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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 살이, 이만하면/이문자 수필가

테오리아2 2022. 1. 4.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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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 살이, 이만하면

 

 

 

좀비 바이러스에 세상이 요상하게 돌아간다. 우리 인간이 이리도 무능했던가. 활개를 젓고 다녀야 할 바깥세상을 반납하고 사는 지 한 해가 다 되어간다. 입마개를 해야만 문 앞이라도 나설 수 있으니 너나없이 누렇게 뜬 외계인이다. 립스틱을 발라본 지가 언제 적이던가. 젊은이들 상큼한 웃음을 본지도 까마득하다.

몇 발짝만 나서면 쉼터이건만 나뭇잎 모두 져버리고 삭막해지고 나면 도리 없이 갇히고 말 터이다. 숨 쉬는 일조차 버거운 시절을 사는 운명. 무채색 난국에서 탈출하려면 무엇이든 방편 하나쯤은 지니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아파트 살림을 시작하면서 늘 눈에 밟히던 것이 본가에 두고 온 빗자루 국화였다. 아름드리 포기를 따라 줄기 가득 꽃 덤불을 이루는 이 야생화로 얼마나 근사한 가을을 보냈었는지. 귀족 태가 완연한 고가 화훼류가 아무리 걸출한들 무슨 소용? 바지런하지 못한 주인 탓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내쳐야 할 땐 공연히 심란하기만 했다. 죄 없는 목숨들이 오죽이나 서러웠으랴.

그러노라니 내 집 베란다엔 손쉬운 야생분이 하나둘 들어앉게 됐다. 통풍과 일조량 만 신경 써주면 이 식솔들만큼 살가운 반려는 없지 싶다. 요즘 같은 집콕 살이엔 기울이는 사랑만큼 응답도 잘 하니 말이다. 본가 담장에서 걷어 온 기왓장에 푸릇푸릇한 이끼도 한 몫 한다. 때론 이 틈바구니에서 이름 모를 잡풀이라도 빠끔 고갤 내밀면 희한하게도 늘그막의 감성을 훔쳐간다.

겨울나기 무섭게 여기저기 움돋이가 시작되면 환희로운 눈 맞춤에 나이를 잔뜩 얹고도 싱싱해지는 꿈을 꾼다. 작은 하나에 불과한 싹에서 봄 동산을 통째로 얻은 기쁨이랄까. 광대무변의 대자연에서든 손톱만한 새 생명이든 신비롭기는 마찬가지. 코로나 악령에 흙을 밟지 못하고 사는 아파트 살림이어도 견딜만하다.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악질 바이러스도 수그러들 거라더니 그 예상도 빗나가고 말았다. 초 여름날, 구석에 밀쳐놓았던 소형 연못에 물풀이라도 채워보려는 심산으로 꽃집을 찾은 날. 빈손으로 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웠던 여인이 있었다. 노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작은 얼굴. “이거 같이 키워요! 물에서도 잘 크거든요.” 워터코인이 수북한 수반을 내밀며 생면부지의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이다. 그녀가 분명 같이라고 했었다. 놀라움과 반가움 반반에 덥석 그녀를 안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 그처럼 가슴이 벌렁거릴 줄이야.

유방암 수술 후 회복기에 있다는 환자에게서 멀쩡한 사람이 위로를 받은 셈이다. 그야말로 주객의 전도가 아닌가. 분양받은 작은 분을 안고 돌아오며 정말이지 꿈을 꾸는 기분! 고이 잘 길러 그녀와의 해후를 성사시키리라는 다짐에 마음은 하늘을 붕 날았었다. 그녀의 안부이듯 물동전이 동글동글 잎사귀를 올리며 이 가을에도 여전히 싱그럽다. 여름철 내내 그린 에리어 구실을 톡톡히 해냈으니 분명 그 여인의 예후도 좋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늘이든 양지든 주인장 의도에 따라주는 순둥이요, 꽃말 그대로 윤기 자르르 풍요롭기 그지없는 효자동이가 아닌가. 집콕 살이 여러 달을 이렇게 함께 해 오다니 정인(情人)이 따로 없지 싶다.

 

주인장에게 계절을 잊지 않고 보답해주는 초화분이 갸륵하기만 하다. 다가올 겨울을 제대로 날 수 있을지 분 하나하나를 살핀다. , 여름, 가을을 젖 먹은 힘까지 소진했으니 지칠 법도 할 터인즉. 곧 분속으로 숨어들어 당분간 안녕을 고할 테지만, 작은 풀꽃 한살이가 동행이 돼주는 것 같아 애틋하고 고맙다.

가을 내내 보랏빛 꽃송이를 달고 있는 용담이 기특하다. 분속에서 싹을 내밀 땐 잎이라도 넉넉히 피워주길 바랬는데 벙긋벙긋 꽃의 절정까지 보여주었으니 영락없는 내 새끼다. 지독한 집콕의 나날을 저 가녀린 녀석들 눈짓, 몸짓으로 견디었으니 이보다 나은 반려자는 없을 터이다. 푸른 한철 갖은 재롱을 떨다가 저들도 제 갈 길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겨울 숲도 동장군을 이겨야 기운찬 봄을 열듯 때 되면 워터코인도 밑동만 남기고 잘라야 할까 보다. 겨울을 나면 날을 잡아 그녀를 만나리라. 꽃집에서 전해 듣는 회복 소식만으론 성이 차지 않기에그렁그렁 사랑이 담긴 눈으로 잘 이겨냈다고, 고마웠다고 전보다 더 힘껏 포옹하고 싶다.

집콕살이동안 가슴에 묵혔던 절절한 그리움들,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이 사랑으로 발효되어 아낌없이 퍼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산림문학2021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