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향이 사랑이고 그리움인 까닭
- 『무화과가 익는 밤』(박금아)을 읽고
이문자
『무화과가 익는 밤』을 펼쳐듭니다.
작가의 글 밭에 무화과 향이 그윽하군요. 이랑마다 기쁨이고 감동입니다. 우리 모두의 사랑이고 그리움이기 때문이죠.
30년의 발효와 숙성을 거치며 끓어오르다 때론 사그라지기도 했을 작가의 꿈! 그건 무화과 향기로 익어온 애틋한 열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을 겁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밖으로 나온 작가에게 다가갈수록 홀리고 말았지요. 편편이 전율이고 그 바람에 막혔던 혈류가 뚫려 행복한 독자가 되었습니다. 작품에 쏟아내는 토혈이 뭉근한 체취를 내어 글맛이 가경이라고들 합니다. 신비를 입힌 드라마이듯 작가의 붓끝이 마술을 부리네요. 기막힌 마술 말이죠.
남쪽 바다 작은 섬! 무시로 시선이 머물렀던 바다는 솟구치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며 무던히도 섬 아이를 담금질했을 테지요. 고향 ‘신섬’을 원 없이 쏘다녔던 푸른 영혼! 감수성이 유별했을 여자아이는 ‘섬 살이’에 신명이 나 온몸에서 돋은 감성의 촉수로 뭍을 꿈꾸었을 겁니다. 고향 남도가 작가의 혼을 불 지르는 젖줄이 될 줄이야! 청정바다의 정령이 그녀의 유년을 그대로 둘리가 없음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머니를 찾는다고 합니다. ‘글 길’의 바탕이 되어준 대상으로 어머니를 첫손가락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근원이 어머니라고 했으니까요.
어부의 여식으로 태어나 엄마 젖에서 일찍 멀어졌던 섬 아기는 엄마 대신 증조할머니의 빈 젖을 물곤 했다죠. 어려서부터 젖이 고파 헛헛증을 앓았고 ‘태생적인 허기’와 갈증으로 울음투성이 여아였다고 합니다. 동생이 태어나 외가, 친가를 오가며 지내느라 ‘말 구루마 집’ 딸 향란이가 제일 부럽던 처지였으니 그 외로움이 짐작이 되고도 남을 일입니다.
친구네에서 밤늦게 놀다 잠자러 갈 때가 되면 발길이 무화과나무 아래로 향하더랍니다. 달빛 속에서 ‘아그데아그데’ 열린 무화과는 올려다보기만 해도 “어무이예에!” 소리가 절로 나왔다지 뭡니까. 간절함이 오죽했으면 무화과 열매에서 뚝뚝 젖이 떨어졌을까요.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보지만 젓 내 나는 과일은 야속하게도 한 번도 손에 잡히지 않았으니… 나무 아래는 섬 식구들이 모여 사는 집이었고, 농익은 무화과 향은 엄마의 ‘흥건한 젖물’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작가의 어머니는 친구네 무화과처럼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어둑한 빈방에 누우면 달빛 속에서 들리던 울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자다가도 깨어나 훌쩍거릴 때가 많았고요. 어미를 향한 어린 말의 울음소리, 철새들 날갯짓 소리, 야옹이에 놀라 달아나는 쥐들까지도 자신을 닮은 울음이었을 것입니다.
나이보다 일찍 철들어버린 아이는 어머니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삼키며 스스로 주문을 걸기도 했습니다. 착한 아이가 되어 칭찬을 들어야겠다는 자기 최면이었습니다. 허나 가족의 아픔과 기쁨이 내 것이 되지 못해 형제들이 기억하는 일들이 작가에겐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났으면서 유년을 공유하지 못함은 오래오래 서러움으로 남기 마련입니다. 책장을 넘기며 작가의 상념에 갇히다 보면 나도 별수 없이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혈연을 불러놓고 가슴 아린 상면을 하곤 합니다. 소용없는 짓인 것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지 않던가요? 오십여 년이 지나 고향 시장을 둘러보던 중, ‘향란 할매’가 안겨준 무화과에 작가의 아린 날들이 소환되었습니다. 쉰 해를 묵혀온 아픔이 눈물로 도질 수밖에요. 어머닌 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울음보였던 딸아이는 어린 것을 품에서 내쳐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을 처음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속울음을 참아가며 애어른으로 자라야 했던 자식의 눈물은 어머니에게 형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설움을 용케 알아채는 어머니가 훌륭하게 여겨집니다. 작가를 키운 어머니였으니까요. 울음이란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는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 작가의 속내를 너무나 잘 아는 터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유년의 갈피에 접혀있던 기억들이 소물소물 기어 나올 때가 있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아픔에 책 속의 주인공이 내 안의 아이를 불러들이기 때문이겠죠. 둘은 서로 말을 걸다가 맞장구를 치다가 실랑이도 벌입니다. 나도 그랬어.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을까, 라며… 그게 저자와 독자 사이를 오가는 공감이고 의기투합일 테죠.
작가의 글 「달팽이의 꿈」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천형 같은 껍질을 뚫고 나온 작가의 첫 외출이 눈부셔 보였습니다. 어설픈 달팽이의 꿈이 아니라 앞으론 무소불위로 질주하는 꿈이기를 바랐죠.
느린 걸음으로 기는 나란 달팽이도 있는데 등에 진 짐을 벗어날 때가 있을까 의문이었지요. “자신의 발목을 잡고 불화한 시간과 드잡이했다.”는 작가의 고백을 믿기로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던 그 애틋했던 순간이 그리움이고 진실한 사랑이었음도 말입니다.
오늘 밤, 작가의 컴퓨터 화면에선 주렁주렁 무화과가 열려 향기를 발할 날을 기다릴 테지요. 안으로만 끌어안았던 자신의 성(城)을 맛깔난 우리말로 버무려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통 큰 역사(役事)에 독자들이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억척이 자신을 서자에서 바다의 적자로 만들었듯 그 아버지의 딸이야말로 수필 문단의 적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수상 소감
영혼을 적셔준 글 샘
쓰는 일이 좋아서 들어선 길이었지요.
푸르던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지만 그리움투성이로 견디기엔 명징한 정신이었으니 무작정 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습니다.
헤세가 그랬다죠. “인간이 영혼을 바쳐 창조한 세계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책의 세계”라고요. 노을 녘을 글로 써가면서 제게도 영혼을 적셔주는 ‘글 샘’이 있어야 했습니다. 쓰는 일에만 몰입하다 보면 심연의 고갈을 가져오기 십상이니 말입니다. 글로 표현된 가장 위대한 세계, 그게 바로 한국 문단을 살찌우는 작가님들 작품일 것입니다.
『한국수필』 매호를 받아들 때마다 선을 보인 신간들은 저마다 오묘한 빛깔과 향기를 발하는 윤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물비늘 정도가 아니라 글쟁이의 혼을 흔들어놓을 만큼 감동의 글 밭이었고 보고(寶庫)이기도 했죠. 박금아 작가의 『무화과가 익는 밤』을 독파해가는 동안 제 심연과 닮아있음을 알았습니다. 서너 살부터 무엇이 그리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저 역시 못 말리는 울보였다고 하니까요.
30년의 침묵을 견디며 속으로만 영글었을 작가의 속내가 발화되는 순간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비상이 아름다웠습니다. 마흔여덟 편 글이 옹골지지 않은 게 없어 제 사유도 풍성해졌음을 깨닫네요. 헤르만 헤세가 말한 것처럼 영혼을 바친 위대한 세계에서 행복한 유영을 할 수 있었기에 작가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한국수필 문학의 발전과 독서인구의 확장, 수필인구의 저변확대라는 기치를 걸고 ‘한국수필독서문학상’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한국수필가협회, 그리고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현자의 찬란한 사유 못지않게 자신의 영혼 세계를 오롯이 펼쳐내신 예순 분 작가님들께도 존경을 바칩니다.
이문자 약력
『수필문학』(2012), 『창작수필』(2016) 등단. 수필가, 시조시인, 동요작사가. 초등학교 교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창작수필문인협회 회원. 세계 어린이 해의 노래(1979), 총력안보의 해 노래(1984) 가사 당선. 불교문학 신인상(2019), 강원문학 작가상(2021).
저서: 『마흔 넉 줄 반의 마침표』(2007), 『그냥 흐르라 한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