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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8회 은상 <레일 위를 달리는 회향/백소연>

테오리아2 2014. 8. 2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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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위를 달리는 회향(懷鄕)/백소연

 

산천이 의구하다는 말도 다 옛말인가.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도 드문 것 같다.제 각각일탈을 꿈꾼다. 레일을 벗어난 기차처럼 때때로 길은 아수라장이다. 젊어서의 방황은 정착을 꿈꾸지만 중년을 벗어난 일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성과 이성을 주체 못하고 관록을 앞세워 걸쭉하고 뻔뻔해지기 쉬운 나이를 몇 줄의 굵은 주름으로 용서받으려는 무모함은 아닌지. 문득 술 취한 세상에 묻고 싶어진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친구를 만나는가 하면 자주 만나 부대끼고 싶지 않은 까다로운 사람과 마주 앉기도 한다. 피하고 싶을수록 더 자주 만나 이래저래 맘 고생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도 매듭을 풀고 살라는 하늘의 뜻은 아닐지.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독한 반연(絆緣)의 고리를 깨닫는다. 맑고 바른 심성이 타인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는 삶의 지침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말도 나를 종종 자책하게 하는 속담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어깃장 놓는 길을 선택한다. 돌아보면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내 안에 숨어있다. 상대가 무슨 마음으로 대하건 들뜬 말에 엉키지 않고 편안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면 그만이다. 생사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처럼 싫은 것에 대해 너무 정색하는 것도 옳은 처사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멀리 내다보기 위해서는 잠시 한발 뒤로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했던가.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야 있지만 끝까지 이해시키지 못하고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일부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싶으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쉽게 숨기지 못하는 게 화근이다.

겨울바람이 봄 문턱을 넘나들 때쯤이었을까. 한 통의 낯선 메시지가 걸려왔다. 한 동네에서 이웃하며 자란 고향선배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돌아보니 대략 이십 칠 년만이었다. 또박또박 써 내린 긴 메시지가 약간 부담스럽긴 했지만 통화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젊은이는 젊음을 앞세워 겸손해지기 어렵다지만, 중년의 세월이라는 안위가 있었기 때문일까. 마음을 곧추세우고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투명하면서도 자신감에 찬 목소리는 여전했다. 어려서부터 지식에 목말라 하며 살던 사람이란 강한 이미지 탓인지 더욱 그랬다. 처음 우려했던 머쓱함과는 달리 자연스레 말문이 트였다. 가끔 안부 전화나 하겠거니 했는데 거의 매일 서너 차례씩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해졌다.

누구라도 세월이 흐르면 정화된 기억만 화려하게 피어나기 마련이던가. 그러고 보면 망각은 잔인하면서도 편리한 변명이 될 수 있다. 그 무렵 나는 갑상선 항진증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온 상태였다. 만학에 취해 오로지 책과 피아노만 붙들고 살아왔던 지난20여 년의 억척스런 세월로 인해 끝내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이다. 오직 정신력만이 나를 지탱시켰다고 해도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생활이 따분하고 권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사업한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한가할까, 싶을 정도로 K는 전화를 자주 걸어왔다. 무소식으로 살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연락을 취해오지만 그때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행위 탓에 두루두루 맘 상할 때가 많았다. 물론 여성에게 너무 깍듯이 친절한 남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 된 시대다 보니 얼마나 어떻게 잘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꽤 고민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심각해질 필요도 심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였을까. 일방적인 표현, 약속, 기다림... K는 만남을 소원했지만 나는 당장 병원에서 정기적 진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으므로 거절했다. 몇 차례 웃으면서 뺨치는 식 말이 효과가 없었는지 K는 점점 마음을 닫아걸고 자기식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서운한 것이다. 나는 그런 행위를 이기적이고 경박한 처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 탓인가. 해가 바뀔수록 권위 있는 사람보다 색이 강한 사람보다 기품 있으면서도 편안한 사람이 좋아 보인다. 편안함은 수용력이다. 수용은 선을 위해 화합하려는 배려와 이해다. 아픈 곳을 아프다고 말할 때는 이미 그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하나 내 아픔이 더 이상 상대의 아픔이 될 수 없고, 상대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없다면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공동의 화제가 없다는 것은 함께 아우러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을 한 계단씩 오르고 내리면서 과연 기뻐 할 일이 얼마나 있었던가. 고통, 슬픔, 좌절, 환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격리시키고 물리쳐야 할 것들뿐이다. 그러나 기쁨 하나가 나머지 고통을 모두 흡수한다. 아름다운 추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요즘은 그리움도 사랑도 너무 천박하고 조급하게 흘러간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화란 소통이며 신뢰다.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近朱者赤)’이라는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고 붉은 기운을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은 늘 가까이 하는 사람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어있으므로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매사에 신중 하라는 경계의 글귀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외곬수적이고 고고한 의미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융화가 없는 냉혈한 독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난을 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이 말이 주는 곧고 투명한 길을 좋아하게 되었다. 계산되지 않은 암묵적 당당함이 나를 매혹시킨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목수가 집을 짓는 일과 다름 아니다 싶다. 보이지 않는 벽과 벽을 헐어 햇빛과 그늘이 적당히 드리워진 마음의 창을 내기란 쉽지 않다.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가장 정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여 가난해서 사랑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젊은 나이의 누추와 남루와 궁핍은 가난에서 오는 것보다 방랑에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하려면 우선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나는 한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내 쉼터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칼끝 같은 예리함을 미처 누이지 못했다 설령 산 같은 그리움의 무 . 게만 들고 왔다손 치더라도 그조차 버겁지 않았을까.

만나서 차 한잔 마시며 여유를 갖고 이야기하는 게 무에 어렵겠는가. 최대한 예의를 갖춘 섹슈얼한 겉모습만이 인생의 에티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가 영혼을 담는 그릇이 되듯 마음 씀씀이가 행위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못내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본질은 이슬처럼 투명하거나 혹여 바람의 변태겠지만, 굳이 그 속내를 캐고 싶지 않다.

서로가 너무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남는 건 상처뿐이다. 허영이나 만용으로 어느 한쪽이 우쭐거리는 것보다 자기 본분을 지키는 평행한 은륜(銀輪)이 훨씬 아름답다. 항아리 속 묵은 장아찌처럼 사람마다 가끔씩 꺼내 맛보는 그리움이 왜 없겠는가. 한동안 추억마저 병들게 만든K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마음도 닦아냈다. 이제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넉넉한 미소를 보낸다. 검었던 머릿결이 희끗희끗 나잇살이라도 챙기면 그때서야 간신히 철이 들지 모를 우리. 시간이 시간을 낳으면 이미 떠난 시간은 강이 되어 흐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바람이 가로막아도 햇살 몇 근에 섣달 살얼음이 녹듯 풍화된 시간은 원숙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출처 : 고울문학회
글쓴이 : 인도공주(표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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