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전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상
<2014년 한전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상>
닭장맨션
홍성순
거실불이 환하다. 누가 먼저 일어났을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밤늦게 컴퓨터를 하던 아이가 불을 켜두고 잠을 잔 모양이다. 아침 밥상에 앉은 아이들을 보고 전기를 아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더니 잔소리로 듣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고시절, 나는 고향을 떠나 자취생활을 했다. 그 때 전기를 아껴 써야 한다고 유난히 나를 구박하던 할아버지가 불현 듯 떠오른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문풍지를 더욱 심하게 펄렁거렸다. 고향의 부모 형제 곁을 떠나 청운의 꿈을 품고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방 한 칸에 작은 부엌 하나 딸린 셋방을 얻어 친구와 생활을 했다. 살림살이라고 해야 고작 방안에는 책상과 공부에 필요한 책들, 부엌에는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몇 개의 밥그릇이 전부였다. 초라한 자취생의 생필품 이었다.
집 주인인 노부부는 여러 개의 방을 세놓아 그곳에서 얻은 수입으로 노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 이외에도 열 개가 넘는 다닥다닥 붙은 방에 많은 학생들이 기거를 했다. 우리는 그곳을 닭장맨션이라 불렀다. 닭장맨션이란 방 하나에 부엌하나 딸린 집에 여럿사람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곳을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 가운데에 서 있는 수돗물 앞에서 대야를 들고 줄을 서서 참을성을 길러야했고 화장실 앞에서도 줄을 서서 생리적인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늦잠을 자는 날에는 수돗물이며, 화장실 사용이 불편하여 기본적인 생활마저 힘든 상황이었다. 불편한 것은 그것뿐만 아니라 전깃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자취생들은 거의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전깃불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수돗물에 버금가는 생활권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밤늦게 전깃불을 켜 놓는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여서 절약 캠페인을 많이 했다. 수돗물 줄이기, 한 등 줄이기 운동 등 아끼지 않고는 살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전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루에 걸린 기둥 시계가 열두 번을 울렸다. 어김없이 마당에 나온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는 소등을 하라는 신호였다. 그 헛기침 소리는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하고픈 공부마저 마음 놓고 할 수 없게 만들어 원망스럽기도 했다. 전기세 수도세 걱정 없이 살던 부모 곁이 그리워 눈물을 흘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마음에 할아버지가 무척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방을 옮긴다 해도 남의 집 생활이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전깃불 감시는 날이 갈수록 심했다. 친구와 나는 불을 켜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했다. 생각 끝에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방문 양쪽에 못을 박고 두꺼운 솜이불을 매달아 커튼처럼 늘어뜨리는 방법이었다. 발명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두 사람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철물점에서 대못 두개를 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주인이 외출을 해야 하는데 연세가 많은 분들이라 외출이 잦지 않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휴일 날이었다. 외출을 나가시는 할아버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대못을 방문 양쪽에 박고 모서리에 끈을 묶어 이불커튼을 만들었다. 솜이불이어서 인지 창밖에서 살펴보니 전혀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성공이었다. 그 날부터 우리는 전깃불의 애로점을 잊은 채 마음 놓고 책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한 달이 지나고 전기세를 거두는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불평을 쏟아냈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할아버지는 그날 이후 이 방 저 방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것은 무척 불편한 일이었지만 공부를 하려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모른 척하고 전기를 사용했다.
어느 날, 우리 방문을 연 할아버지는 이불 커튼을 젖히고 일방적인 선언을 하셨다. 노발대발 하며 방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전기세를 더 드린다고 사정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일 년을 더 그 집에서 살았다.
사람들에게 집 없는 서러움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주인 딸아이와 자신의 어린 딸이 싸운 이야기며, 공동으로 나온 전기세와 수도세를 주인은 내지 않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마다 집 떠나 사는 서러움에 슬펐고 부모님 곁이 얼마나 좋은지 느끼게 되었다. 나의 서러움 중에는 전깃불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점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절약하는 습관을 기른 계기가 되었다.
가끔 아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이해 못하겠다는 듯, 아이들은 두 눈은 멀뚱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우린 꿈을 잃지 않고 오뚝이처럼 열심히 살아왔다. 그 때 마음껏 공부를 못한 탓인지 나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밤새 켜 놓은 전깃불을 보니 닭장 맨션 생각이 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인할아버지의 전깃불 단속이 나에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는 불편하고 힘들고 원망스러웠지만 잘 참고 견뎌왔기에 나는 수돗물 한 방울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아마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전기 한등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을 것이다. 그 때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고 원망스러웠던 닭장맨션.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나는 가끔 그곳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