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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취(一炊) 선생 / 신현식

테오리아2 2018. 3. 2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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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취(一炊) 선생 / 신현식


 

 

동서는 현관문을 열어주며 반색을 한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거실에 혼자 있다가 음식을 차려온 아내와 나를 구세주인양 반긴다. 그런 큰 동서의 신세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동서는 몇 해 전에 처형을 먼저 보내고 홀아비가 되었다. 홀로 된 팔십대의 남자가 좋아 보일 리 있을까마는 동서의 경우는 여느 홀아비와는 또 다르다. 그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문제는 딸이 없다는 것이다. 딸이 있었으면 그나마 아버지를 요모조모 챙길 것이다. 몰론 살림을 내어 놓은 며느리들이 있지만 어디 딸만이야 하겠는가. 곁에 아내나 딸처럼 곡진히 받들 사람이 없어 더 안 되어 보이는 것이다.

남자가 혼자되면 불편한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것저것 문제가 불거지지만 가장 난감한 것이 삼시세끼 해결하는 일이다. 처형이 가고 나자 그도 처음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것을 레인지에 데워서 해결을 했다. 그것도 오랜 동안 훈련을 거친 후였다. 따신 밥 자시다가 그것이 어디 입에 맞겠는가.

그나마 다리에 힘이 있을 때엔 하루 한 끼 정도는 외식을 했다. 그러나 힘이 쇠하니 늘 집에만 앉아 있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당신께서 자시고 싶은 것 해 보면 될 것을 젊어서부터 부엌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사도우미에게 요구라도 하면 좋으련만 구두쇠가 되어 그것마저 하지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가 어찌 동서만의 일인가. 모임에 가면 친구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내가 먼 곳 다니러 가거나 탈이라도 나면 자신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친구가 대부분이다. 어떤 친구는 냉장고에 있는 것도 꺼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마나 밥이라도 데워 먹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다행이다. 이런 형편이니 밥 짓는 것을 어찌 바라겠는가.

남자들은 왜 자기가 먹는 밥하나 해결하지 못할까.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도 지금껏 척척 해왔는데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다 같은 동물인데 먹을 것을 차려주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 밖에 없다. 동물들을 보아도 암컷이 수컷의 먹이를 차려주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우리 인간만이 아내가 차려주어야만 먹고 있으니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들이 밥을 짓지 못하게도 되어 있다. 어렸을 적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때문이리라.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 했던 풍습이 남자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죽하면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이 떨어진다고 했을까.

세간에는 영식님, 일식씨, 이식군, 삼식놈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아내가 하루에 몇 끼를 차려주느냐에 따라 이렇게 별호가 달라진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이런 유행어가 생겨났을까.

밥 짓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세를 부리느냐며 화를 내는 남자들도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밥을 한다면 실증도 날 것이다. 옛 여인네들이야 일찌감치 며느리를 보았다. 빠르면 40, 늦다 해도 50에는 부지깽이와 밥주걱을 며느리에게 인계해 주었다. 그런데 요즘은 만혼에다 살림까지 내놓다보니 끝도 없이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 하니 종신근무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밥 짓는 것이 지긋지긋하지 않겠는가.

남자들도 직장에 수십 년 근무를 하게 되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 지긋지긋한 직장의 일도 퇴직을 하게 되면 끝이 나고야 만다. 그런데 아내들의 상차림은 끝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네들도 남자들처럼 지긋지긋한 삼시세끼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왜 없겠는가.

아내들 속사정이 그러하니 눈칫밥 먹지 않으려면 남자들도 하나둘 배워두어야 하겠다. 어느 책에서 보니 남자가 삼 밥, 삼 국, 삼 찬은 할 줄 알아야 홀로서기가 된다고 했다. 그런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아무것도 할 줄 몰라 허둥대는 동서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차려주는 밥상만 받았지만 어깨너머로 보아둔 것이 있어 밥은 할 줄 안다. 그러나 국을 끓이거나 찬을 만들어 본적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하나하나 해보아야겠다. 학원까지 갈 필요야 있겠는가. 어지간한 것은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엔 새삼스러울 것이고 맛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하다보면 솜씨가 늘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모른다. 동서처럼 불편하고 안쓰러운 노후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미리 배워 두어야겠다. 또 아내로부터 씨, , 놈이란 상스런 소리를 들으며 어찌 살겠는가. 최소한 하루 한번 만이라도 밥을 지어 그럴듯한 별호를 얻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