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홍일표의「부서진 귀」평설 / 정다인
홍일표의「부서진 귀」평설 /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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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노래가 하늘 한 바퀴 돌고 와 어깨에 앉아 있다 잠자리는 노래가 되지 않아서 혀가 굳고 검은 가방 안에는 눈감지 못한 태양이 있다 가방을 열면 우르르 쏟아지는 진흙투성이 밤이 있다
남몰래 입 없는 말들이 소용돌이치는 심해에 들어갔다 나온다 젖는다 아랫도리가 가슴팍이 다 젖어 나는 내가 없는 이름이 된다 이름 안에 숨어서 연명한다 이미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노래라고 말하자 너무 많은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고 말하자
용서하세요 저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어서 이곳엔 열여덟 살 밤만 있습니다
귀는 마지막까지 살아서 등대처럼 깜박인다 종일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눈먼 바다를 뒤집어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는 사이 아직도 죽지 못하고 물고기 떼처럼 먼 곳에서 돌아오는 보름달 같은 귀에 운동장을 밀어 넣고 교실을 밀어 넣고 스마트폰을 밀어 넣는다 가득가득 귀가 범람한다 한 마디만 마지막 한 마디만 귀를 잡고 간청한다
나는 고작 소라껍질이나 잡고 여기 서 있으니 울고 있던 수천의 귀들이 부서져 하얗게 흩날리고 있으니
—웹진 《시인광장》 2015년 1월호, 홍일표 시집『밀서』114쪽~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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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진원
—홍일표論
정 다 인
슬픔엔 부제가 필요 없다.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탄식은 다 어디로 흘러가버린 걸까. 그 물꼬를 따라 흘러간 것들은 또 어디에 고여서 또 다른 울음으로 기화하고 있을까. 우리의 일상은 슬픔에 잠겨 있기에는 너무 메마르다. 세상이 뒤집혔던 기억도 모두 삼켜버리는 괴물들이다. 우리들의 표정은 뭉치고 이지러지고 또 뭉쳐서 괴물의 얼굴이 된다. 슬픔을 건조한 소금 자국으로 남기는 우리의 일상을 비집고 한 편의 시가 웅웅 울고 있다. 아무런 설명도 부제도 없이 슬픔이 슬픔이도록 우리의 귀를 잡아 흔든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열여덟 보드라운 귓불들이 ‘등대처럼 깜박이’는 이 시에서 우리는 다시 슬픔의 물꼬를 돌려야 한다. 그것은 매 순간 살아있으면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제의 같은 것이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품지 못한 자궁이었으므로, 피조차 흘리지 않은 차가운 자궁이었으므로.
사라진 노래가 하늘 한 바퀴 돌고 와 어깨에 앉아 있다 잠자리는 노래가 되지 않아서 혀가 굳고 검은 가방 안에는 눈감지 못한 태양이 있다 가방을 열면 우르르 쏟아지는 진흙투성이 밤이 있다
「부서진 귀」는 세월호 사건을 묻어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시간은 슬픔이라는 우물을 메워버린 순간 깜깜한 ‘진흙투성이 밤’이다. 우리가 서서히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에도 ‘사라진 노래’는 우리의 귀 너머에서 돌아오고 있었으며, ‘검은 가방 안에는 눈감지 못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시야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본다. 아무리 옆에서 소리치며 울부짖더라도 마음이 없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풍경으로 사라진다.
그날 이후 우리가 눈 뜨고 웃고 떠들었던 모든 시간은 ‘진흙투성이 밤’과 중첩된 시간이다. ‘가방을 열면 우르르 쏟아지는’ 것의 지퍼를 꼭꼭 닫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어떤 표정으로 가방의 지퍼를 닫았을까? 그건 순식간에 표정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가 아닐까. 일상의 환한 시간과 아무것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잠근 밀폐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그것은 우리의 안과 밖이다. 우리의 환한 시간을 뒤집으면 차가운 물속을 떠도는 슬픔이 흘러나온다.
남몰래 입 없는 말들이 소용돌이치는 심해에 들어갔다 나온다 젖는다 아랫도리가 가슴팍이 다 젖어 나는 내가 없는 이름이 된다 이름 안에 숨어서 연명한다 이미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노래라고 말하자 너무 많은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고 말하자
우리는 우리 안에서 흘러가는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은 그 순간을 제의를 지내듯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품지 못한 자궁 밖의 아이들을. 차마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들을 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화자를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이 사라져간 심해의 차가운 물속으로 따라들어 가야 한다. 그 물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입 없는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미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노래’를 불러줄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너무 많은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 공기다. 우리가 아무리 잊은 듯 살고 있지만 그것은 공기처럼 우리의 호흡기를 돌아나가며 우리 삶을 돌아나간다. 그 슬픔의 공기가 여기 흘러가고 있다. 우리의 코와 입과 폐를 돌아나가는 너무 깊은 슬픔,
용서하세요 저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어서 이곳엔 열여덟 살 밤만 있습니다
이 읊조림을 누가 슬픔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열여덟 그 아름다운 생명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파도에 휩쓸리고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버린 차갑고 무섭고 고통스럽던 순간이 이 안에 들어있다. 열여덟 아름답던 그들의 웃음과 말소리와 천연스럽던 장난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들을 우리는 이 한 줄의 읊조림으로 떠돌게 했다. 노란 리본이 철거된 그 바닷가에 바람과 함께 나부끼고 있을 이 한 줄의 말을 누가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허공으로 흩어진 흐느낌의 끝을 놓아버린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화자의 입을 통해 그들은 말한다. ‘용서하세요 저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돌아오고 싶었던 열여덟 그들의 밤은 어느 배 위에서 오늘도 흔들리고 있을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은 그들의 종적을 따라 화자가 젖는다. ‘아랫도리가 가슴팍이 다 젖’는다. 젖은 화자의 손을 잡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야 할 시간이다.
귀는 마지막까지 살아서 등대처럼 깜박인다 종일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눈먼 바다를 뒤집어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는 사이 아직도 죽지 못하고 물고기 떼처럼 먼 곳에서 돌아오는 보름달 같은 귀에 운동장을 밀어 넣고 교실을 밀어 넣고 스마트 폰을 밀어 넣는다 가득가득 귀가 범람한다 한 마디만 마지막 한 마디만 귀를 잡고 간청한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하지 못한 말이어서 귀가 되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말 대신 스스로 귀가 되어 자신의 말을 담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는 사이’, 이 가슴 시린 시간 사이에 그들이 있다. 열여덟 아름다운 그들의 수의가 걸려있다. 우리가 계절의 한 쪽 끝을 잡고 다시 환한 시간 속으로 걸어들어 갈 때 그들은 우리의 계절 끝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교실에서 졸면서 미적분을 풀었고, 창밖의 환한 햇살에 이끌려서 자주 웃었을 것이다. 시간만 나면 매점으로 달려가서 나쵸를 사먹었을지도 모른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장난기를 참지 못해 친구의 어깨에 올라타고 키득키득 웃었을까? 그들은 어떤 꿈들을 꾸고 있었을까? 누구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었을까? 고백도 하지 못한 마음을 어디다 묶어두고 떠났을까?
‘물고기 떼처럼 먼 곳에서 돌아오는 보름달 같은 귀’ 에 대고 우리는 무엇을 속삭여야 할까? 그리운 것들로 ‘범람’하는 귀 대신 ‘고작 소라 껍질이나 잡고’ 선 우리가.
나는 고작 소라껍질이나 잡고 여기 서 있으니 울고 있던 수천의 귀들이 부서져 하얗게 흩날리고 있으니
우리는 아마도 쭉 이 길을 걸어 갈 것이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데로 남겨두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더 아픔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무감해 질 것이다. 하지만 문득 문득 생각날 것이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갈 때. 친구의 어깨를 감고 키득키득 웃는 아이들을 볼 때. 다하지 못한 시간을 떠돌고 있을 열여덟 아름다운 그들이.
우리의 생은 ‘소라껍질’처럼 제 안의 소리만으로 길을 만들려고 한다. 가끔은 그 안에 파도 소리도 들리고, 심해의 뒤척임도 들릴 것이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라져간 꽃의 얼굴을 한 그 아이들을 생각하자. ‘수천의 귀’가 되어 ‘하얗게 흩날리고’ 있는 우리들의 아이들. 우리라는 다 식어버린 자궁으로 다시 품을 수 있게. 많이 추웠을 그들의 차가운 몸 위에 더운 입김을 호호 불어주자.
오늘도 아프게 흩날리고 있는 이 한 줄의 말을 가만히 안아보자.
용서하세요 저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어서 이곳엔 열여덟 살 밤만 있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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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인 / 1970년 진주 출생. 2015년 《시사사》5-6월호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