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일보[ESSAY] 야광 도깨비의 추억/이상렬(3월22일자)
입력 : 2013.03.21 22:40
어릴 적 아버지 방서 본 흐릿한 불빛… 한밤중 도깨비불인 줄 알고 도망쳐
야단 대신 아버지가 사준 夜光시계, 내 유년을 환하게 비춰주던 불빛…
나이 들어 잠도 잘 오지 않는 요즘 시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그 시절
이상렬 사립 작은도서관 '돼지등' 관장·목사

교사였던 아버지는 풍채가 크고 과묵했으며,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어느 겨울 밤, 평소에는 감히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방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몰래 잠입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1970년대 중반의 시골 마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내리곤 했다. 불빛이 귀했던 것이다. 나는 살금살금 까치발을 하고 마루를 건너 아버지 방 쪽을 더듬거렸다.
그때 칠흑의 어둠 사이로 불빛 하나가 보였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아버지 방 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푸르스름하고 동그란 불빛, 그것은 무서운 소문으로만 들었던 영락없는 도깨비불이었다. "으악~!"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달려왔을 때 나는 하얗게 질린 채 "도… 도… 도… 깨비! 도깨비!"라는 말만 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버지의 방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도깨비가 산다고 믿었으니까. 몇 달이 지났다. 초저녁, 우연히 아버지가 벗어놓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귀한 물건에 관심이 많던 나는 시계를 들어 내 손목에 차 보았다. 시계는 커서 빙빙 헛돌았다. 아버지의 위엄을 흉내 내 보려고 거울 앞에 서서 시계를 찬 손목이 보이도록 잔뜩 폼을 잡았다. 내가 보기에도 멋져 보였다. 순간, 시계가 새뜻하게 빛났다. "으악~ 도… 도깨비다!" 다급히 달려온 형이 야광 시계도 몰라보는 나를 촌뜨기, 바보 멍청이라고 놀렸다. '뭐? 야광(夜光)?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그 성물(聖物) 야광?'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범접하지 못할 거에 대한 성(城)처럼 아버지가 두려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손목시계 사 주련? 내일 학교까지 올 수 있겠느냐?" '네~'라는 말이 목 밑에서 눈물과 함께 울렁였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는 시골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도회지였다. 홀로 차를 타 본 적도 없는 열 살짜리 시골 촌뜨기가 그 먼 곳까지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멀리 풍경 사이로 '손목시계 하나 사 주련?' 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약도 한 장을 들고, 버스가 서는 정거장마다 손가락을 꼽았다. "오라이~!" 출발을 알리는 차장 누나의 흥에 겨운 리듬을 놓칠세라 손에 땀을 쥐었다. 드디어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했다.
학교 입구에 '중앙시계'라는 큰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시계방 안에는 신묘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수많은 휘황찬란한 손목시계 중에서 하나는 곧 나의 손목에 걸리리라.' 기쁜 상상에 빠져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금붙이를 두른 한 남자가 손을 저으며 나를 쫓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학교로 향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학교는 꽤 컸다. 덩치 큰 사내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로 나를 바라보았고, 형형색색으로 멋을 낸 계집아이들은 도시의 분위기를 흠뻑 발산하고 있었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왔구나, 아들." 아버지는 언제나 간단명료하게 말을 맺으셨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모두가 인사를 했다. 덩치 큰 사내아이도, 멋을 낸 계집아이들도. 아버지의 위력일까, 아니면 내게 반한 걸까.
학교 입구 시계방에 들어섰다. 아까 나를 쫓아냈던 금붙이 두른 주인이 벌떡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힌다. "우리 둘쨉니다. 얘에게 맞는 시계 하나 골라 주시오." 주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통쾌했다. 어떤 걸 원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아부지 거요."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야광 시계를 손목에 찼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아버지를 가슴에 지녔다. 며칠 밤을 이불 속에서 야광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도깨비 불빛보다 환한 아버지의 불빛이었다. 겨울의 긴긴 밤은 야광 시계와 함께 오롯이 내 유년을 환하고 따뜻하게 비춰 주었다.
세월이 흘렀다. 잠이 오지 않는 요즘, 째깍이는 시계 소리와 함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자꾸 떠오른다. 야광 시계는 나의 내면을 더 환하고 그윽하게 숙성시켜 놓은 것 같다. 아버지는 3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밤마다 나와 마주 앉아 계신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 속에 살고 계신 아버지, 나는 당신과 똑 닮아버린 품으로 아버지를 안아 드린다. 그리고 등을 돌려 기력 다한 아버지를 업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시계방으로 간다. "우리 아버집니다. 꼭 맞는 시계 하나 골라 주세요!" 노안으로 시계가 어둡다 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속이 환한 야광 시계 하나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