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끝내주는 남자 / 김응숙

테오리아2 2022. 4. 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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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리들을 뒤섞은 것 같은 소음과 함께 파란색 트럭이 아파트 입구에 머리를 내민다. 국기 게양대 밑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슬며시 일어나 낡은 건물 뒤로 꼬리를 감춘다. 그 뒤로 또 한 대의 트럭이 따라오고 있다. 나는 손을 들어 신호를 한다. 트럭에서 네 명의 남자들이 내린다. 그들 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그를 나는 한눈에 알아본다.

 

땅속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깊고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생면부지의 그가 급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끌어내었다. .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냈으면 합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느낌을 받았는지 그가 이틀 뒤 정오 무렵 현장을 찾아가겠다고 답했다. 나는 그의 말꼬리가 사라지기 전에 집안에 물건이 가득하다고 급히 덧붙였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런 것은 다 괜찮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쓰레기 처리업체라고 등록된 그의 전화번호에 아파트 주소와 동 호수를 문자로 남겼다.

 

집안에는 물건이 가득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물건이 아니라 쓰레기들이었다. 20평 남짓한 실내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물건들과 옷가지들, 크고 작은 박스들과 플라스틱 용기와 병들, 뒤엉킨 비닐들, 때 묻은 이불과 나뒹구는 약병들, 방과 거실, 부엌에도 생활 쓰레기들이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차라리 집안 자체가 커다란 쓰레기통이었다.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현관문을 열기 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한결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내 혈육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혈관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혈관으로 뻑뻑한 슬픔이 몰려들었다. 나는 쓰레기더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소리죽여 울었다.

 

사실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지난 오 년 동안 이 집의 주인은 어둠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살았다. 먹기 위해 들여온 것은 있어도 내간 것은 없었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창마다 두꺼운 천을 드리우고 한 줌의 햇살도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혈육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항상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몇 번의 폭력적인 상황들이 발생하자 우리는 서로의 접촉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속수무책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자신을 내면의 벼랑 끝으로 몰아갔지 싶다. 그는 살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살았을 것이다.

 

대장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인데 뻣뻣한 곱슬머리를 길러 뒤로 묶고 있다.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인상을 알 수 없다. 다만 길게 찢어진 두 눈의 깊이가 그의 목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두꺼운 장갑에 작업화까지 신은 그의 손에는 빠루라 불리는 기다란 쇠막대기가 들려 있다. 긁히고 우그러지고 앞 유리에 금까지 간, 어디 성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트럭들과 함께 나타난 그는 세상의 온갖 폐허를 거쳐 온 전사처럼 보인다.

 

앞 베란다에서 뒤 베란다까지 집안을 둘러본 그가 남길 물건이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 물건들의 주인은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다. 벌써 보름째다. 보름 전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오 년 만에 전화를 해왔다. 119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병원에 갔으나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만을 들었다. 대학병원에서는 몸속에 염증이 퍼져 성한 장기가 없다고 했다. 다급하게 수술을 했지만 폐혈증까지 와 중환자실에서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 그런 그가 겨우 입술을 열어 집안의 모든 것들을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나는 그의 눈에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새까만 절망의 빛이 드리워지고, 그리고 잠깐 희미한 희망의 빛이 어리는 것을 동시에 보았다.

 

빠루는 인정사정이 없다는 점에서 자애로운 도구이다. 절명의 순간을 그만큼 줄여주니 말이다. 큰 몸집의 장롱도 대장의 손길 한 번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무릎을 꿇는다. 모진 미련을 가차 없이 끊어주는 그의 카리스마에 존재의 끝에 서있던 물건들은 조용히 순종한다. 때가 왔음을 알고 서럽고 아픈 시간이 배인 허물을 버린다. 그들은 형태를 버리고 색을 버리고 이름을 버리고 마침내 상처마저 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경계를 넘어 스스로 쓰레기임을 자각한다. 마침내 물건에서 오욕칠정의 짙은 물이 빠진다. 물건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때부터 소멸의 운명을 타고 난다. 다만 인연에 따라 쓰이고 닳고 상처를 입으며 나름의 과정을 거칠 뿐이다. 그리 보면 한 인간의 인생이나 한 물건의 여정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가 큰 물건들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자루에 잡다한 것들을 넣어 나른다. 이불과 베개가 자루를 채운다. 화장실에서 쏟아져 나온 물건들과 마지막까지 손에 들려 있었을 약들을 한 자루에 쓸어 담는다. 버려지는 것은 물건들만이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몸부림 쳤던 시간들, 소통하기를 마다하고 용서하기를 거부했던 어둡고 핍진한 마음들을 긁어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 절망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들이 절뚝거리며,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수없이 오르내리는 동안 그들의 얼굴은 땀범벅이 된다.

 

대장은 내가 따라준 한 잔의 물을 마시고 신발장을 뜯어낸다. 마지막 가구이다. 이리저리 쳐놓은 줄들을 걷고 못을 뺀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자 모든 것이 비워진 텅 빈 공간이 다가온다. 열어놓은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오후의 햇살이 서쪽 베란다를 통해 깊숙이 들어온다. 마침내 끝이 났다. 마치 죽은 이의 것처럼 모든 물건을 다 버렸다. 이제 삶은 새로운 탄생을 원한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던 대장이 차 창문을 내리더니 검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린다. 의외로 섬세한 입매를 가진 남자이다. 한 사람의 인생 뒤에는 그만의 이야기가 있지요. 그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깊고 허스키한 목소리이다. 이건 그저 제 직업에서 느끼는 생각입니다. 그는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끝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차 창문을 올리자 트럭들이 출발한다. 타인의 절망으로 납작해진 타이어가 오체투지를 하며 천천히 굴러간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텅 비어 버린 집안처럼 내 가슴도 텅 빈 것 같다.

 

나는 인테리어 업체를 수소문해 집수리를 부탁했다. 이제 이 빈 공간으로 새로운 기운이 흘러들 것이다. 끝내주는 남자가 다녀가고, 사흘 후에 나는 병원으로부터 동생이 고비를 넘겼다는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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