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놀
바이러스 횡포에 오그라들었던 가슴을 연다.
시야에 들어오는 바다가 오늘따라 짙푸르다. 간만의 외출에 봄빛마저 상큼하여 마음도 쾌청이다. 멀리서 희끗희끗 파랑이 인다.
아, 까치놀! 그렇지, 까치놀이다!
흰 갈기 나풀거리며 수천, 수만 필의 말이 군무(群舞)를 펼치며 달려온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매불망이던 백두파가 어깨춤 들썩이며 장엄한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잃어버린 봄날을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것일까.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조우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수년 전 국문학자 이익섭 교수님이 건네준 산문집에서 ‘까치놀’을 처음 알았다. 우리말 탐사에 나섰던 대학 시절, 전국 해안을 누비며 어렵사리 어원을 찾아냈다는 까치놀은 우리의 옛말 ‘가티널’을 백두파(白頭波)로 해석한 데서 온 것이라 했다.
국립국어연구원장과 국어심의회 수장을 지냈던 교수님은 ‘까치놀’을 ‘먼 바다에서 희끗희끗 잔물결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파도’라고 정의했다. 까치놀! 그냥 한 번 뇌어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우리말인가. 순간, 어렸을 적에 모래밭에서 바라보곤 했던 새하얀 파도 떼가 바로 이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파도의 몸짓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였고 내 몸 구석구석 어디에선가 야릇한 힘을 생기게 하는 무수한 신호들이었다고.
문제는 지금 우리의 국어사전이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전을 들춰보면 ‘바다 수평선에서 석양을 받아 번득거리는 빛’이라고 까치놀을 풀이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 이를 바로 잡아 제자리로 앉히는 일이 숙제라는 말씀에 권위 있는 국어학자의 고뇌가 읽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까치놀로 글 한 편을 쓰겠습니다.”였다. 엉겁결에 약속 하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낼 거라는 결기에서였지 싶다.
서너 해가 흐른 후에도 실행에 옮기질 못했다. 그때 기대하겠노라는 대답을 주셨던 걸 생각하면 분명 면목 없는 짓이다. 교수님은 아마도 고향의 실없는 문인이 엉겁결에 뱉은 말일 거라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자주 드리던 메일도 휴무 중. 대략 난감이다.
동해안 가까이에 사는 터라 바다를 자주 본다. 그럴 때면 으레 밀린 숙제를 풀듯 해수면을 주시하지만 무심한 바다는 너울로만 일렁일 뿐이었다.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뒤척이길 좋아하던 바다는 멍석을 깔아놓아도 감감 무소식. 해수면은 잔잔할 때가 더 많아 호수를 방불케 했다. 바다로 쓸려나간 모래를 퍼 올려 모래밭에 붓는 준설작업으로 수심이 깊어진 탓이란다.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싶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은 어떡하고? 가슴 속 앙금을 털어내려면 바다는 몸부림을 쳐야 하거늘. 희한하게도 억지 심사를 품기가 몇 번이던가. 고의로 약속을 방기(放棄)한 위인이 되지 않으려 주문진 본가를 드나들 적이면 훤한 도로를 두고 해안도로를 택하곤 했다. 주인공의 출현을 기대하며 말이다. 어쩌다 희끗한 파도를 볼 때가 있어 긴장하다보면 그조차도 머리카락 날리는 정도였으니….
예정에 없던 외출에서 횡재를 한 날이니 흥분할 수밖에 없다. 달뜬 기분일수록 차분해져야 하리. 과테말라 두 잔을 시켜놓고 동행에게 까치놀 일장 설을 늘어놓는다. 선배의 심중을 알아챘는지 맞장구를 쳐주는 후배가 고맙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알게 된 감격의 날이라고. 자기도 이처럼 기쁠 수가 없다고 한다.
눈앞의 경포 바다는 여전히 경쾌한 무도회를 연출 중이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왔으니 눈요기 실컷 하고 가라는 뜻이겠지. 미풍에 춤을 추는 까치놀이 늙은 여인네 가슴을 헤집고 들어온다. 진한 커피 맛이 그야말로 엄지 척!
바닷가로 나와 모래밭에 선다. 기다려준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신명난 난타를 연주하는 바다가 이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 먼 바다에서 떼를 지어 달려오는 까치놀이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의 손짓인 것만 같다. 핑그르 눈물이 돈다. 시조 두 수를 메모해 둔다.
봄 바다 마중 길에 까치놀이 이는 구려
해원海原이 펼쳐내는 수만 필의 준마 행렬
흰 갈기 흩날리면서 아름다이 오시네
봄기별 안고 오는 눈부신 춤사윈가
청치마 흰 적삼에 손수건 흔들면서
고운 님 얼싸 안으러 덩실덩실 오시네 졸시 <까치놀> 전문
이걸로 교수님과의 약속이 지켜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의 조우를 염원하며 손짓하는 바다에서 돌아선다. 오늘의 감사를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들에게 바치고 싶다.
⚫『한국산문』 20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