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천상약골 인생도전기/이상렬
천상약골 인생도전기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남들 멀쩡하게 가는 길에서도 나는 툭하면 자빠지고 상처입기 일쑤였고, 사람들이 그저 쉽게 하는 것이 내게는 뭐든 어려웠다. 태생적으로 결핍이 많은 터라 실패는 어느덧 친숙한 벗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약골의 모양새가 갑작스럽게 도드라진 것이 아니다. 뒤돌아보면 내 기억이 가 닿는 최초의 장면은 다섯 살 적, 집 앞에서 트럭에 부딪힌 사고였다. 심상의 첫 화면 부터 핏빛이었던 셈이다.
세상이 내게 달아준 꼬리표가 하나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이다. 이 말을 제일 많이 듣고 자랐다. 그게 싫었다. ‘착한 것’ 은 곧 ‘바보스러움’ 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방바닥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손으로 잡지 못했다. 아이스 바 나무 꼬챙이 하나를 버리는 것이 지구에 미안해서 하루 종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던 적이 있다. 어찌 꼬여도 이렇게 꼬였나 싶다. ‘착함’ 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 어설픈 일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골목대장이 모의한 딸기서리모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망을 보라는 대장의 수행 명령에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 것을 보면 생애최초의 중대 임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곧 나 홀로 주인에게 잡혀서 부모님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대학도 한 번에 들어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생애의 어떤 시험도 단박에 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운전면허도 열다섯 번이나 떨어졌었다. 침팬지도 아니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내 인생길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은 ‘부끄럼’ 이다. 두 사람 이상 모인 자리에서는 앞에 서지 못한다. 거의 공포증에 가까울 정도로 사지 떨림 현상이 일어난다. 책 읽으라는 선생님의 지시라도 떨어지면 그때부터 눈앞은 암흑세상으로 변한다.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은 내가 글을 못 읽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 가지 더, 나는 심한 길치다. 지하철 출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것은 이제 이상치도 않다. 내비게이션이라는 지도기기가 있지만 내게는 그림의 떡이다. 워낙 기계치라 화면을 해석해 내지 못한다. 뻔히 아는 곳도 한 번 만에 못 내리고 지나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내가 군대를 간 것이다. 낯선 세계를 맞이한다는 것은 내게는 가장 힘든 일이다. 특히 남들에게는 저절로 되는 의식주 문제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대하는 쿰쿰한 냄새의 군대 밥, 삼일동안 이 음식과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한 여름 땡볕 아래 연병장에서 쓰러졌다. 의무대에서 누운 채 훈련 첫 주를 보낸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세상에서 제구실하기 참 힘든 인간이다.
산 너머 산이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문명 세상이다. 요즘 첨단기기 앞에서 혼쭐이 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휴대기기 하나로 은행업무, 길 찾기, 식당 찾기, 사람 찾기 등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내게는 제정신 찾기에도 급급하다. 괴물과 같이 무서운 세상, 따라잡기가 버겁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것 이외에 내 마음대로 된 것 하나도 없었지만, 이런 약골이 지금껏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살아있음’ 보다 숭고할 수 있을까. 트럭에 부딪힌 아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는가. 운전면허시험 열다섯 번 떨어진 사람이기에 서툰 실력으로 살금살금 몰고 다니니 안전운행은 저절로 된다. 이것이 지난 이십년간 차를 몰아도 큰 사고 한 번 안낸 비결 아닌 비결이다.
그렇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기다만 인생이라도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살아갈 제 몫은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양면성을 믿는다. ‘약함’ 뒤에는 ‘강함’ 이 지니지 못한 유연성이 있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생존방식일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누구라도 열 가지를 다 가진 사람도, 열 가지를 다 가지지 못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아무리 없어도 살아낼 수 있는 한 가지 생존무기는 있다. 약골이 가진 유일한 특성은 부드러움이다. 저절로 수용성을 지닌다. 이것이 약한 자만의 탁월성이다. 산에서는 분명 호랑이가 토끼보다 강하다. 약한 토끼는 늘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만다. 하지만 결국은 누가 살아남았는가. 강한 것의 상징인 호랑이는 대한한국의 산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반면, 토끼의 개체수는 무수하다. 이런 사실은 우리 입 안에서도 확인이 된다. 곧 강한 이와 부드러운 혀다. 이빨은 뭐든 물고 뜯고 씹어 부술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허구한 날 부러지고 아프고 때우고 씌우고 뽑고 심고 고생하는 것은 물렁한 혀가 아니라 딱딱한 이다. 이가 없는 사람은 있어도 혀가 없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죽는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은 부드러운 혀다.
지금껏 폼 나는 인생은 아니어도 남 해코지 한 적 없고 하늘의 벼락을 맞은 적도 없고 숱한 실패 속에서도 숨을 못 쉴 정도의 절망감에 빠진 적도 없다. 하루에 한 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도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밥 한 그릇에 숭늉 한 그릇 마시고서 고요히 방안에 앉아 벗 삼을 수 있는 어진 친구 한 둘은 있다. 또, 지는 노을 한 자락에도 감동할 줄도 아는 싱싱한 마음도 있다. 고민할 때 고민하며 적당하게 자빠지기고 일어나는 중에 나도 모르게 마음에 근육이 붙어 웬만한 일에도 끄떡없는 탄력성이 생긴 것 같다. 삶의 여정이 결코 순탄치 않지만 이만하면 욕 얻어먹을 인생은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지내고 있다.
변화에 적응해가면 산다는 것, 여전히 내겐 어질어질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도 버거웠던 것은 내가 가진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변화무쌍한 세상을 사는 최고의 재주가 아닐까 싶다. 성공된 삶이란 거대한 업적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다움’ 아래 내게 주어진 분량의 꿈을 완성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고 싶다. 여기에는 특별난 지름길이 없을 것 같다. 그저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의 삶을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내는 것, 다 지난 후에 추억처럼 뒤돌아보며 제 삶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닐까. 그때는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았지만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운명이라 여기는 삶 같은 게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환경은 늘 내 편이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해답이 있기 때문에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성숙을 이루고 좀 더 여물어져서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을 때 비로소 해답을 얻게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부끄럽기만 했던 인생 뒷면을 살짝 돌아보았다. ‘착함’ 의 꼬리표가 아직 달려있다. 이젠 굳이 떼고 싶지 않다. 지천명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는 나이에 이런 말을 간간이 듣고 산다는 것, 결코 ‘바보스러움’ 만은 아닐 성 싶다. 천상약골이 맞이해야 하는 세상. 오히려 설렌다. 또 어떤 언덕, 어떤 험한 산이 내 앞에 놓여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무릎에 힘을 더하고, 마음을 중무장시켜 세상과 다시 한 번 맞장을 뜰 때인 것 같다.
묵은 보따리 속에서 한 줌의 기억을 털어내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제대하던 날 중대장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이~이 병장, 자넨 군 체질이야. 웬만하면 말뚝 박지 그래?”
체질이라......, 어디 군대뿐이랴. 나는 천상, 이런 모양으로 살아야 할 체질인가 보다.
천상약골의 인생도전기는 이렇게 계속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