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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요에세이] 눈이 내리면 매화 볼 날 머지않다/최홍식
테오리아2
2013. 2. 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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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눈이 내리면 매화 볼 날 머지않다
2012-12-08 [08:54:33] | 수정시간: 2012-12-08 [08:54:33] |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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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 노인호 기자 nogari@ |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 설경을 찾아 먼 길을 나설 수는 없다. 서재의 책장에 꽂혀 있는 '청전화집(靑田畵集)'을 꺼낸다. 오래전 '청전 이상범 유작전'에서 구한 것이다. 화집 하나하나를 넘겨보면서 '설촌(雪村)'이라는 이름의 그림을 찾는다. 이는 내가 즐겨 감상하는 한국화 중의 하나이다.
그림 속의 산촌에는 폭설이 내렸나 보다. 삼라만상이 모두 눈 속에 묻혀 적막하다. 황량한 모습의 산과 들에도 눈이 두껍게 쌓여 있다. 나부죽이 엎드려 있는 초가집들과 앙상한 겨울나무들 모습이 애처롭다. 이들의 분위기가 고요하고 괴괴하다.
동면의 겨울, 눈 매화 그림에 취해
느린 걸음으로 오는 새봄을 본다
폭설은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시간을 잠재우고 끝없는 동면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어쩌면 시간까지 동결시켜 침묵 속에 가두어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는 것은 오직 보이지도 않는 눈길을 따라 혼자 걸어가는 사람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의 시간은 동면과 침묵의 절묘한 모습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내 가슴 한쪽을 뭉클하게 한다.
화첩을 덮고 잠시 눈을 감는다. 선하게 남아 있는 '설촌'의 잔영을 지우려는 듯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서재의 벽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한쪽 벽에는 우학(友鶴) 선생의 한국화 '매화향만촌(梅花香滿村)'이 걸려 있다. 몇 년 전에 우학 선생께서 내게 보내준 그림이다. 나이 든 매화나무 큰 가지에는 세월의 흔적이 완연하다. 성긴 작은 가지 끝에는 고아한 품격의 하얀 매화가 여러 송이 피어 있다.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또 다른 나무줄기의 홍매화도 빨간 열정을 은근히 드러낸다. 가지들 사이의 공간에는 백매와 홍매 향기가 그윽하다.
화면에는 봄의 생명력이 넘쳐난다. 큰 가지에서 나누어진 두 개의 굵은 가지는 마치 팔을 벌린 듯한 모습으로 대지의 따스한 힘을 흠뻑 받아들이고 있다. 그 힘에 의해 작은 가지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손가락을 펴고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지 아니한가. 봄이 와서 매화가 피는 것이 아니라 매화가 잠자고 있는 봄을 일깨우고 있다. 겨울잠에서 깨어 생명으로 피어나는 바로 그 시간임을 매화나무는 온몸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의 시절은 입춘을 앞둔 늦겨울인 것 같다. 아마도 2월이 아닐까. 세조 때의 박팽년은 그의 시에서 '대는 서리가 내린 뒤 그 고요함을 사랑하고/매화는 섣달에 그윽한 향기를 읊조린다'고 하였다. 음력으로 섣달이면 양력 1월 혹은 2월이다. 실내의 창가에서 가꾸는 매화 분(盆)이라면 이보다 이르게 하얀 눈빛의 백매 몇 송이를 볼 수도 있다. 노지에 서 있는 매화나무라면 2월이 더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시절을 두고 더 무엇을 말하랴. 다만 생명의 봄을 잉태하는 시간, 그것만으로 이미 나는 족하다.
한동안 '매화향만촌'의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생기(生氣)'의 숨결을 계속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화첩의 '설촌'에서 보았던 '동면과 침묵'의 시간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그런 모습이다. 성긴 매화가지 끝의 꽃봉오리는 느린 걸음으로 오고 있는 봄을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춘의 절기는 아직도 멀리 있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동면과 침묵'의 시간보다 '생기'의 숨결에 더욱 몰입한다. 청초한 자태의 매화를 보고 싶은 초조한 마음 때문일까. 갑자기 매향이 방안에 가득하다. 그 향기에 나 혼자 취하여 한순간 정신이 몽롱해진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커튼을 올리고 창밖을 내다본다. 뜰에는 늙은 매화나무가 혼자 외롭게 서 있다. 동면을 하고 있는가. 몸놀림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꽃이 필 때까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도 이제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날씨는 더욱 추워지면서 하얀 눈의 세계가 된다. 매화는 눈 속에서 얼어야 핀다고 하니, 매화 볼 날도 머지않다.

최홍식
부산대 명예교수·수필가
출처 : 부산수필문인협회
글쓴이 : 사무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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