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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몸과 해금

테오리아2 2013. 5. 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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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몸과 해금

 

 

 

 

 

                                                                                                                          김 훈

 

 

 

글을 쓸 때 내 마음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일어선 장단이 흘러가면서 나는  한 글자씩 원고지 칸을 메울 수 있다. 이 리듬감이 없이는 나는 글을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리듬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는 날들은 기약 없다. 그런 날 나는 때때로 술을 마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나간다.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면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도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24박자로 끝없이 늘어지고 퍼지면서 먼 것들을 불러들이고 가까운 것들을 쓰다듬어 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맥과 강물을 문장 속에 끌어들여 출렁거리게 하려면 진양조 리듬 위에 올라타야 한다. 올라타서 천천히 몸으로 바닥을 밀면서 나아가야 한다.

 진양조 문장을 서너 개 쓰고 나면 몸은 기진맥진해져 나자빠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진한 것들이 남아 있어 다시 솟아오르는 진양조 리듬에 올라타야 한다. 휘몰이는 날뛰고, 걷어차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진양조는 뱀처럼 땅을 밀면서 나아간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이다.

 해금은 놀라운 악기다. 해금의 음색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의 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국악기는 양악기에 비해 훨씬 더 진하게 연주자의 몸을 느끼게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금이 풍기는 육체의 질감은 가장 깊고 진하다. 해금의 음색이 매우 비논리적으로 들리는 까닭은 이 육체의 질감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진도에 놀러 갔다가 진도 단골들의 시나위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해금의 생김새는 볼품없다. 네 가닥 줄에 대나무 통이 전부다. 그러나 그 음역과 표현력은 놀랍다. 거칠게 꺾이고 휘면서 섬세한 것들을 아우른다. 진도에서 본 시나위 악사는 왼손으로 해금의 네 줄을 싸감아 쥐고 떡 주무르듯이 소리를 주물렀다. 소리를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다! 그래서 해금의 소리는 그 소리를 주무르는 인간의 몸의 소리처럼 들린다. 몸이 겪어내는 온갖 시간감과 몸속에서 솟고 또 잦는 리듬이 그의 손바닥으로 퍼지고 그 손바닥이 소리를 주물러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주무를 때, 그의 손바닥에 와 닿는 떨림은 다시 그의 생명 속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해금을 켜는 시나위 악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글이 해금의 소리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소리를 주무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가. 나는 해금 악사가 소리를 손바닥으로 반죽해 내듯이 내 문장을 주물러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글 힘이 모두 빠진 날 나는 해금연주를 듣는다. 작년에 해금 음반이 많이 나왔는데, 꼭 나를 위해서 만들어 준 음반 같다.

 

                                                               - 김훈 에세이 <바다의 기별>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 2008 중에서

 

 

 

 

 

 

                                                               에세이스트 김훈

 

 

 

                                                                                         -김훈의 <글과 몸과 해금>을 읽고 -

 

 

                                                                                                                                   최 민 자

 

 

 

그는 무사다. 검객이다. 뼈대와 잔가시와 근육의 결을 낱낱이 꿰고 있는 고수의 검법으로 풍경과 사물을 유려하게 저며 낸다. 피 한 방울 허투루 흩뿌리지 않고 날렵하게 살점을 떠내는 달인의 칼솜씨에 강호 무림들이 숨죽여 전율한다.

 

 

칼을 춤추고 노래하게 하는 게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는 전언은 마음만으로 검을 움직인다는 이기어검(以氣馭劍)의 전설보다 무리를 더 주눅 들게 한다. 진양조와 중모리, 휘모리장단이 때맞추어 솟구치고 잦아드는 육신을 가진 이는 얼마나 복된가. 서슬 푸른 산맥과 도저한 파도를 거느리고 서서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고 큰소리치는 이의 내공은 얼마나 깊은가.

 

 

연거푸 글을 읽었다. 군더더기 없는 초식, 허무의 바닥을 관통해온 바람처럼 비장하고 냉엄한 수사(修辭), 표피적 감상과 습한 살 냄새를 거부하는 마초적 위엄이 어디에서 어떻게 파생되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싶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기는’ 보법이나,  ‘먼 것들을 불러들이고 가까운 것들을 쓰다듬는’ 진법이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해도,  실존적 고투를 거치지 않은  중모리 문장이나 어슷비슷 변주해내는 허릅숭이 문사에게 복음이 될 만한 비책은 아니었다. 손바닥 깊숙이 몸의 질감을 주물러 내보내는 시나위악사처럼, 제각각의 생명 안에서, 살아온 시간 안에서, 샘솟고 무르익어 터져 나오는 것이 글의 리듬이요 가락인 것을.

 

 

‘한국 문학에 쏟아진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상찬은 앙상한 사료(史料)에 빛의 갑옷을 덧입혀내는 스타작가 김훈의 소설적 상상력에 대한 갈채만은 아닐 것이다. 엄정하고 준열한 문체, 섬세한 듯 개결한 문장, 칼의 광휘와 현의 떨림을 함께 품어 안은 그만의 문채(文彩)가 더더욱 빛을 발하는 곳은 <자전거 여행>이나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 같은 몇 권의 에세이집 안에서가 아닐까. 자전거레이서나 소설가도 좋지만 ‘에세이스트’ 김훈이 내겐 더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