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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3회 복숭아문학상 수필부문

테오리아2 2013. 1. 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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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복숭아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어머니의 향기

연정복

창문으로 번져 들어 오는 여명은 농촌에 사는 나에겐 소리없는 알람시계가 된다.

세상에 나누어 주는 풍족한 가을 햇살의 자비로 꽃이 진 자리에 앉은 열매가 무르 익어간다.

해마다 복숭아를 처음 따는 날은 열 달을 소중하게 품어 온 첫 아이를 출산하는 그날처럼 가슴마저 벅차온다.

그동안의 나의 땀과 열정을 거둔다는 설렘으로 나는 아직 아침 해가 거두어 가지 않은 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과수원을 들어선다.

나의 노고에 보답하듯 가지마다 주체할 수 없이 탐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몸자랑이 한창이다.

지난 봄, 따가운 햇살 아래서 나는 간절한 소망으로 가지마다 노란 편지를 달았다.

그렇게 해마다 봄에 복숭아 봉지를 씌우는 일은 젖먹이를 다루 듯 더없이 신중한 작업이었기에 가을이면 천재지변에도 대견스럽게 익은 열매는 가슴 벅찬 행복이 된다.

손을 뻗어 가지마저 위태로운 복숭아 두 덩이를 잡았다.

순간 어릴 적 장난삼아 주물러 대던 어머니의 젖가슴이 잡혔다.

손 안에 조심스럽게 앉은 느낌은 그 표현이 적당했다.

꼭지를 살짝 잡아 당기자 농익은 복숭아에서 어머니의 젖물처럼 단물이 주루룩 흘렀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께서 복숭아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머니께서 복숭아를 드시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네 근방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몇군데 있었다. 7월 초순부터 늦가을까지 수확하는 복숭아의 종류만도 미백, 천중도, 황도 그 외에도 여러 종이 있는데 밭농사를 이것저것 하시는 어머니는 추석 전에서야 과수원 일을 조금씩 다니셨다.

이른 새벽 어머니는 한창 꿈나라에서 허우적대는 나와 동생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 놓으신다.

그리곤 수건 하나 머리에 두루고 이내 당신의 온기마저 거두어 대문을 나서면 긴 해도 무시한 채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서 돌아 오곤 했다.

과일이 흔치 않던 그 시절, 우리는 어머니께서 일을 마치고 얼른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이 끝나면 어머니는 선별에서 낙오된 파치를 광주리에 한 가득 담아 집 앞 골목부터 침샘을 자극하는 복숭아 향을 몰고 오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가져 오는 복숭아는 무르고 정말 못 생겼지만, 예쁘고 맛난 것좀 가져오라는 투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옷자락을 다 적셔가며 먹었다.

"엄마는 왜 안먹어?"

"엄마는 거기서 많이 먹었어."

복숭아에 한 번도 손을 대시지 않아 하나 들어 내밀면 어머니는 매번 거절을 하셨다.

부딪혀서 검게 멍이 든 자리는 물러서 단물이 줄줄 흐르고 나만치나 복숭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벌레가 폭식에 죽어 있어 가끔 치를 떨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못난 복숭아라도 맛나게 먹을 수 있었던 건 한밤중 어머니의 고달팠던 하루의 신음소리 때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손에 단내가 가시기도 전에 복숭아를 한 아름 머리에 이고 오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대문 턱을 밟기도 전에 광주리를 다 비우고 오셨다.

그리고 평소보다 한참 늦게서야 들어 오시곤 했다.

"엄마, 왜 요즘은 복숭아 안 가져와요?"

"응, 오다가 시장에 들러 다 팔고 왔다."

"왜 팔아? 난 복숭아 먹고 싶은데…"

"내일 가져오마."

복숭아만 있어도 3박4일 밥도 멀리 하는 나는 볼이 퉁퉁 불었다.

매일 가져오기에 벌레 먹은 부분보다 몇 배는 더 베어 버리고, 한 입 물어 맛없으면 가차없이 버리던 복숭아가 아쉬워진 것이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이 먹을 세 개만 광주리에 이고 오실 뿐 더이상 천대할 복숭아도 없었다.

그렇게 일을 나가신지 여드레가 지났을 무렵이다.

어머니가 쓰고 간 수건은 검붉은 피에 얼룩졌고, 왼쪽 다리는 절룩 거리며 들어오셨다.

복숭아를 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그만 발목을 다치신 것이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패인 상처에는 말랑한 젤리처럼 피가 뭉쳐 상처를 거즈처럼 덮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보다 상처를 보고 겁에 질린 나를 달래려 아픔을 숨기고 애써 웃으셨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내가 걱정한 것 보다 훨씬 더 몸이 좋질 않으셨다.

밤새도록 숨죽여가며 내던 신음소리와 고열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이불이 어머니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그렇게 힘든 밤을 보내고도 대수롭지 않은 듯 상처에 빨간 약을 바르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밥상만이 우릴 기다릴 뿐 어머니와 머릿수건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일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고단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 한 밤중에 김치를 담그시며 이것저것 조금씩 준비를 하셨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은 명절 대목 장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집에 돌아와 봉당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동네 어귀로 나가 흙바닥에 털썩 앉아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했다.

"우리 엄마가 새 옷 사온다고 했어."

"나는 신발인데…"

해가 식어들기 시작하자 엉덩이를 투덕거리며 하나 둘씩 일어나 집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명절이 되어도 겨우 양말 한 켤레 얻어 신는 나는 심통이 나서 공깃돌을 이리저리 던지며 일어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두 해도 아닌데 자꾸만 어머니가 야속해 집으로 향한 발걸음마저 울컥울컥했다. 땅에 시선을 박고 집을 들어서는데

"엄마가 언니 옷 사왔어!"

"정말 정말?"

나는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다.

동생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연분홍빛 원피스였다.

세상 온갖 설움 다 가진 얼굴을 하던 나는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추석빔을 해 주려고 일에 지친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다리를 절며 그 먼 시장까지 가서 복숭아를 팔고 오신 것이다.

원피스를 입고 지퍼를 올리려는데 한참 크는 때라고 약간 넉넉하게 사온 옷이 왠지 가슴을 조여왔다.

어머니였다!

내 가슴을 조이는 것은 옷이 아니라 미련스러울 정도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는 마음에 나는 어머니 품에 와락 안겼다.

나의 얼굴이 어머니의 젖가슴에 닿는 순간 잊혀지지 않을 복숭아의 단내가 내 가슴으로 흘러 들어왔다.

5년 전 나는 작게 복숭아 농사를 시작했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품앗이를 해서 당신의 손에는 단물만 묻히시고 우리 입에 넣어 주던 복숭아를 직접 내 손으로 가꾼다.

하지만 탐스럽게 익어 온몸에 단내가 가실 줄 모르도록 따도 결국 가까이 사시는 어머니께 드리는 건 못생기고 검게 멍이든 복숭아다.

그런 복숭아라도 한 번에 서 너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신다.

"난 엄마가 복숭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니들! 엄마가 복숭아를 얼마나 좋아 하는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걸.

예전에는 니들 먹이느라 그런거지."

어머니의 입가에 흐르는 복숭아 물을 닦아 주시며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다.

부모가 되어 나의 모든 의미가 자식임을 알아 가면서 나 또한 부모님의 의미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보다 자식에게 더 먹이고 입히며 무엇이든 어떻게든 자신을 비우더라도 자식을 채워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터득해 가면 갈수록 지난날 어머니는 나에겐 아름다운 눈물이 된다.

'내 입에 들어 가는 것보다 자식 입에 들어 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어른들의 말씀은 순환되는 진리다.

그 옛날 어머니의 광주리에 담겨진 것은 단지 복숭아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 넘쳐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란 이름표를 달고서야 깨달은 어리석음까지도 어머니는 사랑할 것이다.

이슬에 젖어 속이 훤히 비치는 노란 봉지를 벗기자 탐스럽게 볼 붉은 복숭아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오늘은 제일 빛깔 좋고 싱싱한 것으로 한 상자 채워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우수상]

상한 복숭아

김은송

복숭아를 씻는다. 찬거리를 사기위해 들른 시장에서 노점 할머니가 올망졸망 모아놓고 파는 푸성귀 사이에 끼여 있는 복숭아 바구니를 보았다. 할머니의 마른 손은 햇볕에 바란 것처럼 허옇고 주름이 잡혀있었다. 비닐봉지에 복숭아를 담는 할머니의 헐렁한 입매 사이로 정이 묻은 미소가 복숭아에 얹었다.

꽃자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진 복숭아의 모양새가 영락없이 아기의 엉덩이를 닮았다. 연한 분홍색을 띤 겉모습은 목욕을 하고 분을 바른 보송보송한 딸 아이의 어릴 적 피부를 떠올리게 했다.

대부분의 과일들이 매끈한 표피를 가지고 빛을 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잡지만 복숭아는 범접하지 못할 표피에 솜털을 가지고 있다. 함부로 만지면 탈이 나 성질은 차갑지만 과육은 우리에게 새로운 맛을 달콤한 과즙의 맛과 향을 느끼게 하고 씨앗은 시들어 가는 피에 생기를 준다. 봄을 지나 여름의 끝자락에서 새색시 같은 얼굴을 한 뽀얀 복숭아를 만날 때면 오래전의 딸과 시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시리다.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조금씩 퇴색되어간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워지지 않는 운명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다.

결혼 후, 몇 해가 지나도록 자식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 부부에게 사월의 봄 햇살을 받으며 예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아기의 햇살같은 웃음에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남편과 나는 가슴이 뜨거웠다.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아도 이리 사랑이 넘치고 행복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딸의 모습만 보느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딸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음식물을 넘길 때마다 목이 쓰리시다는 어머니와 병원에 들렀다. 내과에서 간략하게 검진을 하고 의사가 써준 소견서를 들고 대학병원으로 향하였다. 대학병원이라는 데가 환자를 얼마나 기다리게 하는 곳인가. 조바심 속에 진찰실에서 초음파로 확인한 어머니의 위벽에는 자잘한 용정이 붙어 있었다.

일주일 후 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마취약을 마신 어머니의 입안으로 긴 줄이 들어가자 초음파 모니터에 위벽이 굴 속처럼 나타났다. 살구 빛 위벽에는 어릴 적 아버지가 암탉을 잡을 때 보았던 작은 계란의 노른자처럼 생긴 투명한 구슬이 매달려 있었다. 의사가 기구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끝에 달린 갈고리 모양의 철사는 감나무의 감을 따듯 하나씩 용정을 낚아챘다. 목을 조이는 것처럼 거친 호흡과 함께 터져 나오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소리에 수술실을 뛰쳐나와 병원 화장실에서 내 아픔인양 눈물을 쏟았다. 힘든 시간 속에 위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종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들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못하는 며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아들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딸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겉으로 울 때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어머니는 속으로 우셨던 것이다. 딸을 보며 행복해 하는 아들 내외의 모습을 보며 내색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음식을 넘기는 일이 힘들만큼 속으로 삭혔던 세월의 흔적이 위벽에 용정을 만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으면 병이 나는, 그래서 꼭 해야만 하는 그 성정, 며느리에게는 제대로 못하니 썩은 복숭아처럼 마음에 일어나는 화를 칼로 도려내느라 거친 숨을 내쉬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철도 공무원이셨던 시부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때문에 칠 남매 아홉 식구의 입이 되는 빠듯한 월급은 어머니에게 제대로 건네지는 법이 없었다. 살림을 도맡아 하셨던 어머니의 바지런한 성격은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의 입에 밥을 넣어 주려 한시도 앉지 못하고, 돈이 되는 일을 위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져야만 했다. 남편은 어릴 적 비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집에 계셔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어서 제일 좋았단다.

하지만 아들들을 야단 칠 때 도망이라도 가면 기어이 달려가서 붙잡고 꼬집기라도 해야 어머니는 직성이 풀렸다. 딸들이 한 빨래가 깨끗치 않으면 마당에 엎어 발로 밟고 딸들을 빨래터로 내몰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씨에 곱슬머리에다 옹니를 지니신 분이다. 모두 그러지는 않겠지만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처음 어머니에게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부터 편한 얼굴이 아닌 모습에 주눅이 들고 어렵게 느껴졌었다.

칠 남매 사남 삼녀 중 셋째 아들인 남편은 어머니에게 무척 곰살맞다. 못난 자식이 된 마음이었는지 남편은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니, 엄니"

하면서 여간 살갑게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우리 집에 계시고 싶어 했고 그로 하여 다행히도 환자가 되신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어 고부간을 부드럽게 만들 기회가 왔다. 어머니와 소통의 길이를 줄이는 것은 호칭을 바꾸는 것이라는 생각에 남편처럼 엄니라고 부르지는 못해도 엄마라고 부르자고 약속을 하였다. 같은 밥상에서 수저 소리를 내며 내가 엄마라고 부르면 남편은 소리없이 웃었다.

선천적으로 비위가 약해 푸성귀 반찬과 된장국 같은 음식만 드시는 어머니는 끼니 외에 군입거리도 꺼리지만 껍질이 순하게 벗겨지는 부드러운 복숭아를 그나마 좋아 하신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를 뵈러오는 자식들의 손에는 모양새 좋고 맛이 그만인 황도가 들려있다.

복숭아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제법 비싼 복숭아 세 개를 사다가 딸 아이가 먹을까봐 냉장고에 넣지 않고 주방 구석진 곳에 감춰 두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내 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마음에 주방에서 그릇을 찾던 어머니가 복숭아를 발견 하셨다.

"이걸 어째, 맛있는 복숭아를 아깝게시리."

반점처럼 군데군데 얼룩진 복숭아 껍질을 벗기고 손질을 하셨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해드려도 딸만한 며느리는 없는가보다.

누구에게나 옷처럼 마음을 덮고 있는 겉 껍질이 있다. 표면의 털이 알레르기를 일으키지만, 껍질을 한 꺼풀 벗기면 보드라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며 맛과 향으로 본연의 마음을 전하는 복숭아처럼 어머니의 마음도 그러하다. 겉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내가 어머니를 보면서 깨닫는다. 자식을 위해 당신의 육체는 물론 마음까지도 내치고 붉은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그리되셨음을 안다.

딸은 대학생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있다. 물과 햇빛과 양분으로 자라는 나무처럼 잘 자란 딸을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으로 들어와 눈물이 된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딸의 가슴에 지니고 있는 아픔이 이제는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나도 서서히 나이를 먹으면 무른 복숭아처럼 되겠지만 향만은 지닌 삶을 영위해야하리.

이른 봄, 꽃을 피우며 열매의 꿈을 키우던 복숭아는 기다리는 기쁨을 간직하게 한다. 힘든 계절을 참고 견딘 복숭아를 보며 고부간을 잘 이겨낸 어머니와 나에게 박수라도 치고 싶다. 고운 빛으로 잘 익은 고운 자태의 부드러운 복숭아를 사들고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딸이 우리 부부에게 청량한 피를 흐르게 하였듯이 복숭아도 어머니에게 새 피를 흐르게 하리라.

흠이 있는 복숭아를 볼 때면 생각나는 어머니, 생을 다하시는 날까지 진한 사랑으로 우리 곁에 계시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까. 속내를 감춘 채 풀어 놓으시는 말을 듣는다. 노랗게 물든 저녁 노을이 어리는 구십 고개의 어머니의 얼굴에 복숭아의 흠집마냥 저승꽃이 덮고 있다.

경로당으로 휘적휘적 들어가시는 뒷모습에 죄송합니다를 되뇌이며 앞질러 눈물이 흐른다.

[우수상]

아버지

강경자

며칠 채 지리멸렬한 한 여름의 더위는 밤이 되어도 물러설 줄을 모른다. 밤 9시를 넘긴 지금도 사방천지는 더위뿐이다. 내 몸 또한 식을 줄 모른다. 벌써 여러 날 선잠을 자고 있다. 내 입에선 연신 덥다는 말이 푸념처럼 터져 나온다.

사십 년 넘게 만난 여름인데 난 아직도 무더위와 씨름 중이다. 이럴 때 한줄기 소낙비라도 내리주면 얼마나 좋아, 하늘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저녁상을 물린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이런 무더위에도 졸음이 몰려온다. 거실 바닥에 등을 댄 채 눈을 감아 본다. 누군가 내 몸을 자꾸 잡아당기고 있다. 무기력증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수 없는데 난데없이 어디선가 나는 복숭아 향을 따라 가고 있다. 아버지는 꿈결 속에 마치 살아계신 듯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은 복숭아 과수원을 했다. 아버지께서 살아 생전에 하신 마지막 사업이었다. 두 살 위 언니와 나는 여름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엄명으로 과수원에 나가 일손을 돕곤 했다. 잘 익은 복숭아를 따 상자에 넣어두면 아버지는 그 많은 상자를 어디론가 가지고 나가셨다. 때로는 복숭아를 먹으러 삼삼오오 손님들이 찾아오면 복숭아를 뽀드득 뽀드득 씻어 가져다 주면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날에는 용돈이 귀했던 탓에 손님이 내고 간 복숭아 값을 슬쩍 내 주머니에 넣곤 했다.

언니와 나는 넓은 과수원의 복숭아나무 중 가장 맛난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알게 된 그날부터 공범자가 되었다. 아버지 눈을 피해 주먹만한 복숭아를 따 찬물에 뽀득뽀득 씻어 먹으며 희희낙락거렸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를 위해 우리는 과감하게 백도까지 손을 대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썩은 복숭아가 더 맛있다며 성한 것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다.

나는 밤이면 과수원 초입에 있는 원두막에서 그 해 여름을 거의 보냈다. 명목은 서리꾼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난 그 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낮부터 과수원을 활보하며 서리를 한 장본인인 내가 아닌가.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아버지는 나를 그저 잔심부름 잘하는 일꾼으로만 여긴 것이다. 홀로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그곳이 나에게는 무릉도원이나 매한가지였다. 여름밤의 바람 속에는 농익은 복숭아의 달콤함이 묻어 있었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포만감에 젖은 채 원두막에서 설핏 잠이 들곤 한다.

뜨거운 태양이 연일 이어지면 복숭아는 점점 농익어 갔다. 주먹만 한 복숭아를 야금야금 먹어 치운 우리들의 볼 살은 점점 통통해져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야위어만 갔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마른 모습뿐이다. 바지가 늘 허리에서 흘러내릴 듯 위태위태했다. 언제부턴가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밤이면 '막내야! 막내야, 아버지 발 좀 씻어봐라' 하신다. 아버지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와 비쩍 마른 발을 씻겨 드리기 무섭게 방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운 채 코를 고셨다.

아버지의 수중에 있던 돈을 다 투자한 과수원의 수입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막내 딸인 나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는 대신 취직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아버지는 자장면을 사 주셨다. 태어나 처음 먹어본 그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가 부모가 된 후에야 자장면의 색깔처럼 그 때 아버지의 속도 까맣게 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 나는 대학을 못 간 것만 서운해 했다. 과수원 사업은 2년을 겨우 넘기고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혼미한 내 정신을 흔드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창문 밖에선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앞 베란다의 버티컬 블라인드도 좋은가보다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열어 놓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비로 인해 베란다 바닥이 흥건하다. 지독히 찌던 더위를 식혀 줄 모양이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복숭아 단맛은 씻겨 내려가면 안 되는 데, 내 마음은 다시 복숭아 과수원에 가 있었다. 한 여름 비바람에 떨어진 복숭아를 줍는 날이면 아버지는 유달리 말이 없었다.

85년 여름 아버지는 조상의 묘를 당신 손으로 화장을 하고 돌아오신 그 날 뭐가 그리 바쁜지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다. 부지불식간 아버지의 배는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다급하게 찾아간 병원에선 큰 병이 아니라고 했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는 엄살쟁이가 되었다. 엄마는 할머니께서 혼자 집에 계시니 우리들보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다. 한치 앞을 모른 채 우리가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 아버지는 이생과 작별을 고한 것이다. 자손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조상의 묘를 없애고 삼일 만에 아버지의 묘가 만들어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은 해마다 찾아온다. 열대야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해마다 8월이 되면 과일가게 가판대에 놓여있는 복숭아를 통해 내 여고시절의 추억은 다시 살아난다. 주먹만한 복숭아를 보면 아직도 침이 꿀꺽 넘어가 소쿠리에 오롯이 앉아있는 한 바구니를 사 수돗물에 뽀득뽀득 씻어 한 입 깨물어 본다. 장맛비에 단맛을 잃은 건지 영 신통치 않다. 눈물이 난다. 서리하지 않아도 마음껏 복숭아를 사 먹을 수 있는 지금 내 곁엔 아버지도 할머니도 다 먼 먼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아직도 그 자리엔 복숭아 밭이 있을까.

[우수상]

내 마음의 은지 복숭아

백현실

흰색 반팔 티셔츠에 빨간 멜빵 치마를 입고 머리를 뒤로 한껏 당겨 묶은 은지가 폴짝폴짝 뛰어간다. 과일가게가 보이자 내 손을 놓고 달려간다. 나는 그런 조카가 너무 예쁘다. 은지도 이모인 나를 무척 따른다. 은지가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리고는 복숭아를 가리킨다. 복숭아를 샀다. 과일바구니가 발그스레한 엉덩이로 가득 찼다. 은지의 뺨이 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오른다. 자그마한 입이 방긋 벌어진다. 달콤한 복숭아 향내가 코끝에 와 닿는다. 두 사람의 가벼운 발걸음이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린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은지는 복숭아부터 꺼내든다. 꺼낸 복숭아를 모두 제 앞에 당겨 놓는다. 복숭아 껍질을 살살 벗겨내자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나는 은지가 먹기 좋은 크기로 복숭아를 잘라 주었다. 아이는 큰 복숭아 두 개를 먹고 나서야 만족스런 표정으로 물러나 앉는다. 그런 은지의 살결은 복숭아 속살처럼 하얗고 뺨은 발그스름하다. 그 뺨에 귀여운 볼우물이 살짝 파였다. 나는 은지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은지는 예쁜 복숭아 같았다.

며칠 후 언니가 복숭아를 많이 사왔다. 복숭아는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여름 과일 중에서 늘 복숭아가 가장 먼저 동이 났다. 저녁 식사 후, 우리 가족은 모두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며 하루를 이야기했다.

그 날은 언니 덕분에 실컷 복숭아를 먹을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닦아 온 복숭아를 보더니 은지가 갑자기 아무도 먹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복숭아를 자기와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자기와 나, 두 사람만 먹게 했다. 다른 가족들이 한 조각이라도 먹으려고 하면 울면서 생떼를 부렸다. 다른 날보다 심했다. 아마도 나와 둘이서 먹고 싶었나보다. 달래도 보고, 혼도 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날 우리 가족은 은지가 잠들고 나서야 밤늦게 복숭아를 먹을 수 있었다. 제 딴에는 과일가게 손잡고 다니는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나보다. 언니는 그런 은지가 너무 서운하다며 살짝 눈물바람을 했다. 회사 다니느라 아이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 부족한 언니였다. 언니네 가족은 은지가 태어난 후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형부는 식구가 많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기 원했다.

은지는 사랑스런 아이였다. 내가 집에 들어오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노래를 하면 은지도 따라했고, 책을 보면 자기 동화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했다. 내가 손빨래를 하면 자기도 하고 싶다며 마당으로 따라 나섰다. 은지에게 손수건 한 장을 건네주면 열심히 빨래를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야무지게 하는 것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둑어둑해지면 은지는 엄마를 기다렸다. 그날도 은지는 엄마가 왜 오지 않느냐며 보챘다.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복숭아 많이 사 가지고 온다며 은지를 달랬다.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은지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안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다. 벌써 바깥은 어두워졌다. 식구들이 모두 은지를 찾으러 나섰다. 두어 시간이 지났다. 은지를 찾을 수 없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대로 은지를 잃어버릴까봐 겁이 났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 같이 있어줘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정신없이 아이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과일가게로 갔다. 은지에게 익숙한 길이고, 언니가 퇴근하는 길목이다. 가게로 가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은지가 거기 있었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복숭아를 먹고 있었다. 뛰어 들어가 아이를 안았다.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런데 정작 은지는 천진한 얼굴로 복숭아만 열심히 먹고 있다. 서운했다. 이모보다 복숭아가 좋은가보다.

은지는 우리 집의 보배이며 웃음의 원천이었다. 모두가 그 아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섯 살 박이 은지가 몹쓸 병에 걸렸다. 뇌종양이었다. 너무 놀라웠고, 황당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하필 은지일까. 화가 났다. 하늘을 원망했다.

힘든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몇 번에 걸친 수술과 항암치료로 인해 은지의 까맣고 탐스런 머리카락은 모두 사라졌다. 은지의 얼굴에서 웃음이 자취를 감추었고 핏기도 없어졌다. 밝고 티 없는 아이였는데 짜증이 늘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생각만 해도 가슴을 칼로 저며 내는 것 같았다.

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돌봤다. 심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어떠한 말도 언니와 형부에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 속에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하나씩 들어앉았다.

암은 은지의 몸속으로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갔다. 아이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암 덩어리였다. 아이의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새털처럼 가벼웠다.

은지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복숭아를 샀다. 복숭아를 은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얼른 일어나서 이모랑 같이 복숭아 사러가자고, 그리고 우리 둘이 그 복숭아 다 먹자고, 말했다. 그럴 때면 은지는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초점 없는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부서질 것 같은 은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울음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목 안에 갇혀버렸다.

은지가 떠나던 날에는 안개가 심했다. 푸른 안개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방이 습기에 젖어 푸르렀다. 선들만 희미하던 먼 산조차 자취를 감췄다. 가까운 산들은 휘돌아 나가는 안개를 따라 그 몸을 잠깐씩 내보이다가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늘 다니던 길도 푸르게 변해 물인지 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안개에 몸을 맡긴 길은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잃은 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물과 길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혼돈 가운데 있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안개를 몰아내려 애썼다. 한동안 팔을 내젓던 나는 안개에 자신을 맡겼다. 나는 힘겹게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안개가 스치고 지나간 자국들을 되새겼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조금씩 주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산도 물도 모두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흐르던 그 곳에 있었다. 안개와 함께 뒤섞여 있던 길도 내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은지가 떠나고 삼년이 되던 그 해 여름, 기쁜 소식이 화사한 봄날의 복사꽃처럼 모두의 마음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새로운 생명이 언니의 몸에 들어섰다. 유난히 입덧이 심한 언니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그저 좋아하는 복숭아만 조금씩 먹었다. 어떤 때는 그것도 다시 토해냈다. 은지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태어난 아이는 은지를 많이 닮았다. 복숭아 좋아하는 것은 아주 똑같았다. 먹는 모습하며, 자기 앞에 복숭아를 끌어당기는 것까지. 이제 조카는 나와 과일가게를 가지 않는다.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간다. 아이는 복숭아를 보면 팔랑팔랑 나비처럼 걸어간다. 그리고 복숭아 앞에 선다. 웃는 얼굴로 엄마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한 아름 복숭아를 사들고 오는 아이의 얼굴은 해처럼 밝다.

그런 조카의 얼굴에서 나는 은지를 본다.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에서 은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팔랑거리는 몸짓에서 과일가게로 나를 이끌던 은지의 따뜻한 손이 느껴진다. 다시 볼 수 없는 은지를, 은지의 동생을 통해서 보는 것이 내 가슴에 푸른 안개가 되어 가라앉는다. 나는 그때마다 가만히 은지와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본다. 그러면 복숭아 빛 뺨을 가진 은지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 와 머문다. 그것은 달콤한 복숭아 향기다.

다시 복숭아가 익는 계절이다. 과일 가게의 복숭아가 내 걸음을 멎게 한다.

그 진하고 달콤한 향내가 내 마음의 아픈 상처를 흘깃 스친다.

[심사평]

문학성과 철학성이 우선한 정돈된 문장

윤재천 한국수필학회 회장

작품은 문학성과 철학성을 우선하며 문장이 정돈되어 있을 때 진가가 더해진다. 그러나 선정된 작품들은 '복숭아'에 포인트를 두었으므로, 복숭아를 중심으로 한 주제의 선명함과 작품의 구성 면을 고려하며 선정하였다.

<어머니의 향기>는 운명적으로 복숭아와 글쓴이, 어머니가 밀접한 관계 선상에 놓여 있다. 글쓴이는 이슬을 밟으며 과수원에 나가 신중한 작업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며 행복감을 맛보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엔 어릴 적 남의 집 과수원에 나가 복숭아 작업을 하며 품삯을 받아 오던 어머니, 명절이면 추석빔으로 '분홍빛 원피스'를 사 주시던 어머니를 그려내고 있다.

'분홍빛 원피스'는 마침내 또 하나의 상징적인 복숭아가 되어 장성한 딸에게 복숭아 농사를 짓게 하며 많은 사람에게 먹음직한 복숭아를 제공하고 있다.

글쓴이는 어릴 적 어머니는 복숭아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어머니가 된 지금은 그것은 자식들을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가장 빛깔 좋고 싱싱한 복숭아로 골라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하였다.

<상한 복숭아>는 20여 년전 자식이 없는 부부 사이에 햇살 같은 딸 아이가 다가온다. 피는 섞여 있지 않지만 그 후부터 가족과 그들 부부는 그 아이를 통해 복숭아 향기에 취하게 된다. 문제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면서도,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될 복숭아처럼 위벽에 용정이 닭벼슬처럼 돋아날 정도로 고통의 시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며느리도 구순의 나이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시어머니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자기 자신도 상한 복숭아라고 생각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내 마음의 은지 복숭아>는 빛과 그림자, 다시 햇살로 거듭나는 글이다. 복숭아를 수확하는 계절이 되면, 조카 은지와의 시간들을 곱씹곤 한다.

복숭아를 좋아하던 어린 조카가 뇌종양으로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자, 가슴 속에 부수지 못할 절벽을 감싸 안고 그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조카는 회생되지 못할 생명이 되어 먼 곳으로 떠났지만, 그 영혼은 건강한 동생을 세상으로 보내 주고 있어 가족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다.

<아버지>는 생전의 아버지가 마지막 사업이었던 과수원 농장을 회상하고 있다.

아버지는 대학입학을 반대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식 날 자장면을 사주시던 추억에 생각이 머물고 있다.

본인이 부모가 된 후 '자장면의 색깔처럼 그 때 아버지의 속도 타고 있었다'고 깨달으며, 2년 후 남의 손으로 넘어간 과수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버지는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추억 속에서 존재하는 실체들을 더듬으며 작품을 마무리 하고 있다.

윤재천

전 중앙대 교수,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겸 주간,

현대수필문학회 회장,

한국수필학연구소 소장

출처 : 동목수필사랑방★
글쓴이 : 김근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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