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 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 보라. 한 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운이 좋으면 지금도 동해나 서해 어디쯤에서 길들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물과 흙, 소금으로 반죽된 거무죽죽한 개펄 어디, 눈부신 모래밭 한가운데서 길 한 마리가 날렵하게 튕겨 올라 가늘고 긴 꼬리로 그대를 후려치고는 송림 사이로 홀연히 사라질지 모른다. 갯벌이나 백사장에서 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의심할 일도 아니다. 첨단의 진화생물체인 길이 생명체의 주요 생존전략인 위장술을 차용하지 않을 리 없다. 흔적 없이 해안을 빠져나가 언덕을 오르고 개울을 건너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갔을지 모른다.
식물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4억 5천만 년 전, 초창기 식물의 역사는 물로부터의 피나는 독립투쟁이었다. 모험심 강한 일군의 식물이 뭍으로 기어오르는 데에만 1억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끼와 양치류 같은 초기 이민자들이 출현한 후 3억년이 지날 때까지 지구는 초록 카펫 하나로 버티었다. 꽃과 곤충, 날짐승과 길짐승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보다 훨씬 뒤인 사, 오만 년 전쯤, 드디어 인간이 출현했다. 길이 바다로부터 나온 것은 그 뒤의 일, 그러니까 진화의 꼭짓점에 군림하는 현생인류가 번식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길이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고차원의 생물군일 거라는 주장에 반박이 어려운 이유다. 유순하고 조용한 이 덩굴 동물은 인간의 발꿈치 밑에 숨어 기척 없이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생물이라는 말이 거슬리는가? 그럴 수 있다. 생물이 뭔가. 에너지 대사와 번식능력이 있는, 생명현상을 가진 유기체를 일컫는다. 산허리를 감아 봉우리를 삼키고, 집과 사람을 무더기로 뱉어내는 길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파충류다. 지표에 엎디어 배밀이를 하고 들판을 가르고 산을 넘는 길은 대가리를 쪼개고 꼬리를 가르며 복제와 변이, 생식과 소멸 같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낱낱이 답습한다.
낭창거리는 아라리가락처럼 길은 내륙으로, 내륙으로 달린다. 바람을 데리고 재를 넘고, 달빛과 더불어 물을 건넌다. 사람이 없어도 빈들을 씽씽 잘 건너는 길도 가끔 가끔 외로움을 탄다. 옆구리에 산을 끼고 발치 아래 강을 끼고 도란도란 속살거리다 속정이 들어버린 물을 꿰차고 대처까지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경사진 곳에서는 여울물처럼 쏴아, 소리를 지르듯 내달리다가 평지에서는 느긋이 숨을 고르는 여유도, 바위를 만나면 피해가고 마을을 만나면 돌아가는 지혜도 물에게서 배운 것이다. 물이란 첫사랑처럼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나란히 누울 때는 다소곳해도 저를 버리고 도망치려하면 일쑤 앙탈을 부리곤 한다. 평시에는 나붓이 엎디어 기던 길이 뱃구레 밑에 숨겨둔 다리를 치켜세우고 넉장거리로 퍼질러 누운 물을 과단성 있게 뛰어 넘는 때도 이 때다. 그런 때의 길은 전설의 괴물 모켈레므벰베나, 목이 긴 초식공룡 마멘키사우르스를 연상시킨다. 안개와 먹장구름, 풍우의 신을 불러와 길을 짓뭉개고 집어삼키거나, 토막 내어 숨통을 끊어놓기도 하는 물의 처절한 복수극도 저를 버리고 가신님에 대한 사무친 원한 때문이리라. 좋을 때는 좋아도 틀어지면 아니 만남과 못한 인연이 어디 길과 물 뿐인가.
길들의 궁극적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연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사람의 몸에 혈 자리가 있듯 땅에도 경혈과 기혈이 있어 방방곡곡 요소요소에 모이고 흩어지는 거점이 있다는 말도 있고, 중원 어디쯤에 결집 장소가 있어 길이란 길이 모두 그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사통팔달의 중심축에 마을이나 도시가 생겨나기도 하는데,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입성한 길들을 위해 예의 바른 인간들은 건장한 나무를 도열시키고 기다란 덧옷을 입혀주며 환대하기도 한다고 한다.
꿈과 욕망을 뒤섞고 본질과 수단을 왜곡시키는 도시. 도시에 오면 야성은 말살되고 감성은 거세된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생기를 탈취하여 휘황한 빛을 풍겨내는 도시의 마성에 길들 또한 수난을 면치 못한다. 타고난 유연성을 잃고 각지고 억세어져 가로세로로 뒤얽히거나, 기괴하게 뒤틀린 채 비룡처럼 날아오르고 두더지처럼 땅속을 파고들기도 한다. 대도시 인근에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길들이 혈전에 막히고 동맥경화에 걸려 온갖 종류의 딱정벌레들에게 밤낮없이 뜯어 먹히는 광경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타락한 길들이 도시와 내통하면 똬리를 틀고 주저앉아 분수없이 새끼를 싸지르기도 하는데, 젊고 모험심 있는 것들은 원심력을 이용해 도시를 빠져나가지만 병들고 고비늙은 것들은 옴쭉 달싹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려 변두리 어디쯤을 비실거리다 고단한 일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무엇 때문에 길들은 이 도시에 와서 죽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오게끔 유인하고 또 추동하는 것일까. 꿈의 형해처럼 널브러져있는 도시의 길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머릿속 길들마저 난마로 엉켜든다. 탄식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길. 섬세한 잎맥 같고 고운 가르마 같던 옛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홀려 엉겁결에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그들 또한 알 수 없었으리라. 결승점에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길도 강도, 삶도 사랑도, 한갓 시간의 궤적일 뿐임을.
불뱀 한 마리 검은 강을 건너 구부러진 등뼈로 강변을 휘돈다. 일렁이는 빛의 꽃가루 사이로 기신기신 고개를 오르는 꽃뱀. 길이 헐떡인다. 퇴화된 근육이, 실핏줄이 쿨럭인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위태롭게 깜박인다. 너무 빨리 내달리는 대신 꽃도 보고 별도 볼 걸, 오르막과 내리막을 더 천천히 즐길 걸, 키 작은 풀과 집 없는 달팽이에게 조금 더 친절을 베풀어 줄 걸,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까.
달동네 가풀막에 길 한 마리 엎드려 운다. 승천하는 길을 위한 조등 하나, 하늘가 별자리로 나지막이 걸린다.
사이에 대하여
인간이라는 말.
인간은 그러니까 인+간이다. 사람 인(人) 자체도 사람과 사람이 기대고 받쳐주는 모양새지만 그 또한 완전히 공평하진 않다. 하나는 괴고 하나는 일어선다. 누군가 밑에서 떠받치지 않으면 비스듬하게라도 서 있을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가 인간이란 말이다. 거기에 또, 사이 간(間)이 하나 더 붙어야 비로소 사람을 의미하는 독립적인 단어로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와 소통 같은 상호작용을 통해 스미고 물들이며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다. 사람이 인(人)이 아니고 인간(人間)인 이유다.
활자를 아무리 정연하게 배치해두어도 사유(思惟)가 일어나는 곳은 행간(行間)이듯이 사건과 사연, 역사와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도 '사이'다. 마음도 마찬가지, 영혼이나 정신이 뇌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것도, 좌심실 우심방에 스며 있는 것도 아니다.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 간에 주고받는 전기적 신호가 촉발하는 생화학적 유기적 반응,' 그것이 마음이고 감정이라는 거다. 하니 개별자의 인격이나 정체성이라는 것도 서로 다른 존재와의 맞물림 속에서, 타자와 타자 사이의 조웅관계 속에서 누적되고 표출되는 현상들의 교집합 같은 것 아닐까.
존재의 세 기본재 뒤에 하나같이 간(間)이 따라붙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그리고 인간(人間)……. 천체물리학자도 철학자도 아니었을 옛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가 거대한 매트릭스임을, 모든 게 다 '사이'의 일임을 헤아리고 통찰할 수 있었을까. 인터넷의 웹도 화엄경의 인드라망도 그러니까 다 '사이'의 일이다. 낱말 하나 꿰맞추는 데에도 눈 너머 눈으로 성찰할 줄 알았던 선인들을 생각하면 기술의 진보와 지혜 사이에 어떤 함수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외롭게 홀로 떠 있는 것 같아도 물밑으로는 가만히 어깨를 겯고 있는 섬들처럼, 모두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목젖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재배(再拜)의 이유
졸업반이 되자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다 위대해 보였다. 이미 견고하게 짜여 버린 틀 안에 내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없어 보였다. 큰 톱니, 작은 톱니, 볼트와 너트로 맞물려 일사불란하게 바퀴를 굴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산달이 가까워지자 아이 난 여자들이 다 위대해 보였다. 어떤 녀석이 나올까. 얼마나 아플까. 손가락 발가락은 다 정상일까…. 기쁨과 설렘보다 불안과 걱정이 앞섰다. 생명을 출산하는 위대한 과업을 손바닥 뒤집듯 몇 번씩 해내고도 호들갑을 떨지도, 공치사를 하지도 않는 평범한 아낙들이 대단해 보였다.
운전면허시험을 앞두고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필기시험은 한 개밖에 안 틀리고도 몸치에 기계치에 겁까지 많아 실기(實技)를 다섯 번이나 실기(失機)하고 말았다. 일생 처음 낙방의 쓴잔을 연거푸 몇 번이나 마시게 된 나는 누가 슬쩍 면허증만 쥐어주면 악마와도 뒷거래를 할 것 같았다.
이렁저렁 한세상을 살아내다 보니 세상의 하찮은 목숨붙이들, 생명 있는 것들이 다 위대해 보인다. 밤새 불던 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고 가만가만 흔들거리던 바람꽃도, 천만 배나 더 큰 인간을 향해 사이렌까지 울리며 도전해 오는 모기도,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제 밥 제 찾아 먹다 가는 거미며 버러지며 붕어새끼 한 마리까지, 세상에 눈물겹고 위대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건 수천의 작은 걸음으로는 건너 뛸 수 없는 큰 한 걸음으로 저 너머까지 단숨에 건너가신 분들이다. 하얀 국화 송이에 에워싸여 지그시 미소 짓고 계신 분들, 어떤 위인도 억만장자도 살아서는 결코 당도할 수 없는 그곳에 세상 부역 마치고 무사히 안착한 그분들이야말로 마땅히 예를 갖추어 옷깃을 여미어도 억울할 것 없는 인생 선배들이다. 살아생전 얼굴 한 번 못 봤어도, 나보다 15년쯤 더 젊어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영정 앞에 내가 절하는 이유다. 힘든 세상 살아내느라 애 많이 쓰셨다고, 부디 짐 벗고 편히 쉬시라고.
신은 고달프겠다
친구 집에 갔다가 플라스틱 함지에 심은 상추 모종을 받아왔다.
무엇이든 손에 들려 보내려고 두리번거리던 친구가 베란다에 놓인 두 개의 함지박 중 하나를 덥석 들고 나온 것이다. 쉼표만한 씨앗을 싹 틔워 이만큼 자라게 하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세수 대야만한 고무함지가 텃밭 한 뙈기보다 더 커 보였다.
“조금 지나면 포기가 벌 테니 실한 놈 몇 포기만 남기고 다 솎아주어야 해.”
서툰 대리모에게 입양 보내는 어린것들이 맘에 걸리는지 문밖까지 따라 나온 친구가 말했다. 천 원어치만 사도 차고 넘칠 상추보다는 생명을 가꾸는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좁은 베란다 한줌 햇살만으로 상추는 우북수북 잘 자랐다. 청치마 홍치마를 나붓이 펼치고 앉은 매무시가 제법 과년한 처녀티를 냈다. 햇살 좋은 날에는 서로 치마폭을 넓게 펼치려 자리다툼을 하는 것도 같았다. 솎아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어느 것을 뽑고 어느 것을 남길까. 명월이 채봉이 향단이 탄금이… 기생점고에 나선 변학도가 되어 눈으로 찬찬히 더듬어보았다. 연두빛과 자주빛 치맛자락이 내 눈에는 하나같이 춘향이로 보였다.
큰이파리 사이에 숨어있는 여린 모종에 손을 대려다, 덩치 큰 친구 곁에 서있던 딸 아이 생각이 났다. 못 큰 것도 억울한데 퇴출을 시키다니. 개체의 특성과 환경의 우열에 따른 다양성이 심판의 준거가 되어야한다는 말인가.
나는 가만히 칼자루를 놓았다. 상추포기 솎는 일도 이토록 어려운데 악인과 선인을 판가름하여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야 하는 신은 얼마나 골치가 아프시려나.
침묵의 소리
딴딴하고 말쏙한, 그러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아보카도 씨에게는 씨앗보다 씨알이 더 잘 어울린다. 기름진 살 속에서 막 발굴된 그것은 멸종된 파충류의 알 화석을 닮았다. 세상을 향해 분출시키고 싶은 강렬한 에너지가 강고한 침묵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씨알이 내게 침묵으로 명한다. 날 심어 줘, 쓰레기통 같은 데에 버리지 말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해줘…….
수박씨나 복숭아씨 같은 것을 버릴 때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애써 무르익힌 과육을 송두리째 헌납하는 푸나무들에게도 통 큰 계산이 있을 법한데 인간들은 모르는 체 제 잇속만 챙긴다. 흙에 묻어 주면 수백 곱절 되돌아올 생산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리면서도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
심지도 버리지도 못한 씨알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하룻밤 지나니 연갈색 표피 위에 가느다란 핏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확대된 안구 사진 같기도 하고 막 부화가 시작된 난황 같기도 하다. 크기 때문일까. 이 씨알은 더 버리기 힘들다. 서양 남자의 민머리처럼 둥글고 단단한 외형에서 불끈거리는 저항성이 느껴져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일에 죄책감마저 느끼게 한다. 흙냄새를 맡으면 금세 갈라져 하루아침에 성큼 하늘을 찌를 동화 속 콩나무 같기도 하다. 씨앗의 의중이, 내부가 궁금하다.
존재는 외로움을 탄다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풀숲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간밤 불면으로 멍해진 머리 속을 차고 맑게 헹구며 지나간다. 밤새 열변을 토하던 벗들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다. 세상과도, 자기 안의 고독과도 화친하지 못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했던 한 작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할 말이 많았다.
숲으로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마른 풀줄기가 잡아당긴다. 아직 이르니 동 틀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괜찮다고, 머지않아 해가 떠오를 거라고, 달래듯 어르듯 헤치며 걷는다. 늦도록 두런대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숲의 정령들에게는 돋쳐 오르는 이른 햇살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골짜기 사이에 가로놓인 나무다리를 건너간다. 나무가 삐거덕, 아픈 소리를 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뼈마디 부딪치는 통증을 지그시 참아내던 어머니처럼, 다들 그렇게 남몰래 조금씩은 삐거덕거리며 사는 모양이다.
잎이 져 버린 숲 한가운데로 어느 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 중저음의 베이스처럼 깊고 따스한 갈색, 세월 탓일까. 신록의 무성함보다 가을 숲의 수척함이 더 깊이 와 닿는다. 화려한 색채를 쓴다 해서 그림이 강렬해지는 것이 아니듯, 눈부신 것만이 마음을 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만히 나무에 기댄다. 등허리께로 와 닿는 거칠거칠한 수피의 감촉. 그렇지만 한 켜만 벗겨 보아도 촉촉하고 부드럽고 연한 속살이 감추어져 있음을 나는 안다. 인터넷 메일박스에 당도한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자주 그런 나무냄새를 맡는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의 속마음. 사람들은 사이버에서 더 정직하고 자기다워진다. 갑각류처럼 단단한 껍질로 무장한 사람일수록 더할 수 없이 보드레한 영혼의 속살을 감추며 살고 있음을 엿보게 될 때, 연민 비슷한 감동이 일곤 한다. 교감할 상대를 찾지 못한 견고한 고독- 존재는 다 외로움을 탄다. 제각기 보이지 않는 마음 한가운데에 고독이라는 이름의 길들지 않는 짐승 한 마리씩을 키우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고독, 교감, 이런 말들을 되뇔 때마다 오래 전에 읽은 까뮈의 단편 <간부(姦婦)>가 떠오른다. 별 생각 없이 살아온 중년의 여자가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법대생이었던 남편은 행상을 하는 철저한 생활인. 함께 있어도 교감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관계는 이미 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낯선 방, 피로와 권태에 찌들어 돌아눕는 남자 옆에서 여자는 홀로 생각에 잠긴다. 사랑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마주 바라보지 않고도 더듬어 찾는 습관적인 사랑 외에 다른 사랑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여자는 홀로 망루에 오른다. 표류하는 불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막의 별들을 바라보며 망루 바닥에 몸을 누인다. 무한히 깊고 높은 하늘. 그 하늘이 그녀에게 내려온다. 외로운 마음이 잦아들고, 지나온 날들이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혀진 자리에 소용돌이치며 내려오는 별빛. 온 하늘이, 온 우주가 그녀의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하나의 개체와 전 우주가 하나 되는 완벽한 합일. 여자는 비로소 충만함을 느낀다. 광대무변한 우주를 간부(姦婦)로 삼을 수 있다면 세속의 외로움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 나무를 올려다본다. 고개를 90도로 꺾어야만 끝을 헤아릴 수 있을 만치 우듬지가 높은 나무는 허리를 살짝 비틀며 무심한 듯 하늘을 받치고 있다. 저만치 살아올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을 참아내야 했을까. 어쩌면 나무는 외로웠을 것이다. 도저한 수직상승의 의지로 하여 더 많이 쓸쓸했을 것이다. 수직으로 서서 버티는 것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수가 없지 않은가.
별안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이 나무에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진다. 팔짱을 끼지도 마주 안을 수도 없고, 서로의 어깨를 빌려 줄 수도 없는, 서서 버티는 것들의 외로움과 위대함에 대하여 작은 위로라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무의 언어를 모르는 나는 까칠한 등허리를 가만히 쓸어준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여진 단절감. 막막하다. 동네 공원의 할머니들처럼 등을 쿵쿵 부딪쳐 본다. 등줄기를 바짝 들이대며 부닥치고, 부닥치고, 또 다시 부닥친다. 간절한 육탄공격이다. 몸이란 때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끼리의 소통수단이기도 하지 않던가.
나뭇가지 끝이 가상하다는 듯 여릿여릿 진저리를 친다. 가늘게 갈라진 하늘이 흔들린다. 키 큰 나무 하나와 키 작은 여자 하나가 등을 마주대고 서 있는 아침, 새 소리조차 잦아든 듯 하늘도 이윽고 잔잔하다. 큰 나무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관목들이 늦가을 이른 햇살을 받고 부스러진 낙엽사이로 파랗게 일어선다.
숲을 나와 숙소의 식당으로 향한다. 안개에 쌓인 듯 어렴풋해 보이는 앞산의 능선이 더없이 신비롭다. 얇은 화선지를 켜켜이 포갠 듯 양감(量感)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먼 산 풍경을 마주하고 걸어간다. 나무와 나누어 가진 신새벽의 교감 때문일까.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다. 숲으로 걸어 들어온 여자의 안으로 숲이 가만히 걸어 들어온 게다.
"정직하게 말해 봐. 아침에 숲에 가더니 누구랑 뒹굴다 왔어?"
등판에 붙은 검부러기를 찬찬히 털어 내는 일행의 짖궂은 농담에 나는 그저 싱겁게 웃는다.
속도
지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은? 치타다. 순간 최고 속력이 시속 120킬로미터 정도로 100미터를 3초에 완주하는 속도다. 톰슨가젤이나 타조는 시속 80킬로미터, 지구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나이 우사인 볼트는 시속 37킬로미터 정도다.
치타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달렸다면 인간은 도망치기 위해 달렸을 것이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을 것이다. 배고파 훔친 겉보리 한 되, 고구마 몇 알을 앗기지 않기 위해, 곤장을 맞고 무리에서 내쫓기는 치욕을 면하기 위해서도 목숨 걸고 달리고 달려야 했을 것이다. 싸울까 튈까 죽은 척할까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속도의 뿌리는 애초 그렇게 두려움에 잇닿아 있었을 것이다.
생존의 필수조건이었을 속도가 언제부터 그 자체로 엑스터시가 되었을까. 속도가 예술이고 환락이 된 시대, 과정은 소멸되고 서사는 폐기된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도 지구 저편에 대한 두근거림도 옛일이 되어 버렸다. 튼튼한 장딴지 대신 바퀴 위에 앉아 세상을 내달리게 된 이후부터 사람들은 키 작은 들꽃의 향기를 맡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는 겸허함을 잃어버렸다. 새만큼도 걷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느림은 게으름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묵직하게 기운을 아껴 쓰며 제자리에서 천천히 늙어 가는 한 그루 고요한 나무이고 싶지만 어물어물하다가는 짓밟히거나 떼밀린다. 흐름에 편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본의 아니게 민폐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바퀴로 굴러가는 세상,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중력을 잃고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내 삶의 리듬을 보폭에 맞추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속도는 전율이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 속도는 폭력이다. 단지 제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가속페달을 밟아야 하는 세상, 사람들은 잊고 사는 것 같다. 제자리에서 제 페이스로 뛰는 심장이 가장 오래 뛴다는 사실을.
바퀴가 존재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현기증을 알지 못했다. 멀미하지 않으려면 내가 나를 운전해 가는 게 최선이다. 운전자는 멀미하지 않는다. 내 다리로 걸으면서 멀미가 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 다리는 지구의 자전 속도에 감응하여 심장의 박동소리를 조율하는 성능 좋은 메트로놈이다. 조금은 굼뜨고 뒤뚱거릴지라도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보폭으로 느긋하고 품위 있게 어슬렁거리다 가고 싶다.
길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 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 보라. 한 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운이 좋으면 지금도 동해나 서해 어디쯤에서 길들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물과 흙, 소금으로 반죽된 거무죽죽한 개펄 어디, 눈부신 모래밭 한가운데서 길 한 마리가 날렵하게 튕겨 올라 가늘고 긴 꼬리로 그대를 후려치고는 송림 사이로 홀연히 사라질지 모른다. 갯벌이나 백사장에서 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의심할 일도 아니다. 첨단의 진화생물체인 길이 생명체의 주요 생존전략인 위장술을 차용하지 않을 리 없다. 흔적 없이 해안을 빠져나가 언덕을 오르고 개울을 건너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갔을지 모른다.
식물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4억 5천만 년 전, 초창기 식물의 역사는 물로부터의 피나는 독립투쟁이었다. 모험심 강한 일군의 식물이 뭍으로 기어오르는 데에만 1억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끼와 양치류 같은 초기 이민자들이 출현한 후 3억년이 지날 때까지 지구는 초록 카펫 하나로 버티었다. 꽃과 곤충, 날짐승과 길짐승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보다 훨씬 뒤인 사, 오만 년 전쯤, 드디어 인간이 출현했다. 길이 바다로부터 나온 것은 그 뒤의 일, 그러니까 진화의 꼭짓점에 군림하는 현생인류가 번식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길이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고차원의 생물군일 거라는 주장에 반박이 어려운 이유다. 유순하고 조용한 이 덩굴 동물은 인간의 발꿈치 밑에 숨어 기척 없이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생물이라는 말이 거슬리는가? 그럴 수 있다. 생물이 뭔가. 에너지 대사와 번식능력이 있는, 생명현상을 가진 유기체를 일컫는다. 산허리를 감아 봉우리를 삼키고, 집과 사람을 무더기로 뱉어내는 길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거대한 파충류다. 지표에 엎디어 배밀이를 하고 들판을 가르고 산을 넘는 길은 대가리를 쪼개고 꼬리를 가르며 복제와 변이, 생식과 소멸 같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낱낱이 답습한다.
낭창거리는 아라리가락처럼 길은 내륙으로, 내륙으로 달린다. 바람을 데리고 재를 넘고, 달빛과 더불어 물을 건넌다. 사람이 없어도 빈들을 씽씽 잘 건너는 길도 가끔 가끔 외로움을 탄다. 옆구리에 산을 끼고 발치 아래 강을 끼고 도란도란 속살거리다 속정이 들어버린 물을 꿰차고 대처까지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경사진 곳에서는 여울물처럼 쏴아, 소리를 지르듯 내달리다가 평지에서는 느긋이 숨을 고르는 여유도, 바위를 만나면 피해가고 마을을 만나면 돌아가는 지혜도 물에게서 배운 것이다. 물이란 첫사랑처럼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나란히 누울 때는 다소곳해도 저를 버리고 도망치려하면 일쑤 앙탈을 부리곤 한다. 평시에는 나붓이 엎디어 기던 길이 뱃구레 밑에 숨겨둔 다리를 치켜세우고 넉장거리로 퍼질러 누운 물을 과단성 있게 뛰어 넘는 때도 이 때다. 그런 때의 길은 전설의 괴물 모켈레므벰베나, 목이 긴 초식공룡 마멘키사우르스를 연상시킨다. 안개와 먹장구름, 풍우의 신을 불러와 길을 짓뭉개고 집어삼키거나, 토막 내어 숨통을 끊어놓기도 하는 물의 처절한 복수극도 저를 버리고 가신님에 대한 사무친 원한 때문이리라. 좋을 때는 좋아도 틀어지면 아니 만남과 못한 인연이 어디 길과 물 뿐인가.
길들의 궁극적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연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사람의 몸에 혈 자리가 있듯 땅에도 경혈과 기혈이 있어 방방곡곡 요소요소에 모이고 흩어지는 거점이 있다는 말도 있고, 중원 어디쯤에 결집 장소가 있어 길이란 길이 모두 그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사통팔달의 중심축에 마을이나 도시가 생겨나기도 하는데,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입성한 길들을 위해 예의 바른 인간들은 건장한 나무를 도열시키고 기다란 덧옷을 입혀주며 환대하기도 한다고 한다.
꿈과 욕망을 뒤섞고 본질과 수단을 왜곡시키는 도시. 도시에 오면 야성은 말살되고 감성은 거세된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생기를 탈취하여 휘황한 빛을 풍겨내는 도시의 마성에 길들 또한 수난을 면치 못한다. 타고난 유연성을 잃고 각지고 억세어져 가로세로로 뒤얽히거나, 기괴하게 뒤틀린 채 비룡처럼 날아오르고 두더지처럼 땅속을 파고들기도 한다. 대도시 인근에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길들이 혈전에 막히고 동맥경화에 걸려 온갖 종류의 딱정벌레들에게 밤낮없이 뜯어 먹히는 광경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타락한 길들이 도시와 내통하면 똬리를 틀고 주저앉아 분수없이 새끼를 싸지르기도 하는데, 젊고 모험심 있는 것들은 원심력을 이용해 도시를 빠져나가지만 병들고 고비늙은 것들은 옴쭉 달싹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려 변두리 어디쯤을 비실거리다 고단한 일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무엇 때문에 길들은 이 도시에 와서 죽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오게끔 유인하고 또 추동하는 것일까. 꿈의 형해처럼 널브러져있는 도시의 길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머릿속 길들마저 난마로 엉켜든다. 탄식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길. 섬세한 잎맥 같고 고운 가르마 같던 옛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홀려 엉겁결에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그들 또한 알 수 없었으리라. 결승점에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길도 강도, 삶도 사랑도, 한갓 시간의 궤적일 뿐임을.
불뱀 한 마리 검은 강을 건너 구부러진 등뼈로 강변을 휘돈다. 일렁이는 빛의 꽃가루 사이로 기신기신 고개를 오르는 꽃뱀. 길이 헐떡인다. 퇴화된 근육이, 실핏줄이 쿨럭인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위태롭게 깜박인다. 너무 빨리 내달리는 대신 꽃도 보고 별도 볼 걸, 오르막과 내리막을 더 천천히 즐길 걸, 키 작은 풀과 집 없는 달팽이에게 조금 더 친절을 베풀어 줄 걸,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까.
달동네 가풀막에 길 한 마리 엎드려 운다. 승천하는 길을 위한 조등 하나, 하늘가 별자리로 나지막이 걸린다.
두드러기
수상한 손님이 찾아 왔다. 생면부지의 불청객, 두드러기다. 더러 소문을 듣기야 했지만 아무래도 이 작자는 엉큼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밖에서 일을 보는 낮 동안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다가, 혼자 있거나 한가하다 싶을 때,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들려할 때, 슬금슬금 마수를 뻗쳐온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스멀스멀 옷 속으로 기어 들어와 이제부터 저하고만 상종하자 한다. 반갑지 않은 유혹, 적과의 동침이다.
놈은 처음, 시계나 고무줄 자국 같은, 압박 부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으면 어렵잖게 토벌할 수 있었으련만, 무관심 무저항으로 맞서려 했던 것이 사기만 높여준 꼴이 되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설 때 잠깐씩만 기척을 보이던 놈이 요즘엔 게릴라처럼 무시로 출몰한다. 내 등판을 캔버스 삼아 군데군데 지도를 그리고, 제가 무슨 광개토왕이라고 영토 확장에 기염을 토한다. 멀쩡한 팔뚝 위에 구릉이 솟고 종아리를 따라 백두대간이 형성된다.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안에 느닷없이 다도해가 떠오를 때도 있다. 참다못한 내가 반격을 시도한다. 열에 들뜬대지는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해저가 융기되고 화산이 폭발한다. 섬과 섬은 부풀어 대륙으로 이어지고 손 갈퀴 자국 따라 이랑이 굽이친다.
이 좋은 봄날, 왜 나는 이렇게 맹랑한 불한당과 신경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잠잠하다 싶다가도 불쑥불쑥 공략해 오는 변덕스런 화상 때문에 신경이 때 없이 과민해졌다. 살살 달래다 탁탁 쳐보다 피가 나도록 빡빡 긁는다. 잠깐의 쾌감, 다시 번지는 가려움. 악순환이다. 아무 곳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춘투(春鬪)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알레르기 체질도 아니고 무얼 잘못 먹은 기억도 없는데 멀쩡하던 몸이 왜 반란을 일으키는가.
경험자는 말한다. 상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일단 점찍은 대상은 괴롭힐 만큼 괴롭히고 나서야 못 이기는 척 퇴각을 할 거라고. 녀석은 혹시 환절기마다 저항력이 떨어지는 내 약점을 꿰뚫고 있을지 모른다. 꽃가루나 식품 첨가물, 집 먼지 합성물 같은 알 수 없는 신무기로 내 육신을 장악하고 영혼까지 철저하게 교란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왜, 왜 나란 말인가.
“두드러기가 왜 생긴 걸까요?”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들어 처방전을 쓰고 있는 의사에게 물었다.
“모르지요”
대답이 짧다. 우문현답인가.
“원인이 확실치 않아요.”
“원인을 모르고도, 치료가 가능합니까?”
혀끝에 숨긴 바늘을 감지한 듯 의사가 피싯, 올려보며 웃는다.
“세상 모든 병이 다 명쾌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증상으로 발현되는 거지요. 어쨌거나 적이 오면 무찌르고, 피가 나면 우선 지혈부터 해야지, 왜 피가 나는지, 왜 전쟁을 하는지 언제 다 따지시렵니까.”
의사가 잠자코 처방전을 건넨다. 약은 약사가, 진료는 의사가 하니 환자는 돈만 내면 된다는 것인가. 주사실을 나오며 나는 엉덩이주사보다 더 따끔한, 의사의 일침(一 針)을 생각한다. 해결책도 없이 머리만 복잡한 여자에게 의사는 덤으로 단순하게 사는 법을 주입(注入)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사는가. 왜 쓰는가. 왜 사람은 늙고 죽는가. 왜 우리는 그림자 없는 허무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왜’가 아니고 ‘어떻게’일 터이지만 나는 언제나 ‘왜’에 갇혀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산다. 명약비방 없는 고질병이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현답이 없는 우문의 가사에 의사는 또 웃어버리겠지만 그 통속적 치기 앞에서도 나는 마음 놓고 가벼워지지 못한다. 모범답안 없는 질문 안에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숨어 살고 있어서일까.
두드러기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약이 잘 듣는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왜 생겨나는지 알 수는 없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스러지는 것, 그것만이 분명한 위안이라고. 그는 어쩌면 인생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태어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가야 하는 것, 그것만이 명백한 진실이라고. 의사는 오늘도 묻지마 그룹의 총수 같은 얼굴로 묵묵히 처방전을 건넬 것이다. 매미가 가을을 알지 못하고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살듯, 그냥 주섬주섬 살아내라고, 행간에 가만히 적어 놓을 것도 같다.
봄꽃 이운 창가에 앉아 가뭇없이 떠나버린 불청객을 생각한다. 이유 없이 왔다 예고 없이 사라지는, 삶도 순간의 신열일 따름인가. 발진처럼 돋았다 자취 없이 스러지는, 소멸하는 시간의 불꽃일 뿐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뒤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한다.
나비의 꿈
신새벽 꿈속에서 제비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을 지나온 듯, 먼바다를 적시고 온 듯, 푸르게 일렁이는 물결 냄새를 풍기며 나비들이 하늘 가득 날아다녔다. 내 머리카락이 꽃술처럼 일렁였다. 몽롱한 꿈이었다. 황홀한 멀미였다. 나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곤충 가운데 가장 사치스런 날개를 가진 나비는 살아있는 추상화다. 신비스런 영감으로 가득 찬 천상의 화가가 섬세한 붓질로 그려 보낸 엽서다. 선명한 칼라, 화사한 프린트, 세련된 디자인 ― 비단처럼 우아하고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날개는 비에 젖지도, 구겨지지도 않는다. 생존을 위한 비상 飛翔의 도구로는 다소 연약하고 거추장스럽지만, 아지랑이보다 여린 파문으로 허공이야 실컷 유린하며 산다.
나비는 자유혼, 날아다니는 꿈이다. 정착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이다. 집을 짓거나 살림을 꾸리지 않고 사랑을 해도 소유를 꿈꾸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도 잠시뿐, 미련을 두거나 집착을 하지 않는다. 발그레한 꽃의 귓불을 건드리며 ‘Shall we dance?’라고 유혹을 해보다가, 웃으며 도리질하는 순정한 꽃들과는 가벼운 키스로 작별할 줄을 안다. 나비는 바쁠 것 없는 한량, 우울을 모르는 신사다.
먹잇감과 집 사이를 최단거리로 비행하는 벌들의 경제성도 유유자적한 이 풍류객에게는 그다지 부러운 덕목이 아니다. 조직과 서열에 충성하며 질서와 협동을 사랑하는 벌과는 달리 나비는 고독한 아나키스트다. 누구의 명령을 받들거나 어떤 의무에 구속당하지 않는다. 편을 묻고 여왕을 모시는 상명하복의 체제나, 지배와 피지배의 메커니즘에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무리지어 날면서 파벌싸움을 벌이고,
공동 주택 같은 데서 와글거리는 번다함도 애초 나비의 취향이 아니다. 금모래 빛 햇살로 샤워를 하고, 향기에 묻혀 꿀잠을 자는 이 태생적 유미주의자는 꿀을 모으는 일보다 춤을 추는 일에, 건실하고 지속적인 가치보다는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더 자주 매혹을 느낀다. 그리하여 꽃과 이슬과 무지개 같은, 향기와 바람과 저녁놀 같은, 오직 순간에만 머무는 무상한 것들을 따라 배회하고 또 방랑한다.
나비는 온건한 평화주의자이다. 침도 없고 독도 없다. 더듬이를 부러뜨리며 날개옷을 뜯거나 먹을 것을 사이에 두고 앙칼지게 맞서는 법이 없다. 영역을 가르고 울타리를 친다든가 보초를 세워서 침입자를 몰아내는 비정한 짓거리는 아예 어디서고 배운 바가 없다. 풍요로운 꽃밭을 만나도 한 끼 식사에 감사할 뿐, 다음 끼니를 위해 도시락을 싸거나 냉장고 같은 데에 저장할 줄을 모른다.
어석어석 풀을 씹으며 배밀이를 하고, 어둡고 긴 우화羽化의 터널을 묵언수행으로 참아내는 동안, 사는 일의 진수란 다툼이 아닌 나눔, 소유가 아닌 향유에 있음을 깨우치게 된 것일까. 무소유를 신조로 하나 애써 무소유를 설파하지 않음으로 해탈의 경지를 가볍게 넘어선다.
타고난 춤꾼이요 시인 묵객인 나비는 자연의 음계를 밟고 우주의 오선지를 오르내리며 보이는 음악으로 노래하고 출렁이는 가락으로 시를 쓴다. 수다스러운 일년초 꽃밭을 경쾌한 스타카토로 튕겨 넘다가,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연분홍 꽃잎을 휘감고 비엔나 왈츠를 추기도 한다. 녹차 밭을 스치는 바람을 만나면 지빠귀나 밭종다리 흉내를 내며 어설픈 공중발레를 선뵈기도 하지만, 춤이란 기실 덧없는 환幻일 뿐, 그 사소한 파닥임으로 존재의 심연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무한 허공을 아무리 팔락거려도 자취조차 남지 않는 나비들의 춤. 추는 순간 사라지는 나비의 춤은 춤이라기보다는 구도의 몸짓이다. 꽃은 왜 슬프도록 빨리 지고 사랑은 왜 속절없이 변해버리는지, 왜 오래지 않아 밤이 오고 날개는 초췌해져 너덜거리게 되는지, 묵묵부답의 하늘을 첨벙거리며 언뜻번뜻 자맥질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벌 같은 사람과 나비 같은 사람이다. 맹수라는 이유만으로 시베리아 수호랑이와 사하라 암사자를 한 족속이라 우길 수 없듯, 사는 곳이 같다하여 하마와 악어를 이종사촌쯤으로 뭉뚱그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벌들의 근면함과 협동심에 늘 고개가 숙여지는 나는 벌집에 잘못 들어온 굴뚝나비인 양, 때 없이 방향을 잃고 파드득거리곤 한다.
가슴팍 어디 겨드랑이쯤에 날깃날깃한 조각보 하나를 접어 넣고 살고 있어서일까. 속도와 효율에 서툴고 계산과 실리에 밝지 못한 나비족들은 은밀하게 허공을 탐하며 가벼움에 대한 열망을 앓는다. 중력을 거슬러 자주 땅을 헛디디고, 허방을 더듬다 곤두박질을 치기도 한다. 때로 침에 쏘이고 까칠한 다리털에 긁히기도 하지만, 날렵하게 날개를 바꿔달고 벌들의 왕국에 귀화할 생각들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별빛에 닿을 만큼 높이 날지도, 바다를 건널 만큼 멀리 날지 못해도, 나비 없는 봄이 봄이겠는가. 나비 없는 꽃밭이 꽃밭이겠는가. 베짱이의 노래가 개미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육중한 지구가 이만치라도 가볍게 천공에 떠있는 것은 세상에 온갖 풍각쟁이와 굴퉁이 예술가, 낭만적 허무주의자와 어수룩한 꽃들이 꾸는 아름답고 황당한 나비 꿈 덕분이 아닐까.
욕망의 순서
아기가 뒤집기를 시작했다. 생후 4개월 어린것도 제 고집이 있는지 한사코 왼쪽으로만 뒤집으려 한다. 끙끙거리다 성공하니 제 성취에 양양해져 낯빛이 금세 해사해진다. 풍뎅이처럼 아등바등, 땅 짚고 헤엄치기를 연습하다가 두 손 두 발 치켜들고 이륙 연습도 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순서를 밟는 것, 생각할수록 신통방통이다.
저만치 놓여 있는 삑삑이 장난감에 닿지 못한 아기가 성질을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린다. 흔들거리는 모빌이나 바라보던 아이 안에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손안에 넣고 싶은, 욕망이란 게 생기기 시작한 거다. 프로이트 심리 발달 단계로 보면 아이는 지금 구강기에 있다. 주먹을 빨고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입에 닿는 모든 걸 빨고 싶어 한다. 욕구와 표현이 입에 집중되어 배고프면 울고 편안하며 벙실댄다. 기분이 좋으면 옹알이도 한다. 손 내밀어 장난감을 집어 들진 못해도 소리 나는 장난감을 흔들어주면 눈망울에 반짝, 환한 불이 켜진다.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깨우쳐가는 발달 과정을 목도할 때마다 아이의 몸 안에 작은 신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혹, 그 작은 신의 이름이 본능이려나. 아기를 안아올려 삑삑이를 쥐어준다. 냉큼 입술을 들이대더니 말간 혀를 내밀어 조심스럽게 감식한다. 빨다가 잠시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입으로 데려가 빤다. 아이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눈으로 바라보고 손으로 감촉하고 입술로 확인한 다음에야 욕망하는 대상을 몸 안으로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를 소유하는 과정은 연인들의 사랑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첫눈에 반하지 않을지라도, 사랑은 일단 눈에서 시작된다. 눈이 먼저 클릭을 해야 마음이 쏠려 호기심이 생겨난다. 호기심이 궁금증으로 증폭되면서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손으로 가만히 내밀어질 것이다. 무르익은 욕망이 입술로 혀로 옮겨지는 동안 머릿속에선 빠르게 손익계산도 할 터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직행시키는 이 궁극의 미각을 이 사람과 오래 공유해도 좋을까, 내 안으로 뜨겁게 모셔 들여도 괜찮을까.
생명체가 육신이라는 하드웨어를 뒤집어쓴 DNA 데이터베이스의 플랫폼이라면 유전자를 운반하고 전송하라는 운용체제의 명령어들을 자동실행 시키는 프로세서가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일 것이다. 하니 1+1=1이라는 궁극의 셈법으로 출시된 신제품이 욕망에서 소유까지의 절차와 과정, 소프트웨어 전면의 데모 버전을 미리 한번 플레이 해보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아닐까. 개발이 완료되기 전에 시연해보는 맛보기 프로그램이 데모 버전일 테니.
태어나 몇 달 안에 답습해버린 과정을 실전에서 되풀이하며 아이는 당차게 세상을 밀고 나갈 것이다. 세상을 내 안으로, 나를 세상 속으로, 온갖 매혹적인 것들을 욕망하고 소유하며 사람 사이를 분주히 누빌 것이다. 꿈꾸고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 안개와 이슬, 무지개나 그림자일 뿐일지라도. 그런데 혹, 어쩌면 이승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생의 데모 버전 아닐까. 장자의 나비처럼 우리 모두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석의 시간
동장군이 때려눕힌 강 한 마리가 뻣뻣하게 기절한 채 뉴스화면 가득 널브러져 있다.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는 위력만으로도 장군의 작위가 무색치않겠다. 쇄빙선에 올라탄 포클레인이 사마귀 같은 턱을 주억거리며 희푸른 살점을 물어뜯어 보지만 군데군데 생채기나 낼 뿐 의식 잃은 강을 핥아줄 때까지, 강은 죽은 척,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골목 어귀마다 한뎃잠을 자다 얼어 죽은 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웅덩이 같은데서 대책 없이 미적거리던 물도 기습적 한파에 얻어맞았는지 갈비뼈가 와장창 부서져 나가 있다. 세상 만물 중 가장 추위를 타는 게 물이라는 사실을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알았다. 영하로 떨어지면 가장 먼저 얼어 죽는 게 물이다. 지표에 닿은 빗물이 서둘러 땅속으로 스미는 것도,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바다로 도망치는 것도 겨울의 소리 없는 은빛 테러를 피하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텔레비전을 끄고 구석진 내 방에 들어와 앉는다. 찻상을 마주하고 책장 기둥에 등을 기대면 하루가 편안하게 부려진다.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넣고 반가부좌 자세로 눈을 감는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피신해온 포트 안의 물이 씨울씨울 다급한 소리를 낸다. 불꽃도 없는 불이 물의 방둥이를 후려치는지 와글와글 소리가 장대처럼 높아진다. 천정을 뚫을 듯 요란하던 물소리가 어느 순간 뚝, 거짓말처럼 그친다.
간택을 기다리는 규수들 모양 도열해 있는 다완들을 둘러본다. 지난해 차실을 없앤 뒤 오갈 데 없어진 차 살림들을 서재 한 귀퉁이에 모아들였는데 서재 아래쪽 두 칸을 옹색하게 차지한 게 찻사발들이다. 말차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차보다는 찻그릇이 좋아서였지만 보이차나 황차를 주로 마시던 요즘엔 이천댁도 문경댁도 뒷방아씨 신세다. 허허실실 총애를 다투던 것도 한 때, 시간의 뒷발질에 수굿해진 탓인지 사이좋게 물러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고들 있다.
맞은 편 반다지 위, 다완 하나가 놓여 있는 풍경은 언제 봐도 고즈넉하다. 그릇 하나가 놓임으로서 벽의 표정이 그윽해지는 것은 정물 자체의 형태보다는 그것이 풍겨내는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마이센 차 주전자나 르크루제 냄비를 놓아둔다 해서 그런 맛이 날 리 없지 않은가. 미색이 출중하거나 교태를 부리지 않아도 분위기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미적 충만감을 주는, 섹시하다는 말도 그런 뜻 아닐까. 멀찌가니 물러놓고 바라보다가 가까이서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싶어서, 밥그릇이나 국대접이 되지 못해도 함께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사랑도 그렇게 시작되지 않던가. 불용不用의 미학, 불가해한 공간의 현상학이다.
입술이 얇고 살빛이 은은한 ㅎ선생의 평다완을 찻상 위에 데려와 앉혔다. 구층암 황차나 마셔볼까 했는데 찻사발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다. 가마를 열 때 선생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던, 아끼는 기물을 빼앗다시피 들고 와 너무 오래 홀대하기도 했다. 뜨거운 물로 예열을 하고 차건으로 가만가만 물기를 닦는다. 새로 개봉한 가루녹차를 대나무 차시로 두 번 덜어 담고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넣는다. 차선을 재빨리 휘저으며 가벼운 손놀림으로 격불擊拂을 하면 물과 차가 한 몸으로 휘돌며 미세한 거품으로 어우러진다. 코끝으로 훅, 끼쳐드는 연둣빛 향기를 눈과 코가 먼저 흠향하면 말차는 거지 반 마신 셈이다. 두 손으로 찻사발을 받쳐 들고 부드럽고 폭신한 거품차 한 잔을 세 번쯤에 나누어 천천히 마신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뜨겁고 향기로운 초록구름 한 채를 내 안으로 정중히 모셔 들이는, 이 정신의 사치가 좋다.
서재 한 귀퉁이, 한 평도 안 되는 찻자리지만 이곳이 내겐 우주의 배꼽이다. 일상의 정좌처靜坐處다. 핑핑 도는 세상의 한가운데 태풍의 눈 같은 고요의 터에 앉아 찻물을 끓이고 음악을 듣는다. 정신과 육신이, 안과 밖이 포개진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오롯한 실존. 시간은 공간으로 스며들고 나는 내게로 돌아간다.
다 마신 찻사발을 열탕으로 헹구고 차건으로 닦아 제자리에 넣는다. 뜨거운 회오리를 품었다 비워낸 사발의 안색이 간밤, 사내 다녀간 과수댁 낯꽃처럼 화사하게 빛이 난다. 사랑받는 것들은 때깔이 다른 법, 자주 눈 맞추고 온기를 불어주어야 살갗에도 광채가 살아 보인다. 후미진 응달에 더 퍼질러 있다가는 영혼에도 검버섯이 돋고 말 거라고, 바람이 덜컹, 으름장을 놓으며 간다. 구석에 돌아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쓸쓸하고 시무룩한 존재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끄덕끄덕 졸고 있는 내 안의 비만고양이에게, 객쩍은 말이라도 붙여봐야겠다.
구두와 나
두를 샀다. 빨간 단화다. 강렬한 원색이 낮은 굽을 보완해 주어서인지 처음 신은 단화가 어색하지 않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줄기차게 7센티 굽을 고수했다. 무릎이 아프다고, 발목이 좋지 않다고, 진즉 편한 신발로 갈아탄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한사코 하이힐을 고집했다. 젊은 시절부터 습관화되어선지 신발이 낮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굽 낮은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땅으로 푹 꺼지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들어와 버린 적도 있다.
구두 굽이 높아지면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다르다. 턱을 치켜들고 등뼈를 곧추세워 또각또각 걷다 보면 마음 복판에도 철심이 박혀 자세가 한결 당당해진다.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아랫배에 힘이 쏠려 저물어 가는 여자의 곤고한 심신이 일시 탄성을 되찾기도 한다. 쭉쭉빵빵인 젊은 여인들처럼 뭇 남자의 시선을 거느리진 못해도 왜소해진 자존감을 들어 올리는 소도구로 하이힐은 내게 간간이 유효했다.
지지난해인가, 파리에 잠시 머물 기회가 생겼다. 아침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을 사고 저녁에는 까르푸에서 산 싸구려 와인을 땄다. 비 내리는 센 강가를 걷고 샹젤리제의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 일이 좋았다. 얼추 팔십은 넘어 보이는 노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후들거리는 걸음새로 신호대기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늙음을 빌미로 긴장의 끈을 늦추거나 매무시를 흐트러뜨리려 하지 않는 원조 파리지엔느의 결기가 멋져 보였다.
다음날 나도 여행객 티가 줄줄 흐르는 아웃도어를 벗어던졌다. 키높이 운동화도 밀어 두었다. 살랑거리는 스카프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고서점과 그림엽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골목들을 천천히 헤집고 다녔다. 주눅 들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주었던가? 발목이 그만 삐그닥, 꺾였다. 발목이 꺾이면서 무릎도 꺾였다.
동행한 친구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케토 뭣인가 하는 관절파스를 붙여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수다스런 중년 탤런트의 광고 카피가 아직 나랑은 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돌아와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순례했다. 구두 굽이 낮아지고 구두코도 점차 펑퍼짐해졌다. 발목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우지직 찢겨 나간 내 자존의 인대 하나는 끝내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한때, 오래 서서 일해야 하는 외국의 간호사들이 주로 신는다는 수입 캐주얼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께 큰 맘 먹고 사 드렸던 그 효도 신발을 우리는 그때 여포신이라 불렀다. 여자이기를 포기한 신발이란 뜻이었다. 뒤늦게 편한 맛을 보기 시작한 내 발가락들이 날렵한 정장 구두에 구겨 넣어질 때마다 뒤꿈치와 발바닥이 합종연횡으로 몽니를 부리며 칭얼거릴 때, 그 뭉툭한 신발 생각이 났다. 친한 척 슬그머니 다가앉은 노경老境, 그 불청객에 무릎을 꿇고 나도 이제 여포신에게 굴종해야 하는가. 착잡했다. 씁쓸했다. 여자의 뒤꿈치와 구두 높이 사이에 어떤 친연성親緣性이 작동하기에 신발 하나에 성 정체성마저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해, 남프랑스의 마르세유 항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잡아챈 것은 광장 복판에 놓여 있는 엄청나게 큰 진홍빛 하이힐 모형이었다. 바람 부는 갑판, 흔들리는 잠결 속에서도 거칠고 울룩불룩한 이두박근의 사내들은 항구의 여자처럼 알짱거리는 핑크빛 하이힐을 꿈에 그리며 시퍼런 벼랑과 맞서 싸우고 구멍 난 그물을 당겨 올렸을 것이다. 신데렐라에게 구두가 왕자의 옆자리 티켓이었고 샤론 스톤에게 구두가 섹시 아이템이었듯이, 되똑 들어 올린 여자의 발꿈치에는 삶의 하중을 떠받치는 마법의 지렛대 하나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욕망의 바코드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산악인 오은선의 키는 155센티미터, 그가 오른 안나푸르나의 정상은 8,091미터였다. 그는 왜 자기 키보다 5220배나 높은 산을 그토록 목숨 걸고 올랐던 것일까.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대한 동경으로, 짓눌린 꿈을 향한 도발의지로, 어떤 여자는 히말라야에 오르고 어떤 여자는 코를 높이고 또 다른 여자는 무시무시한 킬힐을 신고 밤거리를 아슬아슬 누비기도 한다. 한 치라도 더 높이, 더 위로 솟으려고 제각기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산다. 콧대도 못 높이고 히말라야에도 못 간 나는 구두 굽이나 겨우 높이며 살았다. 이제 그마저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살아 보니 인생은 잡았다 놓치는 것, 주었다 빼앗는 것,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쪼그라져 내려앉는 거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사십 년 동안 내 인생은 기껏 7센티미터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내부 수리 중
친구와 만나기로 한 가게 앞에 작은 메모판이 붙어 있다.
'내부 수리 중'
손님이 뜸한 여름을 틈타 실내 정비를 하려는가 보다. 아니면 어디 잠시 휴가라도 떠난 것일까. 유리문에 붙여둔 종이 한귀퉁이가 자꾸만 바람에 들썩인다.
'내부 수리 중'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출렁이는 글자들을 바라다본다. 나도 그렇게 팻말 하나 달아매고 잠시 문 닫고 휴업이나 했으면. 때 없이 솟아나는 잡동사니 상념들은 꽁꽁 묶어 구석지에 개켜두고, 눅눅하게 쳐져 있는 요즈막의 마음자락은 툭툭 털어서 일광소독이라도 해두고 싶다. 이 빠진 접시와 무디어진 칼날은 새 것으로 교체해 놓고, 자주 터덕거리는 아날로그시계도 첨단의 디지털로 바꾸어 달까 한다. 무엇을 애써 걸어두기보다는 빈 벽을 많이 남겨두는 것도 눈 맛이 시원해 좋을 것이다. 버릴 것 버리고, 바꿀 것 바꾸고, 낡아 삐걱거리는 몸 구석구석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일까지, 자고새면 수리할 품목이 늘어날지 모른다. 리모델링 작업을 깔끔하게 끝내고 '신장개업' 간판을 대문짝만 하게 내걸면 사는 맛이 한결 새로워질까.
기운 잃은 육신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억력과, 좌충우돌 부대끼다 생채기 진 마음을 보수하느라 나는 언제나 쩔쩔매며 산다. 멀쩡한 척, 번드레한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시치미를 떼지만, 흐려진 창문과 고장 난 내연기관, 막힌 배수구를 가리고 감추느라 시시때때 남몰래 허둥대며 산다. 간판을 내달아 걸지 못할 뿐, 실은 나도 언제나 내부 수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