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구멍

테오리아2 2014. 5. 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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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이경은

바람 불어 좋은 날, 아르코 미술관에 갔다. 생태여성주의자라 불리며 여성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온 윤석남의 전시회는 70세의 노 여류화가의 열정적인 에너지의 응결체라는 점에서 끌렸다. 그녀 자신 여성으로서의 소수자의 삶을 살아온 경험 덕택에, 인간을 우선시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데 그 가치를 둔다는 게 내 발길을 이끌었다.

사실 나는 무슨 여성주의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데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다. 그냥 사람이면 됐지 여성이니 남성이니 구별하는 것 자체가 싫기도 하지만, 그 구호의 헛됨과 배반의 그림자에 마음을 잃은 적이 많아서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도드라지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때로 그 일부분의 삶이 전체를 소용돌이치게 만들기도 하고 헤어나지 못하게도 하지만, 그것이 '나'일 수는 없다. 나는 그런 저런 장식이나 구별 없이 당당하게 고스란히, 더도 덜도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이 삶을 살고 싶다. 아니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구별되지 않는, 구별이 없는…….

별반 기대 없이 전시회장을 들어섰다. 큐레이터가 설명을 해주겠다며 안내를 한다. 나는 뭐가 그려져 있으려나 하며 화랑의 코너를 무심히 돌았다.

순간, 막혔다. 내 숨이 그냥 콱 막혀버렸다.

개다. 오백여 마리의 개들이다. 내가 벽을 돌아 자기를 봐주기를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개들의 무리. 그 넓은 1층의 화랑이 ‘나무로 만든 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 개들은 모두 유기견들이다. 1층과 2층의 전시장에 등장한 개들은 모두 1,025 마리, 그들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앉거나 서 있었다. 어느 날 신문에서 버려진 개들을 모아 돌보는 한 할머니의 기사를 읽고 직접 찾아간 화가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은 개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버림을 받은 것은 주인을 잃거나 병든 개뿐만이 아니라 건강하고 예쁜 개들도 들어있었다. 동물을 사람과 같은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그저 즐거움을 위한, 놀다 귀찮으면 버리는 장난감으로 생각했다는 데에 평소 소수자와 약자에 마음을 두었던 그녀는 돌아와 나무를 자르고 개 모양으로 드로잉을 하며 나무 조각을 완성해 나갔다. 버려지고 비참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애도하고 기원하면서…….

구멍. 구멍이 나를 붙든다.

개들의 가슴 한 가운데마다 구멍이 훵하니 뚫어져 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 가슴속의 상처를, 화가는 예리한 칼날로 구멍을 야멸차게 뚫어 놓았다. 구멍을 뚫는 그녀의 손가락이 분명 아팠을 것이고, 아마 그녀의 가슴은 더 훵하니 뚫려 사람들의 비정함에 바람이 숭숭 들어왔을 것 같다.

목이 메더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참아보려 입을 꽉 다물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무서웠다. 나는 그들의 눈이 무서웠다. 슬프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조차 없는 그런 슬픔이, 슬픈 듯 애처로운 듯 사랑을 갈구하는 개들의 눈망울이 내 가슴에 와 박힌다. 어느 시인은 버려지는 것보다 잊혀지는 게 더 아프다 했지만 그 사이에 무슨 경중이 있으랴. 사람들의 손길과 기억 속에서 소멸된다는 자체가 바로 지극한 고통이고 슬픔일 바에야…….

버려진 개와 화가와 내 가슴이 아릿하게 하나로 이어진다. 세 개의 가슴에 뚫린 구멍사이로 긴 터널을 통과하는 회오리가 세차게 불어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바람을 맞는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지나간 시간 동안에 버려졌던 내 삶의 부분 부분들이 그 창을 연다. 닫아 두었던 창문 안에는 구멍이 뚫린 낡은 보따리들이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어느 시점에선가 분명히 단정하게 꿰매주어야 했을 것이지만, 구멍들은 너덜거리며 닳아진 채로 그대로 버려져 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렇게 구멍속의 어두운 상처들이 가슴을 후벼댄다. 나는 세월이 약이고 장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그저 말이었나 보다.

전시회에 오기 바로 전에 <피아노, 솔로> 라는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탈리아의 천재피아니스트 루카 플로레스(Luca Flores)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그린,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이다. 그는 8살까지 보낸 아프리카에서 어머니의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뒤 평생 트라우마를 겪는다. ‘재즈피아노계의 모차르트’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피아니스트의 눈길이 내내 아른거려 눈이 아팠었다. 오늘의 이 감정이입은 어쩌면 그 시점부터 준비되어 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오늘은 그런 날이다. 슬픈 일들이 가득하고, 슬픈 사람들이 유난히 곁에 가까이 느껴지는 날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날 나는 가슴에 구멍을 안고 서 있는 개들이 살아나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 그것은 단지 나무 조각이 아니다. 개들의 울음이 내 귀청을 흔들어대고,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상처가 가슴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화가는 그 전시회에서 버림받아 상처 받은 뭇 생명들을 위해 진한 살풀이를 한바탕 추더니, 구성진 진혼곡마저 불러주었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창을 닫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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