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신춘문예 시대는 열렸는데
신 재 기
1. 수필 신춘문예의 확산
신춘문예는 한국 근대문학이 고안해낸 문학 제도 중 가장 특징적이고,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작품을 순수하게 혼자 창작하는 것만으로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 누구나 작가가 되어 문단 사회에서 문인의 자격으로 활동하고 싶어 한다. 사회로부터 작가로 인정받을 때 자신의 창작 행위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라는 사회 제도는 이러한 욕망을 부추기고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개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신 그들만의 위계질서 안에 가둬버린다. 신춘문예의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대부분은 그 권위 앞에 무력해지는 것을 본다. 통과한 사람은 은근히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겉으로는 아닌 체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선망하는 것이 신춘문예다. 문학의 제도권 안에 이미 들어간 사람이든 그곳으로의 진입을 욕망하는 사람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신춘문예는 우아하고 화려한 대상이다. 이것 때문에 심한 병을 앓는 사람도 있다.
1925년 『동아일보』에 의해 시작하여 그간 한국 문인의 1/3을 배출했던 신춘문예는 신인 등용문이 다양해지고 넓어진 현재까지도 그 매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신춘문예와 관련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 주목할 만한 대목이 수필 장르의 부각이다. 수필부문 신춘문예는 1970년대에 일부 중앙 일간지가 잠시 시행했으나 금방 막을 내렸는데, 최근에 들어와 크게 확대되었다. 현재 7개 신문사가 수필 신춘문예 제도를 시행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인터넷 신문을 비롯한 특수신문이나 유사한 공모제까지 합하면 그 수가 10군데가 넘는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와 수필 신춘문예가 확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수필 인구의 양적 확대를 꼽을 수 있다. 수필 생산자만 늘어나고 소비자는 축소되고 있다는 주장과는 무관하게 수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어떤 통로로 등단했든 간에 ‘수필가’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시인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공급은 수요에 비례한다는 경제의 기본 원리에 따르면, 수필가의 증가는 결국 수필의 수요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대 여건의 성숙에 의해 특정 문화 양식이 크게 번창할 때에 거기에는 언제나 대중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지금 수필이 확대되고 있는 까닭도 대중 가까이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문학의 죽음’이 운운 되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 수필이다. 대중성과 상업성에 기반을 둔 저널리즘이 문화의 한 양식으로 수필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수필이 그동안 홀대받았는데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도, 앞으로 문학의 유망주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현대 문화의 핵심 장르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저널리즘이 수필에 보이는 관심은 현대 대중문화의 큰 흐름을 따라잡는 하나의 이벤트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수필이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사이버공간의 출현이다. 인터넷의 탄생과 보급으로 현실 세계와 다른 또 하나의 공간으로 가상공간이 생겼다. 대중들의 일상은 이제 현실 공간뿐만 아니라 가상공간에서도 이뤄진다. 가상공간에 머무는 시간과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 그것은 취미에 따른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사이버공간에 머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글쓰기는 정보전달이나 정보수용과 같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공간을 오가며 통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글을 쓰고 읽으면서 상호소통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이버공간의 존재 방식이다. 글쓰기는 사이버 상에 머물려면 요구되는 수단 이상이다. 사이버공간에서 나의 존재와 정체성은 글을 씀으로 확립된다. 그런데 이때의 글쓰기는 특정 틀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글쓰기의 권력이 소수의 특정 작가에게 한정되었던 시대와는 달리 사이버공간에서 글쓰기는 대중이 참여가 쉬워져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확산하고 있다. 그리고 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와 가벼운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콘텐츠를 이루는데, 이는 성격상 수필과 매우 근접한 글쓰기다. 사이버 공간이 최적의 서식지가 됨으로써 수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들면서 대중을 흡인한다.
한편, 이러한 수필의 대중성 확보가 저널리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수필 신춘문예 제도를 부흥시켰다. 과거 잠시 있기는 했으나 없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던 이 제도는 문화적 변화와 함께 재탄생하여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현재 수필 신춘문예를 실시하고 있는 신문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중앙 일간지는 하나도 없고 전부 지방 일간지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전북 지역에 <전북일보>를 포함하여 3곳, 부산 지역에 <부산일보>를 포함하여 3곳, 대구에 <매일신문>이 그것이다. 시행한 기간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지방 신문의 수필 신춘문예는 그 지역의 수필 애호가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수필문학의 발전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어떤 입장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앙 일간지의 외면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나 소설 중심의 순문학주의를 내세워 권위와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뜻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 일간지가 디카에세이, 스토리, 블로그, 댓글을 응모 장르로 하는 사이버 신문문예를 실시했던 것처럼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2. 수필 전통주의 폐해
올해 수필 신춘문예 당선작은 모두 수작이다. 작년과의 단순 비교는 불가능할 뿐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튼 수백 편 중에 뽑아서 그런지 모두 수준이 높았다. 많은 습작과 훈련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별 당선작에 대한 분석과 평가보다는 전체적인 작품 경향 분석해 본다.
첫째, 화제로서 전통과 민속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수필은 이야깃거리, 즉 화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다. 수필에서는 화제와 주제가 밀착되어 있다. 시나 소설에서 제재는 주제를 간접적으로 암시할 때가 많다. 제재 속에 주제가 함축적으로 녹아 있다는 말이다. 반면 수필의 화제는 곧바로 주제로 연결되는 때가 대다수다. 화자가 말하는 주된 내용이 화제인데, 그 화제가 곧 주제가 되는 수가 있다는 말은 화자가 주제를 직접적으로 진술한다는 뜻이다. 수필을 ‘교술 문학’이라고 하는 것도 주제의 구현이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화제의 비중이 이렇게 큰 만큼 화제 선정은 중요하다. 심지어 글감을 발견하는 것이 수필 창작의 전부인 양 오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물론 특이하고 낯설어 독자의 눈길을 끄는 소제나 화제가 꼭 좋은 주제, 좋은 작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당선작 일곱 편 중에서 화제의 발판이 되는 핵심 소재를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나 민속과 관련된 것에서 찾은 작품이 눈에 띈다. 옛날 농촌의 짚으로 만든 그릇인 일명 ‘둥구미’라고 하는 ‘멱둥구미’(경남일보), 누에를 치는 데 필수 도구인 ‘잠박’(전북도민일보), 소리막골에서 우리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매일신문), 구체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상징물로 사용된 ‘항아리’(전북일보) 등이 그것이다. 당선작 중 반 이상이 비슷한 성격의 소재를 택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심사위원의 평균적인 취향을 예상하고 이런 작품을 투고한 사람이 많다든가, 심사위원이 취향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바람직한 현상이 못 된다. 소재의 편중은 소위 ‘신춘문예용’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고유한 정감이 어린 글감에서 구현되는 전통적인 정서나 정신은 수필이 지향해야 할 좋은 주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우리 것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경직된 사고의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우리 고유의 것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교조적인 성향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소리막골에는 역사 속에 사라져간 왕의 옛 길처럼,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가락의 명맥을 잇고, 그 원형을 보존하려 혼신을 기울이는 우직한 소리꾼이 살고 있다. 그는 서민의 아픔 속에 숨겨진 희망과 기쁨의 외침을 알고 있는 듯 잇는 듯, 민족의 애환과 혼이 담긴 소리를 질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소리막골>(『매일신문』)에서
소리꾼의 우직한 삶과 그의 소리를 “서민의 희망과 기쁨의 외침”, “민족의 애환과 혼”으로 연결했는데, 이는 작가의 구체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었다기보다는 머릿속의 관념에 의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재와 주제의 거리가 멀고 낯설 때 주는 충격이 문학의 본령이다. 이는 대상의 숨은 의미를 찾는 일이며, 고정된 관념과 상식을 해체하고 새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작업이다. 문학이 예술이라면 궁극적으로 심미성은 기본 요소다. 이러한 심미성은 기존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배반에서 생성된다고 하겠다.
둘째, 주제 구현에서 상투적인 비유의 사용이 잦았다.
문학 작품은 정서와 사상의 표현이다. 결국 주제를 심미성의 원리에 따라 훌륭하게 형상화하는 것이 문학이 지향하는 바이고 창작의 궁극적인 목표다. 한 편의 수필이 도달해야 지점은 바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냐는 물음에 해당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주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주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주제 형상화의 방법이 그것이다. 구성, 기법, 문장 수사와 같은 방법은 심미성의 바탕이 된다. 좋은 작품은 주제 형상의 방법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당선작의 주제 형상화 방법의 두드러지는 점은 핵심 소재와 주제 사이의 비유 구조다. 소재가 보조 관념이고 주제가 원관념이다. 그리고 중심 소재는 거의 그대로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문학 작품에서 전체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주제를 구현하려면 상호 통합해야 한다. 각 요소는 기능상 하나의 주제를 위해 봉사한다. 만약 전체 통합으로서가 아니라 일부분이 전체 주제를 말하는 방법은 미학적인 측면에서 비정상이다. 보조관념인 소재가 주제를 곧바로 들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주제 형상화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일부 소재가 주제를 암시할 수 있으나 그 일부가 주제를 다 말하게 된다면 다른 것은 군더더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핵심 소재인 먹둥구미(경남일보)는 “수더분하고 속됨 없이 무심한 자연처럼 텅 빈 듯 충만한” 할머니를, 잠박(전북도민일보)은 어머니를, 소리막골의 소리꾼(매일신문)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애환의 정서를, 바람(부산일보)은 굴레를 일탈하여 자유를 향하는 욕망을, 항아리(전북일보)는 이야기를 담는 문학 창작 행위를 각각 비유했다. 비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의한 결합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유사성에 의해 연결되는 데, 그 유사성이 이미 노출되었거나 쉽게 드러나면 비유에 의한 의미의 긴장은 반감되고 만다. 그런데 작품 <항아리>는 예외로 비유의 활력이 엿보인다. ‘항아리’는 웅덩이, 마음 주머니로서 가슴속, 글쓰기가 이뤄지는 컴퓨터로 확대 연결된다. 둥글고 속이 비어 있어 뭔가를 채울 여우가 있다는 점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서로를 연결하는 접착력이 약하다. 접착력이 약하기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이 요구되고 독자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 비유가 굳어져 상식화된 것이라면 깊은 감동을 주기 어렵다.
쉼 없는 노동력으로 쉴 새 없이 실을 뽑으며 야위어가는 누에는 다름 아닌 어머니 모습이었다. 평생 근면과 검약으로 고향의 전답을 일구신 어머니는 당신의 전부였던 땅에 얼마 전 자식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잠박>에서
누에가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듯이 어머니도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온몸으로 일한다. 누에와 어머니의 몸이 야위어 가는 것은 각각 고치와 자식을 위한 희생이란 점에서 유사하다. 이 유사성에 기초하여 양자를 비유 관계로 배치했다. 결과 누에와 어머니의 연결은 양자의 인접성이 뚜렷하여 무리 없이 수용된다. 그러나 기발한 착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미 앞선 텍스트에 빈번하게 나타났던 비유의 일종으로 모험에서 오는 긴장감은 떨어진다. 상투적이라는 혐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상투적 비유는 우리의 축적된 경험에 근거한다. 이런 상투성은 수필 쓰기에서 흔히 목격되는 측면이다. 소재로 채택된 사물과 현상의 어떤 속성에 기대에 주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기본 골격은 비유다. 그 비유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별로 인지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 더욱이 중심 소재가 제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제목만 보아도 주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제목이 작품 주제를 암시하여 독자의 글 읽기에 길을 제공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면 길을 찾으려는 독자의 호기심을 반감시킨다. 문학적 장치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주제가 누출되는 것은 작품 구성의 허술함을 말해준다. 서사를 포함하지 않는 수필에서는 극적인 구성의 필요성이 크지 않는 만큼 화제 자체나 비유적 진술을 통해 주제가 쉽게 노출된다. 여기에다가 교훈성으로 쏠리게 되면 독자는 외면하고 말 것이다.
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들어 난다는 것은 주제의 선명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주제 구현의 방법이란 측면에서는 문학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주제는 작가에 의해 정리된 채 제시되기보다는 암시되어 독자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참여와 함께 상호소통이 이뤄지는 광장이 본래 문학이 지향하는 바다.
셋째, 문장 표현에서 상투적인 비유 사용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수필 창작의 큰 축은 문장 표현이다. 문장 표현의 장르라고 할 만큼 수필에서 문장의 비중이 크다. 시와 소설에서도 문체는 중요하다. 그런데 시가 언어의 함축성을 지향하고 소설이 극적인 구성을 위한 시점이나 화법 선택에 무게를 둔다면, 수필은 낱낱의 문장 표현에 몰두한다. 그 작품의 개성은 문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 표현에 따른 문체의 특징은 수필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문체가 건조한 작품은 그것대로, 화려한 경우는 화려한 대로 고유한 의의를 가진다.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내거나 그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효율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 좋은 문체이기 때문이다. 간결체는 좋고 만연체는 안 된다는 식의 일반적인 기준 적용은 합당하지 못하다.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으면서 수필 창작의 해묵은 관습의 폐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수필에서 언어표현, 즉 문장이 중요하다는 점은 두루 인식하고 있는 듯하나 그것의 구체적 실천 방법에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당선작은 하나같이 적확하고 세련된 어휘를 선택했고 수려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였다. 사실 심사 과정에서 문장의 결합은 결격의 첫째 사유이고 문장의 빼어남은 당선의 마지막 기준이 된다. 문장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신춘문예에 발을 붙일 수 없다는 점은 상식이 되었다. 수필 쓰기에서 문장의 중요성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좋은 문장은 화려한 장식이나 기발한 비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일반 수필가의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당선작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점은 비유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① 길 위에 구르던 낙엽보다 더 푸석하고 늙어 보이는 순자의 어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선생님께 그렇게 한마디하고 타닥타닥 튀면서 타는 불더미를 작대기로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만 했지 울지는 않았다.
② 훌훌 털어버리기엔 내 가슴속에 옹이처럼 깊고 여문 흉터로 남아있어서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기억 속 수많은 길 어느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언제나 아버지와 소통을 방해하던 그때의 일을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 까집어 보임으로써 아버지와의 완전한 화해를 모색하고 싶은 심정에서이다. -<소멸을 꿈꾸며>(전북중앙일보)에서
잦은 비유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생동감을 주는 비유도 있으나 대부분 상투적이다. ‘구르던 낙엽보다 더 푸석한’, ‘옹이처럼 깊고 여문 흉터’, ‘기억 속의 길모퉁이’,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이 바로 그런 것이다. 비유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이 분명하여 둘의 연결에 망설임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수사적 효과는 감소한다. 소위 죽은 비유다. 다른 둘이 힘들게 결합할 때 여러 겹의 의미전이가 일어난다. 이때 의미는 그 외연도 넓어지면서 생동감을 얻는다.
은유와 직유로 대표되는 비유는 주어진 삶의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개혁 의지의 소산이다. 현실의 억압과 무의미, 관습과 전통에 의한 강요된 틀을 뛰어넘고자 한다.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재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유가 비롯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이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재 조건의 인간적인 의미를 제외하는 행위이다. 원관념에 만족하지 못하는 비유는 자연스럽게 현실을 오도하거나 뒤틀린 기형으로 추상화시키기 일쑤다. 비유는 유사성에 의해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를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상이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비유를 통한 세계의 인식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비유를 만드는 주체의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일 수 있다. 수필을 자기 고백의 문학이다. 내 밖에 것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때가 더 많다. 이러한 성향에 비유가 더해지면 작가의 나른한 나르시시즘을 낳는다. 나르시스적 공간에 갇히게 되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게 되어 현실에 대한 시각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수필은 더욱더 깊은 내면으로 잠수하고 말 것이다. 내 안에만 안주하지 않고 내 밖의 세계도 바라볼 수 있는 타자적 주체의 확립이야말로 좋은 수필을 생산하는 터전이다.
3. 실험 정신을 위해
문학도 하나의 제도 속에 놓인다. 제도는 사회문화의 소산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이다. 모든 제도는 그 속에 소속된 행위자에게 행위의 터전과 존재 근거를 마련해 준다. 반면에 제도 밖으로의 이탈을 규제하는 구속력도 가진다. 제도는 요구나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만, 대체로 제도권 내의 기득권자들은 그대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게 보인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정신적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학은 제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학 자율성을 강조하는 견해에서는 문학의 제도적 측면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 사회문화적인 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 문학도 크게는 사회적인 제도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문학이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에서 적잖게 사회 제도적인 질서에 의해 영향과 통제를 받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문학의 제도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신춘문예다. 수필 신춘문예도 문학 제도로서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제도가 불합리하거나 문제를 지니고 있다면 개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제도는 보수성을 지향한다. 개선되기까지는 많은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수필 신춘문예서 개선되어야 할 부분 중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응모자의 실험 정신 부재다. 이것은 응모자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그 원인이 심사위원의 심사 기준에 기인하고 한다. 심사위원이 실험적 측면을 배제하기 때문에 응모자는 그런 기준에 맞추려 하기 마련이다.
신춘문예에 응모자들은 문학 지망생으로서 문학 창작의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이다. 우선 문학의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체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순서다. 그래서 수필의 기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을 쓰고 그런 작품은 선정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제도에 순응하는 신인보다는 반역의 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미래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신춘문예와 같은 등용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신인은 습작 과정에서 모범 답안 작성을 위한 해답을 찾는 데 집중한다. 우선 높은 점수를 받고 보자는 심산이다.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기 위한 자기 갱신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이 실험 정신의 부재로 이어지고 매년 비슷비슷한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심사위원의 책임도 크다. 아마 지금의 수필 신춘문예의 심사 기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작품의 완성도’일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란 어떤 것인가? 정확한 문장, 탄탄한 주제, 참신한 화제 등을 두루 갖추었을 때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든지 하자 때문에 비판받지 않을 무난한 작품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준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심사를 맡은 사람들의 보수적인 수필관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논란과 시비도 피할 수 있고, 외견상 그럴듯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무난한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속이 편하다. 대부분의 심사위원은 실험 정신을 발휘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그대로 적용하고자 한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 낯선 경향과 방법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처할 탄탄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을 때 가능한 방법은 수필의 전통적인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길이다. 수필의 전통적인 규약에 익숙한 보수 성향의 심사위원들이 교체되지 않는 한 제도의 개선은 어렵다. 주최 측인 신문사도 기존 문단의 명성과 권력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노선을 설정하고 최적의 심사위원을 선정해야 한다. 주최 측, 심사위원, 응모자 모두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올해 작품과 비슷한 작품이 내년에도 당선작으로 뽑힐 것이고, 당선을 희망하는 수많은 지망생이 앞으로도 계속 모범 답안 연습에 몰두할 것이다.
<2008년 신춘 분석, 문학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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