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동냥 중
바람에 흔들리는 온갖 기화요초가 부처님의 춤사위라 합니다.
바람 한줄기도 붓다의 몸짓이라는 말씀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에서 왔다는 선시禪詩에 꽂혀 법당 구석자리에서 듣는 귀동냥이 실로 가경입니다. 안개 속이듯 헤매면서도 막힘이 없는 경계, 그 시적 영감이 환희로, 거센 물살처럼 덮쳐오기도 합니다. 나완 상관없다고 여겨왔던 곳. 옳은 불자도 아니면서 법문자리에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참말 희한한 일입니다.
그러잖아도 어인 일로 절간 출입이 잦아졌냐는 군소리가 따갑습니다. 생전 않던 짓이니 무슨 사단이라도 났나 싶어 남정네의 심사가 말이 아닐 겁니다. 이 나이에 온 반쪽의 심사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아둔함이라니. 매양 그러니까요. 세월에 쌓인 더께로 마음 가누는 일이 쉽잖아 대충 하는 귀동냥으론 어림없지 싶군요. 어쩌다 나선 걸음이 그만 내친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절집과는 친하지 못했습니다.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이 무서워 절문 들어서기가 적잖이 무서웠지요. 요란스런 단청에도 쉽사리 정이 가지 않았고요. 그야말로 사찰과는 멀찌감치 비켜있었던 셈입니다. 기도며 불사佛事에 목숨 바치듯 열심인 불자들 모습은 제게 생경스런 민화民畵처럼 비쳐졌답니다. 짙은 색조로 칠해진 원색 위주의 그림말입니다.
청정도량을 지켜보는 자리에 나무 한 그루로 서는 게 소원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내세에도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자가 되겠노라는 한 선배 역시 ‘산부처’라 이르지요. 글감을 얻어 보라는 부추김이 끈질겨 끝내 마다할 수가 없었네요. 호락호락 않는 후배 맘 후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후배 바람잡이(?) 노릇 참 무던히도 했습지요. 어느 날 나서게 된 암자 행. 콧수건 달고 엄마를 따라나서던 입학식 날처럼 흡사 그랬습니다.
학승이 계시다는 도량은 어찌나 소박하던지. 유월 초입, 초록의 가람을 흔드는 풍경소리는 또 얼마나 맑았는지요. 청량함으로 따지자면 주지승의 혜안이 더 맑게 읽혔지 싶습니다. 조촐한 모양새로 앉은 암자에 안기는 순간 모두를 날려 보냈습니다. 천연덕스레 스님께 귀동냥을 청했었지요. 야릇하게도 돌아오는 길이 기뻤습니다. 한국불교계를 떠나겠다고 한 푸른 눈 스님에게 격하게 공감했던 여인네가 말입니다.
불가의 이름을 갖지 않아 예불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섞입니다. 법석 한 귀퉁이에 자릴 얻고 나면 귀동냥 주머니에 스님의 법어가 담깁니다. 선시에 취할 때는 무릉도원이다가도 어쩌다 천근의 무게로 실릴 땐 도리 없이 휘청거리지요. 남루한 삶의 궤적 때문이거나 좁쌀 뒤웅박만한 제 그릇 탓이기도 할 겁니다.
세속의 객을 가상히 여기신 걸까요. 스님이 이따금씩 물으시지요. 선방 근처라곤 못 가본 대답이 신통할 리 없습니다. 동문서답이 부끄러워 얼굴 붉히다가 아득해 하다가, 그러다가도 다가가 보면 빙긋거릴 때가 있더이다. 죽을 만큼 힘든 비감도, 고뇌도 순리로 새겨야 함을 어렴풋이 알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사람이 곧 부처인 것이고 이 세상 어디든 도량 아닌 곳이 없다고 하시니까요. 깨달음의 주체는 바로 나, 내가 있는 자리는 어디든 도량이라는 것이지요. 나름으로 지키려 했던 신념의 일치가 늘그막에 든 아낙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헌데, 불명佛名을 받으라는 채근이 시작됐네요. 법문을 베푸는 선자仙者는 여여한 데 불자들의 성화가 더 난감합니다. 법명을 얻는다고 당장 무엇이 달라질는지. 동냥아치에게 적선을 베풀었으니 어서 갚으라는 얘기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살아있는 목숨 치고 동냥아치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중생만큼 이골이 난 동냥 꾼이 또 있을까요. 뱃구레 늘리는 데는 능사이면서 정작 마음동냥은 우습게 여기는 세상. 귀 기울여 들으면 바람소리 물소리, 하물며 목숨이 깃들지 못한 무정물無情物까지도 깨달음이거늘 귀에 대고 지르는 고함을 듣지 못한데서야. 이 세상이 귀만 막고 살지 않았어도 이 지경까진 오지는 않았을 테지요. 소귀에 경 읽듯이 흘려들은 죄악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모습들을 보기가 심히 민망스러운 시절을 살면서, 나 또한 노욕老慾을 부리고 사는 삶이 아닌가 싶어 옷깃을 여밉니다.
어설프긴 해도 마음그릇을 채우며 생각합니다. 귀동냥 알뜰히 쓸어 담아 마음 밭 다부지게 갈자고요. 굳은 땅 갈아엎기가 그리 쉽겠습니까만, 이왕이면 깊숙이 갈아엎어 보기 좋게 이랑도 지어야 하겠습니다. 법문 한 톨 귀한 보람으로 틔워 잘 키울 거구요. 비우고 내려놓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할 테죠.
열어젖힌 암자 법문자리에 초여름이 들어앉아 산 뻐꾸기 울음이 구성집니다. 바람도 한결 순하고요. 그러고 보면 너울거리는 초목들만 설법을 하는 게 아니군요. 이 헐거운 중생을 한없이 출렁거리게 한 오늘의 설법은 산 뻐꾸기와 순한 바람이 한몫씩 거들어 점입가경입니다.
귀동냥 중인 이 객도 무언가 오지게 거들고 나서야 할 참입니다.
⚫『한국산문』 20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