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변했다
아내가 변했다 / 송연희
올해운수가 길하다고 했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기로 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성경말씀이다. 세상만사가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도 정말 진리다.
길한 기운이 따뜻한 봄날 핸드폰 속으로 들어왔다. 지난해 봄, 반 칠십이나 되어 장가 든 아들이, 금방 태어나 물기도 채 닦지 않은 손자의 사진을 전송해 온 것이다. 아내는 출산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을 핸드폰으로 들여다보며 감동 먹은 얼굴이다. 내내 집안을 깔깔거리며 다닌다. 할머니 된 것이 저렇게 좋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다.
육남매의 막내인 나는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다. 장손인 큰 조카는 딸만 둘 낳고 단산을 했다. 둘째 형님 댁은 두 아들이 있지만 장가를 늦게 들어 아직 아이가 없다. 결국 막내인 내게서 난 자식이 대를 이었으니 돌아간 부모님께는 첫 증손자가 태어난 셈이다. 요즘 세상에 손(孫)을 잇는다는 게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겠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손자 놈이 태어났다는 순간에 가장 먼저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좋은 일은 곰비임비 찾아온다고 한다. 오월에 막내딸이 몇 년간 교제해 온 청년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동안 정식으로 인사는 없었지만 얘기는 들었던 터다. 둘 다 직장이 서울에 있다 보니 내려온 김에 부모님끼리 상견례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요즘 자식들의 혼사로 속을 끓이는 친구들이 많다. 늦은 혼사야 사회적인 추세라 해도, 결혼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니 천불이 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삼남매는 부모 속을 썪이지 않고 짝을 구해 온 셈이다. 아내는 자식들 혼사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 모아 놓은 돈도 없는데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다는 조건이 있다. ‘사위가 장인만 닮지 않으면 된다.’ 이 무슨 씨도 먹히지 않는 잣대인가. 사위가 내 속으로 난 자식도 아닌데 왜 나를 닮아? 그리고 남자가 술 좀 마시는 게 어디 흉인가.
나이가 무섭다는 말을 실감한다.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 전에는 눈만 크게 떠도 꼬리를 내리던 아내가 지금은 곧잘 기어오른다. 조금만 싫은 소릴 하면 대꾸도 않는다. 상견례만큼 어색한 자리가 또 있으랴. 바깥사돈끼리 술이라도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해야 덜 쑥스러울 텐데, 부자(父子)가 다 술을 못한다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술도 못 마시는 사람하고는 사돈 안할 라요’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없고, 아내는 와인을 홀짝거리며 눈웃음을 짓고 앉아 있다.
시월 초에 아내는 사흘 말미하고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손자가 얼마나 컸는지 보고, 큰 딸 집에도 가보고, 무엇보다도 막내가 신혼살림을 할 아파트도 둘러보고 온다는 것이다. 첨부터 아내는 혼자 가기로 작정해 놓고는 건성으로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토요일로 예약된 대장내시경 검사를 핑계로 집에 있겠다고 했다. 아내 없는 황금연휴를 느긋이 즐겨 볼 참이다. 나이든 남자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걸 아내는 모르는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니 대장에서 용종을 세 개씩이나 떼어냈다고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상당히 큰 놈이었고, 그 자리에서 피가 나닌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한다. 검사만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환자복을 입는 신세가 되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을 먹는 중이라고 한다. 남편은 끼니도 굶고 입원해 있는데, 밥 먹었냐는 말도 없이 자식들이랑 즐겁게 식사 중인지 주변 소리가 시끄럽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아내에게 말을 해야 할 지 망설이다가 어정쩡하니 전화를 끊는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온다.
누워 있으려니 잠이 오지 않는다. 그동안 병원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 병원은 유독 암환자가 많다. 늘 지나다니긴 했지만 이곳에 입원을 할 줄은 몰랐다. 겉보기엔 작은 병원인데 병상마다 환자들이 많다. 아내의 잔소리가 떠오른다. ‘당신은 담배도 너무 많이 피우고 술도 과하다. 고기도 너무 즐긴다. 건강을 생각할 나이다. 병들면 절대로 시중 같은 거 들어주지 않을 거다. 그동안 애먹인 게 얼만에 늙어 병수발까지 할 거냐’고 했다.
아내에게 용종 이야기를 했더니 별거 아니라는 반응이다. 깜짝 놀랄 줄 알았더니 덤덤이다. 오히려 말하는 내가 머쓱하다. 아내가 보험증권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용종 제거를 했으니 수술비가 얼마나 나오려나’ 한다. 갑자기 아내가 무섭다. 내가 죽으면 ‘이제 사망 보험금이나 찾으러 가야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일주일 쯤 지난 날 담당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원하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아내가 말한 ‘입퇴원확인서’를 발급 받으러 갈 참이었다.
“제거한 용종을 검사했더니 암세포가 발견 되었습니다.”
“예?, 그럼 제가 암이란 말입니까?”
전혀 예기치 않은 의사의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멍했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슴 속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힘들게 얘기하는데 아내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 실실 웃기까지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던 아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암은 발견시점이 중요하다. 초기 암은 걱정할 거 없다. 그리고 당신은 암환자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라, 나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막내 결혼식하고 수술 받되, 아이들은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나는 뒤퉁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 얘길 듣고 징징거리며 울고불고, 자식들한테 전화부터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순전히 오산이었다 아내가 저렇게 무서운 여자였나. 속도 없는 무지렁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지 않은가. 어이가 없어 도리어 내가 피식 웃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아내가 든든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아내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당신은 왜 그렇게 운이 좋은 거야!”
―― [동리목월](2011.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