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지던 날
고 윤 자
봄비인가 겨울비인가. 바깥 날씨는 영하를 맴도는데 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처럼 그렇게 들이닥친다. 하기야 순서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비가 먼저 내리고 봄은 그 뒤를 따르려나보다.
작년 이맘때는 동백꽃, 감자난초, 금낭화가 동시에 꽃을 터뜨리는 바람에 진공처럼 적막하던 우리 집이 모처럼의 표정을 가져 보았다.
예사롭지 않음을 예고하기 위함이던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은 꽃이 피는 것만을 마냥 즐거워했다. 마치 한꺼번에 터뜨리는 기자들의 플래시처럼,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무리처럼 눈이 부시도록 함께 달려들었다. 작년 그 날엔 절기를 가늠하지 못하도록 큰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보쌈 하듯이 휘말아 데려가 버렸다.
그가 간 날, 그날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이 비가 내리고 있다. 축축한 날씨 때문인지 슬픔은 가슴 속으로 익숙하게 파고들고, 그 날과 똑같은 크기로 통증이 가슴 한복판을 밀고 들어온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의 추억은 신경통과 같아서 비만 오면 도진다고.
세찬 빗줄기 사이를 뚫고 핏빛으로 물든 그날의 내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땅을 치고 몸을 흔들어 보며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허공에 그려대던 나의 헛손질이 가없이 막막하다. 그날의 뜨거운 전율 같은 슬픔이 내 몸을 휩싸듯 훑고 지나가 버린다.
울음은 여유로운 사람의 기나긴 노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슬픔은 차곡차곡 내 숨을 닫아 버리더니 짧은 순간 나를 질식시키며 덮쳐온다.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운명한 지 서너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벌써 사체를 수습해서인지 교통사고로 인한 고통스런 흔적과 사건의 처절함을 증명해 줄 핏자국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오고 나를 지탱해 주고 있던 질긴 정신력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나...... 정말 인정할 수 없어 소리조차 내질러지지 않았다.
묘지가 있는 곳도 아닌데 굳이 구룡포 앞 바다로 가기로 했다. 특별히 강의가 없는 날이면 그는 늘 그곳에 파묻혀 살았다. 바다를 좋아하던 그는 해변 가에 작은 아파트를 준비해 놓고 창밖에 이웃하고 있는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사랑하며 살았다. 끝없이 주고도 말이 없는 바다와, 한없이 자유로운 갯바람과, 무한대로 펼쳐진 흰 모래 벌판이 좋았을 것이다. 한 고비 넘기면 또 한 고비가 다가오고 무수히 달려오다 깨지는 파도를 보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새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그는 어머니 품처럼 바다로 달려가 안겼다.
모래위에다 자루 속의 물건들을 차례로 펼쳐 놓았다. '누구누구의 유품'이라고 병원에서 싸 보낸 물건들이다. 어제 그가 평소에 즐겨 앉아 있던 안락의자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늘은 좋아하던 바다로 나들이 나온 셈이다. 피 묻은 손지갑, 벨트, 넥타이, 찢겨진 양말 위에 석유가 뿌려졌다. 바람은 아직 차고 매섭다. 불꽃은 일렁일렁 바람을 타고 잘도 달린다. 검은 색, 붉은 색으로 너울너울 춤추는 불길과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와, 비명처럼 들리는 파도와 바람 소리가 한데 어울려 울부짖듯 흔들거렸다.
검은 색 꽃잎처럼 흩날리는 그의 넋 위에 마지막 옷 몇 점을 더 던져 넣는다. 다시 석유를 붓는다. ‘타타탁 타타탁’ 소리를 내면서 불꽃은 슬픈 듯이 다시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그가 우리들에 대해 여러 가지 남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검게 타버린 그의 분신처럼 안타까운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격정적으로 얘기하기도 하고, 때론 힘이 부치는 듯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침묵처럼 긴 정적이 흐른다.
그의 영혼이 갈 길을 찾았는가.
하얀 물새가 우리의 머리 위를 몇 번씩 선회하다가 수평선 저쪽의 바다 끝으로 날아가 버린다. 나비가 유충으로 태어나 껍질을 벗어 던지듯, 그가 일생을 힘겹게 마치고 기화해 버리는 순간이다. 그는 이제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도 좋다.
그를 혼자 남겨놓고 가도 되겠지. 바다가 곁에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을 거야. 흰 모래 위에 가득히 새겨진 우리들과의 추억이 있으니까.
어느덧 수평선 저 너머로 붉은 노을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