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잠을 털어내자마자 서둘러 마당을 쓴다. 이 집으로 이사를 한 후, 비가 오는 날이 아니고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밤새 내린 이슬의 감촉이 손끝에 촉촉이 감겨온다. 대빗자루 끝이 흙을 파고들어 그림 아닌 그림이 그려질 만큼 온 힘을 다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당을 쓴다기보다는 미세하게나마 흙을 뒤엎는다고나 할까.
집주인이 되어 아홉 해가 흐른 지금까지 뜰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흙 마당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텃밭 자리를 떼어 내고, 다실(茶室)로 사용할 별채 자리도 제법 잘라갔다. 온 마당 가득 일년초를 심어 사계절 피고 지게 하는 일은 평생의 중요한 숙원사업이건만, 남편은 유실수를 심으려고 호시탐탐 내 땅을 노리고 있다. 더구나 오다가다 들른 동네 사람들은 잡초 때문에 감당을 못하니 잔디를 심으라고 틈만 나면 종용하고 있으니…. 하기야 동네에 새로 지은 집들은 대부분 푸른 잔디가 깔려있다. 산책길에 들여다볼 때마다 특별히 정원조성을 하지 않아도 그 푸른색 하나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매번 가졌었다.
이러저러 사연들이 있기는 했으나 꿋꿋하게 흙 마당을 꾸려 가고 있다. 마당을 쓸고 다듬는 것은 단지 너저분한 쓰레기만을 치우는 일이 아니다. 흙을 뒤집어 숨을 쉬게 해주는, 그야말로 흙을 가꾸는 일이다. 이끼나 풀이 자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흙이 살아나 온 마당이 볼그레하게 윤기가 돈다.
요즈음은 집에 들르는 사람들마다 흙 마당을 칭찬하곤 한다. 별채 앞에 현대식 바닥재를 깔고 편한 의자까지 마련해 놓았건만, 모두가 감나무 아래 흙 마당 평상으로 달려든다. 달과 별이 돋는 밤, 마당 가운데 모닥불이라도 피우노라면 그야말로 하늘도 땅도 인간도 하나 되어 어우러진다.
서양식 정원이 시각으로 즐기는 공간이라면 우리의 마당은 몸을 담고 활동하는 생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추수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타작을 하는 일터였으며, 멍석을 깔고 곡식과 채소를 널면 독특한 풍경의 건조장이 되었다. 평상 하나를 턱 놓으면 가족의 쉼터요, 아이들의 놀이터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명절 때마다 펼쳐지던 마당놀이이다. 정월 대보름마다 장관을 이루는 달집태우기도, 한가위 달빛 아래서 보름달보다 더 환한 얼굴로 고모, 언니들이 펼치는 강강술래도, 온 마당을 웃음바다로 만들던 아래 뜸 당숙모의 ‘꼽추 춤’도 모두 동네 어느 집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정서 안에는 한마당 질펀하게 어우렁더우렁 하고 싶은 심사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무대라는 공간이 감상하는 것에 그치는 공연자의 것이라면, 마당은 흥이 나면 언제든 뛰어들어 함께할 수 있는 관람자의 것이라고나 할까. 민가는 물론이고 궁중에서까지 펼쳐지던 ‘나례희’와 ‘산대놀이’로부터 시작해 악공집단인 광대들의 ‘사당패 놀이’는 민중들의 애환을 풀어 주는 큰 위안물이었다. 그것을 재연한 영화 ‘왕의 남자’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유 역시 우연이 아니다.
전통 마당은 현대인들의 닫힌 정원과는 달리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물건을 팔러온 보부상도, 시주하러 온 스님도, 심지어는 동냥하러 온 거지들도 대부분 마당까지는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그야말로 활짝 열린 응접실이었던 셈이다.
여기저기서 ‘설 자리(마당)가 없다’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마땅히 함께할 공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공부 잘하는 청소년만이, 근사한 직업을 가진 젊은이만이, 부유하고 건강한 노인만이 근사한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다. 사회 곳곳에 뛰어난 배우들이 공연하는 무대는 넘칠 만큼 많은데 그림의 떡일 뿐 함께 뛰어들어 즐길만한 보통 사람들의 마당이 없다. 특별하지 않아도 흥과 정과 관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건 판이 벌어지고, 또 주인공이 될 수 있던 그 옛날 마당 잔치에 어울려 한바탕 휘몰아치고 싶은 생각 간절하다.
누군가 온다는 약속도 없는데 대문 빗장을 활짝 열어놓고 오늘도 정성을 다해 마당을 쓴다.
'그룹명 > 수필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우눈 / 한경선 (1) | 2022.09.23 |
---|---|
나는 반려동물이다 / 이형국 (1) | 2022.09.23 |
구두와 고무신 / 최병진 (1) | 2022.09.23 |
불안한 해빙 / 이주옥 (1) | 2022.09.23 |
열린 문 / 위상복 (1) | 2022.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