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스크랩] 115만추/허창옥

테오리아2 2012. 7. 2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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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허창옥


붉게 물든 숲과 빈들을 지났다. 단풍들어 풍성한 산과 비어서 오히려 넉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세 시간 남짓, 동네어귀에 내려서 사라져 가는 버스를 한동안 바라본다. 십여 년 만이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이 주춤거리게 해서 버스가 집 앞을 지나가는데도 미리 내렸다. 입 속에서 첫 마디를 해본다. 

마을은 조용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평화로움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 하다. 길이 포장된 것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다. 짙은 녹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철대문이 반쯤 열려 있다. 한낮, 집은 적막 속이다. 대문에서 툇마루까지 한 줄로 놓여있는 디딤돌을 천천히 밟는다. 

툇마루에 앉아서 마당을 둘러보니 장독대 곁에 배나무가 작은 주먹만한 돌배를 몇 개 까치밥처럼 달고 있다. 담장이 허술한 옆집은 비었는지 마당에 잡초와 검불더미가 그득하다. 무섭지나 않은지. 초인종 삼아 툇마루를 주먹으로 몇 차례 쿵쿵 쳐본다. 타월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면서 그가 집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 나온다. 첫 마디는 무슨, 그냥 말없이 껴안는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인 그리고 여덟 살 아래인 나는 말을 찾지 못한다.

나는 그를 언니라고 부른다. 혈연도 학연도 없는 그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수성못가의 어느 찻집이었다. 스무 해도 더 된 이야기다. 그 날 나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그 자리에 갔었다. 한쪽 폐의 상엽을 떼내는 수술을 받고 회복된 그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시간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나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대각선으로 맞은편 자리에 그가 나처럼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얼굴로. 어쩌면 저런 얼굴일까. 차를 다 마셨지만 나는 왠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가 무거운 동작으로 문을 밀고 나갔다. 조금 후에 나도 일어섰다. 

밖에 나오니 못가의 긴 의자에 그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머뭇머뭇 다가가서 긴 의자의 한쪽 끝에 슬며시 앉았다. 십 분쯤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저어......'하고 내가 운을 뗐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어제가 기일이었다고 했다. 남편과 그 찻집에 자주 왔었다는 말도 하였다. 서른 세 살의 여인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그 심경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나는 그의 모습과 저물 무렵의 못물과 가을 나무들이 자아내는 정취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매처럼 지냈다. 눈만 뜨면 자동차들이 보이는 이 도시가 죽도록 싫다하기에 시골로 가라고 그때마다 권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안 된다고 용케 버티더니 작은 아이 대학 보내면서 이사를 했다. 남편 산소가 그리 멀지 않은 마을로 옮긴 것이다. 그때 따라 왔었는데 그새 십 년이 흘렀다. 미안하다. 세월이란 게 사람을 잊게 만들고 바쁘다는 핑계가 늘 용서해 주었다.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이 무척 고단했던 이즈음 부쩍 그가 보고 싶었다. 그토록 비우기 어려웠던 하루란 시간을 거머쥐고 나는 길을 나섰다. 결국 내가 쓸쓸해서 그를 찾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영락없는 시골 아줌마다. 하지만 표정만은 정돈되고 기품 있어 보인다. 나 또한 그만한 시간의 흔적을 지녔겠지만 우리는 둘 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라고 인사치레를 한다. 

그곳에 가보자는 내 말에 '거기는 뭐 하러'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블라우스 바지 자켓, 단정하다. 대문 앞에 경운기 한 대가 멎더니 아지매요 건장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텃밭만큼이나 작은 규모의 농사를 도와주는 이웃 젊은이란다. 경운기 짐칸에 앉아서 흔들리며 마을을 빠져 나온다. 논밭 사이로 난 농로를 덜커덩거리며 지나고 과수원을 거쳐서 무밭 배추밭 잔해만 남은 고추밭을 지나니 산기슭이다. 산기슭에 내려서 오솔길로 접어든다. 길섶에는 칡덩굴이 널브러져 있고 노란 산국도 듬성듬성 보인다. 갈참나무 낙엽들을 밟으며 한참 걸어서 산소에 닿는다.

얼굴도 모르는 분의 유택, 한 여인의 젊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고집 세고 완고한 한 남자의 무덤 앞에서 나는 길게 목례를 한다. 그 분의 여인은 짐짓 무심한 얼굴로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몇 번이나 저런 모습으로 여기에 서 있었을까. 그를 두고 지순한 사랑이라든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여인이라든지 그런 진부한 평가는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아파서 싫고 그가 실제로 그러했을까 두려워서 싫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에게 가장 알맞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삶이 그를 평화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가치 있게 한 것이라 여기고 싶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는 깊고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한 생애를 참으로 잘 살아온 사람만이 그런 표정을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저만치 그가 앞 서 내려가고 있다. 구름 몇 점 떠있는 하늘은 높고 가을은 깊을 대로 깊었다. 





 
 
 
 

   
 
 
이름   허창옥  조회: 60    
 
제목   대화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45:09      
 
 
대 화/허창옥


비오는 날 앞산의 대덕사에 가면 참 좋아. 비 냄새 숲 냄새 땅 냄새에 젖어서 걸어가는 동안 마음에 낀 찌꺼기들이 깨끗이 씻겨 내리는 걸 느끼거든. 절 입구의 게시판에는 거의 언제나 좋은 글귀들이 붙어 있곤해. 며칠 전에는 글귀 중에서 '환희심(歡喜心)'이란 낱말을 찾아내었어. 환희, 환희란 말은 참 흔하지. 그런데 거기에 마음 심(心)을 덧붙여 놓으니까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왔어. 마음 심(心)인데 깊을 심(深)에서 건져 올려진 의미 같았어. 환희심,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 있었지.

그렇군요, 제게도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어떤 말이 자신의 정신 세계 속에 이미 내재해 있던 관념이나 가치와 놀라운 친화력을 보일 때 기쁨이 밀려오거든요.

언젠가 제가 어떤 이에게 작은 석곡 화분 하나를 선물한 적이 있었어요. 그가 '심향(深香)'이란 시 한편을 답으로 보냈습니다. 환희심의 심(心)에서 깊을 심(深)을 연상하신다니 저는 또 오래 전의 그'심향'이 떠오르네요. 심향이란 말은 오랫동안 깊디깊은 향기가 되어 저를 가득 채워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향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엷은 비단 주머니에다 마른 꽃잎을 가득 넣어서 실제로 향기 주머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심향'의 이미지는 여전히 저를 휘감아서 '사람의 향기'나 '향원익청(香遠益淸)'같은 글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좋은 향기가 다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의 향기가 제일인 것 같아요. 모든 악취를 상쇄하고도 남을 사람의 깊은 향기,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나면 얻을 수 있는 맑은 향기를 '심향'은 제게 가져다주었어요.

그렇구나, 심향이란 말 듣고 보니 정말 좋구나. 글씨를 쓰기 전에 좋은 글감을 얻기 위해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 처음에는 명심보감, 논어 같은 고전에서 발췌해서 작품을 만들곤 하였는데 요즈음은 그때그때 마음에 와 닿는 글귀나 시구들을 쓰고 있어. 그쪽이 훨씬 좋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 오르고 내 몸과 마음이 함께 일어나서 환호하는 것 같애. 오늘은 '심향'을 써 보아야겠네. 

얼마 전에 남도의 어느 절에 갔다가 빛 바랜 천에 붓글씨로 씌어진 '향실(香室)'이란 말을 보았어. 여러 가지 불서(佛書),다기(茶器)들과 섞여서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지. 돌아와서 화선지에다 '향실'을 써서 낙관도 찍지 않고 표구도 하지 않은 그대로 벽에 붙였어. 겉옷을 벗어버린 게지.

미학적으로 좋은 위치도 아니고 다른 이의 눈에 띄기 쉬운 밝은 곳도 아닌 아무 데나 그저 손 가는 대로 붙인 거야. 그때부터 내 방은 '향실'이 되었어. 서예를 한답시고 갖추게 되는 겉치레를 벗어나고서야 정말 글씨가 되었거든.

제가 쓰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듯하게 쓰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글이 되지 않았어요.

서예도 그래, 어떤 의미로든 정신이 그 격을 잃으면 한갓 재주로 떨어지고 말지. 칭찬 받을만한 글씨, 기량이 나아진 글씨를 쓰겠다고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글씨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거야.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지. 글씨 쓰는데 내 삶의 모든 의미를 귀결시키며 살고자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씨의 노예가 되어버리곤 해. 거기에는 어떤 품격이 높은 정신 세계도 자유도 평화도 없어. 자신을 갉아대는 소모가 있을 뿐이야.

참 좋은 몫을 하고 계시네요. 그 정신 세계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아무나 흉내내고 향유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 그저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좋은 몫을 하고 있다고?

'마리아, 너는 참 좋은 몫을 하고 있구나'

성경구절이 생각나네. 인생에 있어서 좋은 몫, 신앙에 있어서 좋은 몫을 가지는 것은 큰복이란 생각이 들어. 하지만 어디 그런 폭이나 깊이를 가졌어야 말이지.

'몫'이란 제한된 둘레를 가진 어떤 것이 아닌 절대 가치가 아닐까요. 한 생애를 살면서 자신이 선택한 최고의 가치에 목숨을 걸만하지 않아요?

맞아, 그리고 어떤 몫을 선택하든 그것의 밑그림은 

사랑이어야만 해. 그렇고말고 그래야 진정한 가치가 되지 않을까.

참, 후배의 그 '햇살 가득한 방'을 보러가고 싶어. 그때 '햇살 가득한 방'을 써 가지고 갈게. 낙관도 표구도 하지 않을 거야. 우리 그런 것 털어 버리자. 나무에 새겨서 문틀 위에 걸어두면 모양도 나고 방도 그럴 듯해 보이겠지. 하지만 화선지에 묵향으로 밴 그대로의 '향실'이 오히려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것처럼 '햇살 가득한 방'도 꾸밈없는 그대로가 정말 햇살이 가득할 것 같지 않니?

찬란한 봄, 서럽도록 화사한 봄날이다. 맞은 편의 간판 글씨도 빛나 보이고, 앞집 담장 너머로 키가 쑥 올라온 목련나무 잎새에도 햇살이 물방울처럼 퉁기는 봄날이다. 어딘가에 두고 온 글귀를 보기 위해서 선배는 곧 집을 나설 참이란다. 지난 번 만남에서의 다하지 못한 느낌 때문에 글씨를 쓸 수가 없단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찾겠노라고 한다.

참 그러고 싶은 날씨다. 마음에 음각되어 지워지지 않을 글 한 줄 쓰고 싶은 날씨다.
 
 
 
 

   
 
 
이름   허창옥  조회: 29    
 
제목   동재가 자라서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43:12      
 
 
동재가 자라서/허창옥


동재는 언제나 할머니의 등에 업혀 다닌다. 그런데 오늘은 걸어간다. 서툰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동재 옆에서 할머니는 우산으로 가려보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비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동재가 연신 우산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연두색과 파란색의 가로줄이 교대로 무늬져 있는 헐렁한 티셔츠는 오른 쪽으로 흘러내려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황토색 바지를 입고 발자국을 뗄 때마다 빽빽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은 동재가 의기양양 걸어간다.

요즈음 나는 두 살배기 꼬마 동재와 친하게 지낸다. 심심찮게 이마를 찧어서 혹을 달고 오거나 더러는 뒤로 넘어져서 놀라지 않았겠냐며 내게로 데려오곤 해서 우리는 쉽게 낯을 익혔다. 동재는 앞뒤 짱구인데다 이마가 유난히 넓다. 실눈을 접고 가지런한 앞니를 드러내며 웃을 땐 정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귀엽다.

내가 미처 정을 주기도 전에 아이가 먼저 마음을 주었다. 한번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지나가는 아이와 눈을 마주 쳤는데 반가워 죽겠다는 듯이 두 다리를 퍼덕대고 두 손으로 할머니의 등을 마구 두들기는 것이다. 몸이 마르고 키가 작은 할머니가 균형을 잃을 정도였다. 나도 아이에게 '까꿍'하는 표정을 크게 지어 보였다.

아이의 엄마가 식당을 운영하기 때문에 할머니가 동재를 돌본다. 갑자기 어디로 뛸지 예측할 수가 없고 또 따라잡기도 숨이 차서 아예 업고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노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약국 앞을 지나게 된다.

아이는 한 번도 나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과 얘기 중이면 할머니를 잡고 기다려서라도 나와 눈을 맞추고 만다.

그런 동재가 예쁘고 귀엽다.

아이가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아이가 보이면 반가움은 배가된다. 역삼각형의 얼굴, 가늘게 찢어진 눈, 가무잡잡한 피부, 곱슬머리, 미학적으로는 잘 생겼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재는 굉장히 예쁘다.

동재는 말이 늦은 편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우리는 눈으로 서로를 읽는다. 꼬마 동재는 마음을 나눌 줄 안다.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설 줄 안다. 꽃보다 예쁜 마음씨를 지니고 별보다 영롱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동재가 예쁘고 귀엽다.

무릇 아이들이 다 그러할 터이다. 요모조모 따지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 구별할 줄 모르고 손해날 것 이익이 될 것을 판단할 줄 모른다. 까르르 웃고 천방지축 행동하며 으앙 울어버린다. 모든 일에 선험적(先驗的)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때로는 아슬아슬하기까지 하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겠지만 경험하지 않은 일에 겁 없이 나선다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아이는 자란다. 경험이 쌓이고 인지 능력이 커지면서 키도 마음도 부쩍 성장하는 것이다.

소중한 뭔가를 곧 잃고 말 것 같은 초조함이 생긴다. 아이는 자라서 결국 어른이 된다. 젖내 나는 보송보송한 살갗은 거칠어진다. 순백의 영혼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얼룩이 지고 티없이 맑은 두 눈도 먼지가 낀 듯 흐릿해진다. 당연한 일인데도 괜스레 서운하다. 동재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이 자라서 되는 어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다.

젖내가 흩어지고 나면 건강한 삶의 향내를 뿜어내게 하소서. 더러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그로 하여금 더욱 깊어지는 영혼이게 하소서. 티없는 마음과 영롱한 눈빛에도 그리 심한 먼지가 앉지 않게 하소서. 마침내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세계를 사랑하게 하소서. 동재가 자라서 정동재씨가 된다. 

그런 동재가 예쁘고 귀엽다.
 
 
 
 

   
 
 
이름   허창옥  조회: 103    
 
제목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36:39      
 
 
말로 다 할 수 있다면/허창옥 


그는 나에게 어떤 격이 높은 가치나 관념보다 더 소중하였다. 나에게서 그의 존재를 떼어내면 나는 무중력 상태가 되어서 둥둥 떠다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의미가 무겁고 깊고 컸다.

나는 그를 구성하는 맨 처음 한 개의 세포로 생겨났다가 끊임없이 분열을 하여서, 그를 이루는 전체가 되었을 거라는 실로 엉뚱한 생각을 이따금 해 보았다. 이런 비논리적인 사고는 마침내, 내가 병이 나서 앓기라도 한다면 아마 그의 몸에도 실제로 심한 통증이 생길 거라는 망상으로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토록 어이없는 생각을 한 것은 그와의 완연한 일치를 갈망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지상의 나에게 빛을 쏘아주는데, 그것이 아주 낯익은 눈빛으로 느껴져서 하염없이 그 별에다 내 눈을 맞추곤 하였다. 내가 딛고 있는 땅도 이미 거리나 넓이의 감각으로 헤아려지지 않았다. 땅은 다만 그와 함께 서 있는 하나의 공간 개념으로만 인식되었다.

정녕 꽃같고 꿈같고 시(詩)같은 나날이었다.
어느 한 순간도 그를 의식하지 않고는 호흡하지 않는 듯한 최면의 상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보고 있다는 착각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강처럼 길고 긴 정감의 물결이 가슴속에서 간단없이 흘렀다.

내가 알고 있는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붙여서 아주 낮게 불러보곤 하였다. 가게에 붙어 있는 간판의 글씨들도 획을 떼고 옮기고 구부리고 펴서 읽어보면 모두 그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듯 제어할 수 없는 마음은 기쁨보다 고통이 될 때가 더 많았다. 게다가 그의 고뇌까지 고스란히 받아 안을 때면 고통은 갑절이 되어서 나를 덮쳐 왔다. 그럴 경우 나는 찬바람 몰아치는 눈밭을 끝없이 홀로 걷는 처절한 심경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상황이든 대개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섭씨 37도의 날씨도 그와 함께이기에 싫다하지 않았고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도 나에게 쏟아 퍼붓는 그의 마음인 것만 같아서 행복해 하였던 까닭이다.

꽃을 보거나 돌을 만지거나 음악을 듣는 단순한 일조차도 그와 연결되면 아주 특별한 정감을 일으켰다. 그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것이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그로 인해서 꽉 찬 느낌이었다.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에서 그를 느꼈다. 이를테면 이팝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불현듯 눈꽃보다 더 흰 꽃잎 하나하나가 그의 눈빛이 되어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눈 속, 깊이 모를 심연에 담겨 있고 싶었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오늘은 어제만큼 기뻤고 내일은 또 오늘만큼 아팠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우리가 햇빛 아래 서면 내 그림자는 당신의 모습으로, 당신의 그림자는 내 모습으로 나타나면 좋겠다고. 한 영혼이 또 다른 영혼에게 다가가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이리라.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머물지 않고 대상을 통해서 어떤 의미로든 향상되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마음이 가는 길을 볼 수 있거나 그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서로에게 쏟는 그리움을 다 헤아릴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무 기뻐하는 것이 노출되면 민망하고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 되며, 무엇보다 신비함, 내밀함이 엷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를 만난 것은 비길 데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내재된 기쁨과 슬픔의 양이 얼마가 되었든지 그와 함께한 시간은 소중하였다.

과거 시제로 이 글을 이끌어왔지만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이어져 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제 간절함이나 애틋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서로에 대해서 다소 무덤덤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 대신 그와 함께 하는 삶이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숨쉬기는 그 절실함이나 귀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은 바로 생명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에 영원성을 얼마만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모습처럼 주름이 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기에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서 황혼에 이르더라도, 지순(至純)함만은 그대로 지니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지순이란 말이 나와버렸다. 감히 지고(至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순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빛깔을 충분히 그려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백하건대 표현은 언제나 마음보다 모자랐다. 결코 말이나 글로써 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환희와 고뇌가 거듭되는 삶 속에 진실을 용해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이름   허창옥  조회: 80    
 
제목   사랑의 묘약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35:05      
 
 
사랑의 묘약/허창옥


가을밤, 문화예술회관 앞길을 천천히 걷는다. 공기는 맑고 서늘하다. 큰길로 나가는 길모퉁이에 자귀나무가 있다. 한 걸음 다가서 본다. 합환화라 불리우는 꽃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실처럼 퍼진 담홍색 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면 나무의 뿌리와 가지들과 부채살 같은 잎들이 한꺼번에 기쁨을 노래하는 것 같았는데.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사랑의 열매.

지난봄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관람하고 나올 때도 자귀나무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합환목이란 이름 때문에 '사랑의 나무'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사랑의 나무를 보면 희미한 옛 사랑의 더 희미한 기쁨과 슬픔이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이제는 그립거나 아프지도 않은 무딘 기억의 조각들이지만, 내게 사랑이 있었다. 가을 날 노을이 비낀 냇가에서 물수제비 뜨던 소년이 있었다. 

도니젯티의 희극 오페라 '사랑의 묘약' 은 주인공 네모리노가 아디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약장수의 말을 믿고 포도주를 묘약으로 알고 사서 마신다. 네모리노는 자신의 사랑을 바다를 향해 흐르는 시냇물에 비유한다. 시냇물은 바닷물에 닿으면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듯 대상에게 완전히 몰입되기를 바라는 네모리노에 반해 아디나는 멋있는 군인인 벨코레와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묘약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네모리노는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려고 한다. 네모리노의 진실을 알고 감동을 받은 아디나는 마침내 네모리노를 사랑하게 된다. 네모리노는 묘약의 힘이라 생각하고 기뻐하지만 실은 신실한 사랑의 힘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묘약은 바로 깊고 진실한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오페라의 앞부분에 아디나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우연하게도 나는 '사랑 그 딜레마의 역사' 란 책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를 바로 그즈음에 읽었었다. 고트프리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로, 실수로 사랑의 묘약을 나눠 마셔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연인이 된다. 트리스탄은 야심만만한 젊은이로 나라와 나라를 오가며 정략결혼을 주선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사람이었다. 아일랜드의 공주인 이졸데를 콘월의 왕과 결혼시키기 위해 여왕이 준 '사랑의 묘약'을 가지고 콘월로 향한다. 콘월의 왕으로 하여금 묘약을 마시게 하면 왕은 이졸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와 콘월의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이 트리스탄의 임무였다. 그런데 트리스탄은 도중에 목이 말라 무심코 묘약을 마시고 이졸데에게도 건네준다. 두 사람은 열정과 광기에 찬 사랑의 도가니에 빠지고 만다. 숭고한 가치와 아가페적인 사랑이 지배하던 중세에 고트프리트가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규범에 익숙해있던 교양 있고 지적인 두 사람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사랑의 묘약이라는 소품이 있어야했고 또 실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연인이 되지 못했을 터이다. 실수로 말미암은 사랑, 참 재미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랑에는 작은 혹은 크나큰 실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자신들이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국 명예와 충성심 그리고 순수한 사랑을 택하게 된다. 그들은 자유롭고 솔직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욕망을 추방한다. 물론 고통을 감내하면서. 

아무튼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가짜 약으로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되고 소설 '트리스탄과 이졸데' 는 진짜 약으로 가짜 연인을 만들었다. 두 이야기를 동시에 떠올리며 사랑에 대해서 나는 긴 생각을 해보았다. 다소 우스꽝스런 설정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사랑을 찾게되는 앞의 이야기나,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자신들의 사랑을 희생하는 뒤의 이야기는 그 결말이 비슷하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그 과정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바람직한 사랑은 말 그대로 바람직한 것이어야 한다고 할까. 사랑의 덕목은 모름지기 진실과 순수인 것이다.

약을 마시면 사랑을 얻게 된다고 믿는 네모리노의 순진무구함과 실수로 인해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이 다 무척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한번쯤 사랑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가짜 약을 마셨거나 실수로 진짜 묘약을 마셨을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사랑은 바로 인간의 상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른바 '행복한 끝'이 아닌 사랑에는 어떤 의미로든 실수는 있었을 터, 그 실수란 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실수란 말에는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보통의 경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데는 다행스럽게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깨닫고 인정하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과 회한만 남는 것이리라. 그러면 어떤가.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감정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움과 설렘이 다 소멸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정말 쓸쓸한 일이다. 그래서 실수를 되도록 빨리 깨닫는 것이 좋을 성싶다. 아직까지 그리움이 남아있고 더러는 눈시울이 젖기도 할 때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그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되어 이따금 기억의 창에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고, 게다가 비록 할머니가 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랑의 반쪽인 여인이겠기에. 

밥을 먹거나 하품을 하는 것처럼 편안한 풍경 하나가 아주 가끔 그리고 오늘처럼 문화예술회관을 나오다 자귀나무 곁을 지날 때 떠오르곤 한다. 
 
 
 
 

   
 
 
이름   허창옥  조회: 51    
 
제목   길2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32:37      
 
 
길. 2/허창옥


서재에 앉아 윗목에 놓인 그림 한 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안개 속인지 눈이 내리고 있는지 분간이 잘 안 되는 희뿌연 풍경이다. 숲 가운데로 좁은 길이 나 있다. 그 길 끝에 있는 나지막한 절을 향해 큰스님과 동자승이 걸어가고 있다. 원경이어서 아주 조그마하지만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한나절을 서재에 앉아 있다. 몹시도 혼란스럽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제도적 장치가 곧 바뀌게 된다. 제도가 바뀌게 되면 논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논란이야 어찌되었든 새 제도에 적응하여야 한다. 참으로 힘든 일이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일들에 대해서 나는 언제나 두려움을 느낀다. 게다가 새 제도에 참여하게 위해서 당장 내가 해야할 일이 너무 많고 또 어렵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온통 실타래가 엉킨 듯하다.

조용히 있고 싶을 때 나는 서재를 찾는다. 조금 전에도 그냥 푹 파묻혀 있고 싶어서 이 방을 찾았다. 책장에 기대앉아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드니 그림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동자승은 어떤 인연으로 저 좁은 길 위에 서 있는 것일까. 동자승과 큰스님 사이에 놓여있을 보이지 않는 길을 생각해 본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는지, 언제쯤 큰스님이 서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을는지를 저 천진무구한 아기 스님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으리라. 큰스님이 털어 버리고 온 속진의 두께를 짐작할 수도 없으리라. 가슴이 아려온다.

오래 전 일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간단한 짐을 꾸려서 N암을 찾았다. 졸업과 취직 사이에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어디에선가 좀 쉬고 싶었다. 국가고시를 치르기도 했지만 대학시절을 자취와 기숙사 생활로 보낸 까닭에 나는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문득 N암이 떠올랐다. 친구들과의 산행 때 그 암자에서 잠깐 쉬었던 적이 있었다. 적요한 승방,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 그리고 산바람........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조그마한 여학생이 혼자 타박타박 걸어와서 두어 달 쉬어가기를 청하니 스님은 단번에 거절하였다. 혼자 오는 여성은 대개 사고를 내고 만다는 것이 이유였다. 스님은 내가 실연이라도 한 게 아닐까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사정사정하여 나는 N암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한때를 보냈다.

어느 날 새벽 옆방 노스님의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방문을 열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얼마나 내렸는지 이미 하얀 신천지가 되어 있었다. 순백, 그것은 절대의 깨끗함이었다. 때를 묻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젊은이다운 감상이 나를 마당에 내려서게 하였다. 보랏빛 새벽에 함박눈을 맞으며 법당으로 걸어갔다. 새벽 예불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비구니 스님들, 오체투지를 거듭하는 스님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채웠다. 예불이 끝나고 정주 스님이 범종 앞에 앉아 새벽 종성을 시작했다. 내 또래의 정주 스님, 그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 산문에 들어와서 차가운 새벽에 종을 치면서 저토록 고운 음성으로 독경을 할까. 고독한 수행자의 길, 그 어귀에 그는 서 있는 것이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수행 끝에 번뇌를 씻어내게 되리라. 무수한 물음 끝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 새벽, 나는 정주스님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갈증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꿈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편안해져 있을까. 그보다 더 어려운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젊어서 한때, 나는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도 수도생활을 하는 형태인 어떤 신심단체에 입회해서 2년 남짓 살았었다. 신앙이 얕고 의지가 약한 탓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역시 견줄 데 없이 어려운 길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넓은 길을 다시 찾아서 여기까지 별 어려움 없이 걸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길이 울퉁불퉁하고 가파르다고 주저앉고 싶어한다. 특별한 길을 택한 사람은 고통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가 지극히 어렵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작은 고통도 크게 느낀다. 그래서 그 누구의 길도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다 고단한 나그네일 뿐이다. 길은 때로 나그네의 발 앞에서 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어느새 길은 이어져 있다. 그저 묵묵히 걷는 것이다. 그리고 힘껏 사는 것이다.

오늘, 몸과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이 방에서 잠깐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해야할 일들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짐 벗은 기분이다. 풍경화 속에 난 좁은 길이 내 마음속에도 한 가닥 길을 열어 주었다. 
 
 
 
 

   
 
 
이름   허창옥  조회: 61    
 
제목   길1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31:39      
 
 
길. 1/허창옥

산을 오른다. 숨이 차다. 호흡을 조절해가면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딘다. 각도가 45도쯤이나 될까, 경사가 심한 편이다. 

산기슭에서 저 높은 곳 어느 지점을 대각선으로 연결해 놓고 근경을 알맞게 넣어서 앵글을 맞추어 본다. 대각선 위에서 위쪽을 향하여 천천히 걷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풍경화 속의 인물이 된다. 그런 그림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니 기분이 좋다. 나는 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어떤 기막히게 좋은 풍경을 보거나 또는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한 풍경을 만나면 그 속에 자취도 없이 스며들고 싶었다. 풍경은 참 좋다. 산천초목과 살아 움직이는 뭇 생명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대자연은 참으로 경이롭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자취 없어지고 싶은 마음은 어설픈 감상도 아니고, 언감생심 무위자연의 경지를 넘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피로한 몸과 지친 마음을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곳에 부려놓고 싶을 뿐이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의 못된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일행을 한참이나 뒤쳐져서 걷는다. 굴참나무 군락이다. 길섶에 굴참나무의 마른 잎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다. 좁은 등산로에는 땅 위를 비집고 나온 나무 뿌리들이 이리저리 뻗쳐서 자연스레 계단을 만들어 놓고 있다. 원뿌리는 땅 속에서, 곁뿌리들은 땅위에서 넘어지지 않게 산을 끌어안고 있다. 나무의 삶도 어지간히 완강하고 질기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생명의 한살이란 만만치가 않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우리 어머니 이불 꿰매다 검은머리에 얹어둔 실밥 같은 외길' 이란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그 '실밥 같은 외길'을 걷고 있으니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길,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벽안의 젊은 수도승이 걷던 만행(卍行.萬行)의 길이 그것이다. 

그의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서 길에서 길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산길을 걷고 토굴에도 앉았다가 시골 장에서 주름진 얼굴의 어르신과 서툰 우리말로 더듬더듬 이야기도 하였다. 서양의 카톨릭 집안에서 동양의 낯선 나라로 훌쩍 넘어와서 수도승이 된 그의 마음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눈이 파란 그 수도승은 말했다. 길을 걸으면 자연을 만나고, 존재와 삶에 대한 모든 해답을 자연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끝없이 길을 걷는다고. 푸르스름한 새벽녘, 아득한 원경 속 대각선 위에서 한 개의 점이 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은 오래 비추어 주었다. 앞으로 그가 걷게 될 멀고 먼 길을 미리 보여 주듯이.

산을 오르다가 그가 생각난 건 그의 만행이 내게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기도 했거니와, 지금 나를 담고 있는 풍경이 구도상으로는 그날의 화면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부러운 건 부러운 것으로 그만이다. 어떤 사람이 걷는 아주 특별한 길을 나는 걸을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다 걷는 길이 다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 숫자보다 더 많을 듯도 싶을 만큼의 길들이 있다. 나는 그 중의 한 길을 들어섰고 이미 반 이상 걸어왔다. 다른 길로 뛰어넘어 갈 힘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다.

뒤돌아보면 내가 걸은 길도 넓었던가하면 좁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가 느닷없이 내리막길이 되기도 했다. 만행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깊이 있는 명제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수도승과 나의 차이다.

나는 누구의 길도 아닌 나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저만큼 앞서가는 일행의 뒤를 열심히 따라 걷고 있지만 실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타인들과 나, 그들과 나, 그대와 나는 각자의 길을 제대로 걸어서 그 어딘가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그만이다. 더러는 옆길을 넘보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라고 비단이 깔려 있겠는가 내내 훈풍만 불겠는가.

산에 이르기 전 자동차 안에서 내다보았던 바깥 풍경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당도 높은 안동 사과'란 말과 함께 잘 익은 사과가 크게 그려진 광고판을 보았다. '가을 풀빛 식당' 이란 시인이 이름을 붙인 듯한 길다란 간판도 만났다. 그리고 '눈 비올 때 미끄럼 주의'란 표지판을 지났고, 부스럼 난 아이의 머리처럼 산허리를 오려내고 앉아 있는 무덤도 보았다.

길 양옆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풍경들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다 삶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닌가. 내가 집에서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한 순간도 내 삶의 의미들을 떠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길은 여기저기에 있고 산길 들길 아스팔트길을 다 걷지만 실은 오직 '삶'이란 하나의 길을 걷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사이에 가파른 길이 끝났는가. 퇴락한 암자에 닿았다. 겨울 햇살이 엷게 깔린 툇마루에 앉아본다. 댓돌에 방한화 한 켤레와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선방에서 수행 중일 어느 낯모를 수도승의 구도의 길을 그려보고 있는 동안 산사 어디선가에서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부처님도 옛날에는 우리 같은 중생이라......"

아득한 해탈의 세계로 가는 길도 우리 같은 중생의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려다보니 숲만 빼곡할 뿐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살다보면 더러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길은 어딘가를 향해서 뻗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길이다. 지금 나는 그 길 위에 있다. 
 현/고전 명수필 소개 

필독 명수필! 수필창작의 기본입니다  
   
 
 
이름   허창옥  조회: 69    
 
제목   꽃의미소  
 
IP: 220.91.61.228   작성: 2003.07.28 20:29:54      
 
 
꽃의 미소/허창옥


세상의 꽃들은 지금 웃고 있다. 앞 집 담 너머 목련은 함박 웃음을 웃고, 요 며칠 햇살이 따스하더니 효목로의 벚꽃도 여럿이 모여서 까르르 웃는다. 봄빛이나 봄꽃이 눈물겹도록 곱다.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니 책상 위에 예쁜 꽃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친구가 놓고 갔다는 것이다. 바구니에는 노란 프리뮬러가 가득 피어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코끝에 닿는 꽃잎의 감촉과 향기가 내 마음을 봄꽃처럼 환하게 한다.

봄빛이 친구를 불러냈는지 늘 바쁜 사람인데 불로동 화훼 단지에 갔었단다. 친구는 바구니에 꽃꽂이를 하지 않았다. 아주 키 작은 프리뮬러를 한 포기씩 심은 주먹만한 고무 화분 여덟 개로 바구니를 빼곡이 채웠다. 다섯 장의 동그란 꽃잎은-- 여럿이 사진 찍을 때 어깨를 조금씩 겹치듯이--한쪽으로 살짝살짝 겹쳐져 있다. 연노랑 엷은 꽃잎에 진노랑 잎맥이 아기 손바닥의 손금처럼 앙증맞게 드러나 있다. 그 꽃 예닐곱 송이씩을 모아서 긴 타원형의 도톨도톨한 잎들이 감싸안고 있다. 밝은 노랑과 투명한 초록의 조화가 멋지다. 오월 말까지는 피고 지고 한다니 꽂은 꽃보다 오래 볼 수 있어서 좋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도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한참 눈을 맞추다가 하도 예뻐서 내가 빙그레 웃었더니 꽃도 살짝 웃는다. 꽃이 웃는다. 정말이지 내가 잘못보지 않았다. 고 보드라운 얼굴을 다시 보아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 있는 게 분명하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번식을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다고 한다. 꽃이 색깔과 향기 ,꿀을 가지는 것은 나비나 벌을 유인하기 위한 존재방식일 뿐이라고들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뿌리와 줄기와 잎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꽃이 피는, 그리고 꽃이 제 생명을 다 바치고 시든 다음에야 열매가 맺히는 것이 식물의 고단한 한살이 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이 예쁜 꽃이, 저 탐스런 목련이, 이 산 저 산의 진달래가 찡그리기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그 의미가 무엇이든 꽃의 미덕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리라. 만약 꽃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란 낱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본질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어서 아름답고 지는 뜻을 알겠기에 더 아름답다. 

꽃은 저마다 독특한 자태와 향기와 빛깔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때로는 위로해 준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흔히들 꽃을 한아름 안겨주곤 한다. 꽃은 대개 멋진 꽃말을 가지고 있다. 꽃을 주거나 받을 때 꽃말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꽃은 때로 시가 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꽃을 보면 누구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된다. 그랬다. 나는 꽃을 보면 웃는다. 내가 웃으면 꽃도 웃고 꽃이 웃으니 나도 웃는다. 오늘 노오란 프리뮬러의 미소를 보고 생각한다, 꽃을 닮고싶다고. 작은 풀꽃이어도 좋으리. 나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싶다. 그 빛깔이 되도록 엷었으면 좋겠고 향기는 은은했으면 좋겠다. 피고 지는 까닭이 고통스런 일일 수도 있겠고 때로는 슬픔일 수도 있겠지만 꽃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내 삶도 그랬으면 한다. 고단하지만 찌들지 않는, 그래서 조용히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꽃을 닮고 싶다니, 당치도 않다. 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얼마나 잘 살아야 작은 풀꽃의 어여쁨을 지닐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이어야 은은한 향내가 묻어 나오겠는가. 모를 일이다. 진정 모를 일이다. 

지금은 그냥 웃어야지. 봄빛에 환하게 웃는 봄꽃을 마주보고 웃어야지

출처 : 수필과인생
글쓴이 : 청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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