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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수필의 맛

테오리아2 2012. 7. 2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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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맛

정 재호

  송엽차를 만들기 위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같은 물을 끓여도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시는 작설차(雀舌茶) 통속 소설은 커피, 수필은 송엽(松葉茶)차다.

작설차는 쓴맛이 약간 나면서 입안에 향내가 배어들기 때문에 속된 혀로는 가려내기 어려운 선미(仙味)가 감돈다. 차 그릇도 조선백자나 고려청자쯤이 어울리지, 범속한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나는 십년 전 파계사에서 작설차를 처음 마셔 보았고 다도(茶道)에 대해서도 조금 배웠다. 성우스님이 손수 따루어 주는 찻잔을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한 모금씩 몇 번을 음미해 봤으나 그 맛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차 맛을 알려면 십년쯤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진리인 것만 같았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십년이 넘게 시를 읽고 쓰고 해봤지만 시의 참맛은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

이에 비하면 커피는 대중적이다. 한두 번만 마셔보면 맛을 알게 된다.

  그릇도 가릴 필요가 없다.  야전용 물컵도 좋고 유리잔에 받아 마셔도 좋고 혼자 마셔도 좋고 연인과 다정히 마셔도 좋다. 격식이나 장소도 가릴 필요없이 누구에게나 쾌감을 준다.

  통속소설은 커피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학식이 높고 낮음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 연령이나 성별의 제한도 없이 흥미와 말초신경만 자극해 주면 그만이다. 작가의 인생관이나 고도의 예술성 따위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통속소설은 아기자기한 재미만 있으면 읽히듯이 커피도 일시적인 쾌감만 주면 되는 것이지, 약간의 부작용은 그 다음의 문제다. 커피에 비하면 송엽차는 담담한 맛이다. 설탕을 넣지만 달지 않고 솔잎을 넣어도 떫지 않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맛본 뒤에야 그 맛을 느낄 수가 있지 젊은이나 풋내기는 그 맛의 오묘함을 모른다.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다. 설익은 설교나 어설픈 철학으로는 수필의 참맛이 나니 않는다.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결이 삭은 뒤에 우러난 수기에서만 훌륭한 수필은 샘솟는다.

  시나 소설은 젊고 신선한 감성으로 쓸 수 있지만 수필은 봄과 여름을 지난 뒤의 가을 쯤 된 연륜에 들어서야만 무게와 깊이를 더한다.

  수필에도 색깔이 있다면 가을하늘빛이다. 티끌 한점에도 얼룩이 지는 맑은 표정에서 높은 정신세계를 느낀다. 수필은 지식이나 기교로 쓴 잡다한 산문이 아니고 관조의 눈으로 본 것을 철학의 체로 걸러낸 산문으로 쓴 시다.

  수필에서는 모과 향내가 나야 한다. 모과를 방에 놓아 두면 책에서도 옷에서도 그윽한 향내가 나듯이 수필속에는 사색의 맑은 향기가 배어 있어야하고 고고(孤高)하면서도 담박(淡朴)한 맛이 스며있어야 한다.

송엽차에서는 은근한 향내가 난다. 물을 끓여서 식힌 후 솔잎을 따다가 깨끗이 씻어 넣고 설탕을 조금 뿌린 다음, 밀봉한 채 응달에 두었다가 일주일 쯤 뒤에 개봉하면 송엽차가 된다.

  물과 솔잎과 설탕이 녹아서 차가 되는 과정이 수필의 세계다. 지식과 체험과 직관(直觀)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향기높은 수필은 태어난다. 수필의 맛은 담담하지만 무미건조해서는 안 되며 시적 향취도 있어야 하지만 시처럼 난해해서도 안되며 소설같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속되어서는 안 되고 철 학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학성이 짙어서는 안 된다.

   송엽차는 솔잎의 까칠한 지성과 무기교의 맛과 쾌감을 주는 설탕이 녹아서 한 잔의 차로 승화된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만든 차는 어떤 것은 너무 달고, 어떤 것은 너무 떫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싱거웠다.

이제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맛을 알 것 같다. 단맛보다는 쓴맛이 쓴맛보다는 담담한 맛이 높은 경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설익은 차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백 잔이나 마구 끓여서 아는 이와 모르는 이들 앞에 내 놓았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나를 아끼는 이와 더불어 향기높은 송엽차를 한 잔 나누고 싶다. 그날이 언제인지 나도 모른다. 십년 후 아니 백년 후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솔잎을 따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