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폴리페모스의 동굴 외 1편 / 이령
폴리페모스의 동굴
1
이름조차 기억에 없다는 건 다행
동굴 안의 내가 동굴 밖을 기웃 거리고부터 이건 예견 가능한 일
날 지우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어서
이 길을 정의할 수 없다
어쨌든 4번째 애인부터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정확히 3번째까지의 애인을 기억하는 건 놀랍다
이름 말고 그들의 눈빛이 떠오른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오기 전의 일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어서
이 길목에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와 난
멀고도 가까운 평행에 닿았다
2
동굴을 벗어난 내가 막 동굴을 들어 선 딸에게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건너온 기억을 고백하며
어둡고 습한 땅에 우산이끼처럼 납작 엎드린 시간의 흔적을
무엇으로 증명하나
시간의 변주로 뼈가 굽은 정황을 어떻게 설명하나
아이야!
마침내 모든 것이 거대한 공허로 남을지라도 여기
심장의 家系를 건너 그 무엇도 못 될지라도
북치고 장구 치며 노래하라
저 수평의 생을 기약 없이 맞으며 시간의 독법을 뜨겁게 인정하는 일,
그 길의 끝에 빛이 들지 않겠니?
일간지 사회면을 넘기며
모든 휴지는 희다 희지 않은 것은 휴지가 아니다 흰 휴지들만 휴지가 된다
휴지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닌 모든 것들은 p와q의 목소리
q는 p의 환상 피조물이며
p는 자신의 형상으로 q를 잉태했고
p의 소망은 q를 완성했다는
환상적 행복에 갇힌 p를 현실적 행복에 마비시킨 사기꾼 q의 이야기
언젠가부터 q는 p의 주체자
p가 q의 형상으로 창조되자
q의 나라에 갇혀 사는 부속물 p들의 절규, 절규들
난 나를 모른다 난 널 모른다 우린 우리를 알려하지 않는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넘쳐
q가 아닌 q들과 p이면서 q인 것들의 아우성.
이제 p들의 목적은 모든 것에 적응하는 권능을 얻을 것
귀를 닫지 않을 것
최선을 다해 표정을 미끄러트릴 것
우리의 죄를 기억너머로 모조리 삼켜버릴 것
당신 안에 잠자고 있을 p의 또 다른 p인 q가 아니면 p도 아닌
누군가가 아무나가 되는 아리러니
아무나가 정말 아무나가 되는
p와 q의 거짓 네버엔딩 스토리
시와 경계 2016 겨울호
이령_시사사 신인문학상.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운영위원.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이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