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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30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산문부문 장원/미묘와 자화상-김혜라

테오리아2 2013. 11. 1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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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산문부문 장원


미묘와 자화상

김혜라

 

 

   우리는 네 이름을 미묘라고 지었었어. 왜냐하면 그건 네가 너무 미묘했기 때문이었지. 네가 무얼 원하는지, 네 눈이 무얼 말하는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어. 네가 분명하게 좋아하는 게 딱 한 가지 있었어. 참치캔.


   참치캔을 가져다주면 바닥에 있는 기름까지 말끔히 핥아먹고 다시 등을 땅바닥에 부비며 누워서 잠을 청하곤 했지. X관 사람들은 이런 무심한 듯 자유로운 너를 정말 좋아했어. 햇살이 너무 밝아 눈부신 여름날 오전이라도 너는 피곤하면 금세 길 중앙에 드러누워 지나가던 차를 비켜가게 했어. 한겨울 밤이라도 기운이 왕성하면 사람들 앞에서 지치지 않고 재롱을 피웠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밥벌이를 걱정하지도 않으며,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지. 앞을 향해 이따금 도도하고, 이따금 게으른 걸음으로 사뿐히 너의 앞발을 내딛으며 절대 뒤돌아보는 법이 없는 너는 또한 바람 같아 보이기도 했어. 넌 흘러갈 수 있었으니까.


   바람처럼 흘러가면서, 또 다른 바람을 가르며, 네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얽매여 있었어. 나를 비롯해 너를 미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건, 너를 X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건 우리는 모두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어. 우리는 아침 수업시간을 어기면 출석부에 빨간 줄이 그어져. 우리는 낮은 낮, 밤은 밤대로 살아야만 해. 여름철에 몸이 늘어진다는 이유로 길바닥에 드러눕다가는 비정상인이 되고 말지. 밤에는 너처럼 춤을 출 게 아니라 발 닦고 잠을 청하라고 배웠어. 행동의 폭과 반경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너의 삶과 우리의 삶은 차원이 다르지. 그래서 너를 통해 사랑했던 건 너의 그 정해진 잣대 없는 세계였나 봐.


   동시에, 우리는 너를 동경했었어. 발걸음 하나를 내딛을 때마다 셀 수 없이 복잡한 결의 잣대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사뿐하고 가벼워 보이는 네 발걸음이 부러웠어.


   네가 사랑받았던 그 시간들이 ‘너의 전성기’로 여겨진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야. 학교 측은 낡은 X관 건물을 폐쇄하고 새로 지은 J관으로 모든 걸 이동시켰거든. 강의실도, 책도, 책상도, 사람도, 사람이 내는 소음과 풍경까지도. X관은 버려졌어. 너를 알고 너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취업을 했고 졸업을 했지. 건물의 내용물이 점차 이동할수록 너의 주위에는 비어 있기만 한 참치캔이 늘어 갔고, 우유곽은 옆에 쓰러져 있었으며 네 보금자리에는 먼지가 내려앉았지. 그렇게 우리는 X관을 떠났고 널 부를 수도, 볼 수도 없게 되었어.


   올해 4월쯤이었을까. 도서관 길목을 지나치다가 너와 마주쳤지. 그런데 넌 좀 달라져 있었어. X관에 머물던 시절 넌 한 번도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한참 동안 나를 쫓아왔어. 예전에는 주로 너를 지켜보기만 했던 나도 이번에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어. 너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증발하고 이번에는 나 혼자였거든. 나는 참치캔을 사서 너에게 주고 그걸 핥아먹는 너를 주저앉아서 한참을 바라봤어. 먹는 속도가 빠른 것으로 보아 너는 아마 굶주렸던 모양이고, 비대하다 싶던 몸이 눈에 띄게 가늘어진 것으로 보아 굶주린 게 수일은 되었을 것이고 나를 쫓아온 걸로 보아 사람의 품이 그리웠던 모양이야. 무엇보다 너는 외로워 보였어.


   그런데 미묘야, 그거 알아? 너를 사랑하고 아껴 주었던 그 시절 모든 사람은 외로웠어. 사실, 대학교 일이학년생들은 너무 바빠. 엠티도, 축제도 참여해야 하고 새로 시작한 연애에 설레고 기뻐하고 슬퍼하느라 널 돌봐줄 겨를이 없어. 너를 아껴 주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X관 열람실 안에서 고시나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대학 안의 고령자들이었으며, 나처럼 밤늦게까지 논문을 써야 하는 대학원생들이었어. 우리는 모두 선택의 기로에 서서 우리를 둘러싼 관습적 책임에 힘겨웠어.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외로웠지.


   사랑에 있어, 삶에 있어 아쉽지 않은 사람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아. 절박한 공감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반면,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어느새 외로워져 버린 네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듯이, 외롭고 절박하고 마음이 취약해져 버린 사람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지. 공감과 연대를 통해 위로받고 싶으니까. 그때 X관의 많은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얼마 전 학교 웹사이트 게시판에 네 소식이 올라왔어. 너는 살아 있고 잘 지내고 있다고. 미묘야, 한때 우리가 너를 보며 살았던 그 시간에는 우리가 감내해야만 했던 외로움, 사회에 대한 불안감, 점점 죄어오는 생계에 대한 책임의 그림자가 모두 응축되어 있어. 너는 그때 가장 외롭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거야. 그러니 미묘야, 그 응축의 시간들을 잘 간직해 줘. 훗날 너를 보고 고됐지만 소중한 우리의 자화상을 떠올릴 수 있게. 그러니 미묘야, 부디 잘 살아 줘.


 

   제30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산문부문 _ 심사평


   산문 부문의 글제는 고양이, 동상, 태풍, 10월, 이렇게 네 가지였다.

   글제를 너무 소극적(평이하게)으로, 또는 반대로 지나치게 과대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글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접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 간혹 미리 준비해온 내용에 글제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경우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글 솜씨가 뛰어난 몇몇 참가자들의 경우, 작위적인 내용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산문들이 많아 심사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태풍을 주제로 한 글들이 눈에 띄었다.

   장원으로 뽑힌 「미묘와 자화상」은 고양이를 2인칭으로 하여 유려한 문장으로 자신의 지난 학창 시절과 그 시절 교내에서 살던 고양이를 추억하는 내용이다. 고양이를 자신의 처지와 비유한 점, 긴 호흡으로 문장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끝까지 유지한 점이 돋보였다.

   우수상을 받은 「태풍」은 산문의 구성이 돋보였다. 태풍을 뚫고 딸은 어머니를 걱정하여 장흥으로, 어머니는 서울로 향하는, 어긋나는 여정 속에서 진한 가족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려상을 수상한 「태풍(모슬포의 바람막이)」는 모슬포 바람 속에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자신의 옛 직장에서의 모습을 반성하는 글이다. 길에서 만난 낯선 타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수상자들께는 축하의 말씀을, 수상하지 못한 참가자들께서는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출처 : 광주문인협회
글쓴이 : 진진/김면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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