정말이다. 배고파도 먹고 싶지않은 것이 나이인데
어느새 하얀 새치머리 한 올 두 올 늘어나고 있으니
저절로 내 삶에 다가서는 것. 세월의 나이는 피할 수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집에 계세요?’
‘응 우리집 영감 늘 나보다 오래 살 거라고, 영감 품에서
나 먼저 보내준다고 입버릇처럼 노래하더니 내 머리 검을 적에
오래 전에 저 혼자 가버렸어 야속한 영감이지~~’
할머니의 손놀림이 잠시 멈추는가 하더니 다시 콩깍지를 열어,
팔려나가지 못한 콩 광주리에 한 알 한 알 정성껏 받아놓으시고,
빈콩깍지들을 다른 자루에 한가지도 흘리지 않고 담아놓으신다.
‘할머니! 그 빈 콩깍지 제가 버리고 올게요!’
‘아이구! 안돼. 절대로 안돼. 내가 가져가야 돼!’
‘왜요?’
‘우리 집에 월매가 있는데 이 콩깍지를 얼마나 좋아한다고~~’
‘예? 월매요? 손자인가요? 이 콩깍지로 뭐 하나요?’
어떤 놀이감을 만드나 싶어 물었다.
할머니의 쪼그라진 얼굴에 환한 웃음이 여름날 함박꽃 피듯
시원스레 번져간다. 입 벌려 웃으시는데 웃니 서너 개, 아랫니
대여섯 남겨두고 다른 부분은 모두 빠져있다.
‘월매는 효녀지 우리 집 대들보야.
월매가 십 수년 동안 우리 큰자식, 작은 자식 모두 공부 시켜 주었는데
이제 끝 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얼마 있으면 또 새끼를 보게 되는데
그 월매가 이 콩깍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할머니가 시집와 첫아이를 출산한 후 마을에서 주부 솜씨대회가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기에 아이의 옷을 지었는데 1등을 하여 송아지를 상으로 받았는데
소감을 말하라며 마이크를 주었을 때 부끄러워서
‘워매! 제가 1등예요? 워매! 제가 정말 1등예요?’
소감은 한마디도 못하고 ‘워매! 워매!’ 감탄만 하였다.
그러자 사회자가 송아지고삐를 건네면서 ‘자! 월매를 드립니다.’하여,
웃음바다가 되었노라고 그래서 송아지의 이름이 월매가 되었노라고
설명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이미 지나갔지만
행복함의 시간이 연기처럼 피어오름을 볼 수 있었다.
월매는 할머니의 배려와 사랑으로 건강하게 성장하여
살림에 한몫을 했다고 한다.
몇 번인가 새끼를 출산하여 빈곤한 농촌생활에 희망을 주었던 월매는
소가 아니라 할머니의 한 식구로 자리매김했고 이제는 월매의
숨소리만 들어도, 눈빛만 봐도 동작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노라 했다.
향단이도 없는 5일 장날.
결혼 후 십 수년을 할머니와 함께 사랑을 주고받으며
할머니의 삶에 함께 하였던 월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보니 온통 붉은빛 커튼이 내려지듯 석양이 번지고 있다
결국 한 사발도 팔지 못한 할머니의 서운한 마음을
저 노을도 알았는지 할머니의 쟁기가락 같은 손등 ,위에
황금빛을 가득 뿌려주고 있었다....
- (105회 월간문학 당선작) -
[작가 프로필]
본명 : 박경희
출 생 : 1954년생 서울 상도동 출생
월간문학 제105회 수필 ‘할매와 월매’로 신인상당선
제11회 과천시 주체 율목문학상
단편소설 ‘중년의 외출’장려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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