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동상(凍傷) / 유점남

테오리아2 2022. 9. 2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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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언니가 발이 아프다고 한다. 어릴 때 얼었던 발가락이 겨울만 되면 덧나기 때문이란다. 고무신 하나로 추운 겨울을 견디던 때라 나도 고생한 적이 있었지만 오래전에 다 나았다. 60년도 더 된 상처가 언니에겐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열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셋째 언니가 없었다. 전에도 두 번이나 가출한 적이 있어 아버지가 찾아오곤 했었는데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얼마 뒤 어느 집 식모가 되었다 하고 공장에 취업을 한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의 가출은 그렇게 식구들에게 잊히고 말았다.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15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였다. 재개발 지역 반지하 단칸방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형부와 어린 두 조카와 살고 있었다. 몇가지 안되는 살림살이는 사는 형편을 짐작하게 했다. “이렇게밖에 못 살아서 부끄럽구나.” 담담하게 말하는 언니의 모습은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변해 있었다 체념한 듯한 표정이 불운했던 어린 시절 때문인 것 같아 안쓰러웠다.

언니는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딸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 살 때 우리 집으로 왔다는데 우리 오 남매 사이에 낀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처지였다. 생모는 기생이었고 외가는 주막집을 했다고 들었다. 언니는 우리 어머니를 ‘큰어머니’라고 불렀다. 밥은 같이 먹었지만 잠은 따로 잤다. 우리가 한 방에서 어머니 옆자리 다툼을 할 때 언니는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방으로 자러 갔다.

 

 

 

크면서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언니는 외가를 자주 찾아갔다. 생모도 정을 떼려고 그랬던지 모질게 대했던 모양이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느 날은 교과서를 몽땅 버리고 온 일이 있었다. 그 뒤로 언니는 다시 학교에 다시 가지 못하고 말았다. 논두렁에서 새 쫓기를 하거나 소에게 풀을 먹이러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16살 되던 해에 우리 집을 떠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언니와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가끔 연락만 하고 지낼 뿐이었다. 살던 동네가 헐리면서 언니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러다 내가 회갑이 되던 해 외국 여행을 하면서 언니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오랜 시집살이도 끝나고 혼자가 되어 언니의 묻어 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마음에 공부는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버렸지만 막상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창피하기도 하고 후회가 되더라고 했다. 언니들에게는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아버지가 서운하고, 식구들의 생일이면 어머니가 소반에 차려 주는 흰쌀밥과 미역국이 있는 생일상이 부러웠단다.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낳은 딸이 아니라고 할 때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해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 방에 있는 천자문을 몰래 보따리에 싸서 하루 종일 걸어서 읍내에 도착하니 밤이 되더라고 했다.

씌워진 굴레를 벗어보려고 용기를 냈던 언니의 가슴 시린 이야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심코 누리고 살았던 어떤 것은 언니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빚을 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서 읍내까지는 백 리 길이었다. 눈비가 많이 오면 버스도 끊어지는 아흔아홉 구비라 불리는 여원치 고개가 있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는 고적한 길을 걸을 때 어린 마음이 오죽이나 막막했을까. 그렇게 언니가 넘었던 그 고개는 앞으로 언니의 멀고 험난한 여정에 비하면 시작 불과했던가 보다. 서울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다가 형부를 만났다고 한다. 자기를 좋아해 주는 형부가 무조건 좋았다고 했다.

19살 어린 나이에 형부를 따라갔던 시댁은 대물림된 가난으로 송곳 꽂을 땅 하나 없는 시골집이었다. 11남매의 맏이였던 형부는 큰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후 군대에 갔기 때문에 언니는 끼니때가 되면 양식을 꾸러 다녀야만 했단다.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다시 왔지만 형편은 여전했고, 연달아 올라오는 시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시부모님까지 오랜 병석을 지키시다 언니 곁에서 눈을 감았다. 그런 중에도 형부는 수시로 바람을 피워 언니의 가슴엔 늘 찬바람이 불었다.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던 언니는 얼마 전 지방의 작은 임대 주택으로 이사했다. 청소 일을 하면서도 꽃동네로 후원금을 보낸다고 한다. 매월 얼마씩 빠져나가는 통장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짠해진다. 늘 차가운 가장자리를 떠돌기만 했던 언니가 자신에게 스스로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몸짓이 아닐까.

물은 가장자리부터 언다. 평생을 사는 동안 한 번도 중심에 들어보지 못하고 주변만 맴돈 언니의 겨울이 남긴 흔적일까. 언니는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발가락이 가렵고 아프다고 한다. 땅속 깊이 박힌 얼음처럼 유년의 시간 속에 단단히 각인된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는 날이면 언니의 동상(凍傷)은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아픔은 말을 하기만 해도 치유가 된다고 한다. 아직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언니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어야 할 것 같다. 봄바람에 녹지 않는 얼음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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