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별 꽃
문주생
입춘이 바로 엊그제, 아직 추위가 물러가지 않았을 텐데 동네 화단의 풀꽃 들이 나를 반긴다. 지난겨울이 따뜻했던 탓인지 돌나물이며 붓꽃이며 국화 뿌리에서 새싹을 내밀고 있으나 한쪽에 있는 풀꽃들은 벌써 무리를 지어 뽐내고 있어 신비롭기만 하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쇠별꽃-고향에서 부르던 곰밥 나물이다. 세월의 저편, 평화로운 들녘으로 데려다 주는 추억의 풀꽃이 아닌가. 처음엔 꽃들이 너무 작아서 찹쌀 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보였으나 이제는 웬만큼 정이 들었다.
어린 시절, 보리가 한 뼘이나 자랄 무렵이면 봄이 오는 신호였다. 친구들과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자기를 던져두고 바구니와 칼을 챙겨들었다. 밭으로 나물을 캐러 가는 것이다. 아직은 싸늘한 바람 속이지만 밭이랑에 엎드려 곰밥 나물, 나숭개(냉이)도 캐고, 가새 나물이며 코딱지 나물, 광대나물도 캐었다.
자신이 앉은 자리에 나물이 많으면 무슨 보화라도 발견한 듯 소리를 지른다. 그 기쁨은 욕심이 되어 옆에서 캐는 친구를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항시 누가 더 많은 양을 캐었는지 비교를 했기 때문이다.
우린 보리밭에 다다르면 바구니에 보리 싹도 캐어 담는다. 무작정 캐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 말씀을 생각해서 포기가 무성한 곳에서 솎아내곤 하였다. 남의 밭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물을 조금 캐었다고 해서 보리 싹을 많이 섞어올 수도 없는 일, 어머니들의 꾸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이 보지 않는 밭이라 해도 많이 캐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양심을 가르쳐준 것이며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부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들은 나물 캐는 것이 지루해지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높은 밭둑 밑이나 언덕 밑에 쪼그려 앉아서 햇볕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머슴애들의 흉을 보다가 휴식 시간이 끝나면 다시 제 자리를 찾아서 나물 캐기에 열중하였다.
초봄엔 나물을 두어 줌 캐오지만, 날이 갈수록 바구니에 많이 채워서 돌아오곤 하였다. 나물 캐는 재미가 대단해서 이른 시각에 돌아오라는 당부도 잊은 채, 우리들은 해질녘에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먼 동네의 들녘까지 다녀오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이고서 돌아왔다. 동네 언니들은 따로 치마폭에다 나물을 싸안고 왔는데 그들이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나물 캐는 날 저녁엔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집안에 퍼졌다. 어린 손으로 국거리를 준비한 것이 대견스러운 듯 밥상에선 어른들의 칭찬이 나오곤 하였다.
나물이 쇨 즈음이면 나물 캐는 것을 그만 두고 쑥을 캐러 다녔다. 논둑이나 밭둑, 야산 밑을 헤매이다 보면 어느새 봄이 다 가고 있었다. 우리는 나물바구니를 던져두고 다음 해 봄을 기다려야 했다.
쇠별꽃을 바라보면 삼십 년 전의 봉남, 귀례, 인님, 순례, 기자, 정자...이런 친구들이 궁금해진다. 앨범 속의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는 시골 가시내들이다. 그 때 우리들은 나물을 캐고, 삐비를 뽑고, 우렁과 새우를 잡으러 다니며 이삭을 주우면서 마냥 그 곳에서 살기만 바랬다. 배고픔도 있었고 걱정도 없지 않았을 테지만 모두 아름다운 시절로 여겨진다.
얼마 전 나와 같은 고향에서 자란 남편에게 향우회지가 배달되었다. 주소록을 보니 내 친구들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이웃에 살던 코흘리개 머슴애의 이름이 보였다. 계집애들 대신 머슴애라도 붙잡고 지난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보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 얽힌 추억은 늘 가슴에 살아 있으나 언젠가는 앨범 속의 낡은 사진처럼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에라도 한번 찾아보고 싶다.
오늘 저녁에는 향긋한 나물국이라도 식탁에 올려놓으며 중년이 되었을 벗들을 떠올려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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