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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생은 한줄기 바람이런가 …

테오리아2 2014. 6. 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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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줄기 바람이런가 / 野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3월 초순인데도 꽃샘추위로 온몸이 오슬오슬하다. 중국 4대 미인에

들어가는 전한 시대 왕소군은 고향이 그리운 애절한 심정을 그녀의 시(詩)에서 '춘래불사춘'이라

 읊었다던가. 나도 내 마음의 아늑한 봄날을 찾지 못하고 추위 속에 휑뎅그렁하게 남겨져 있다.

 

작은아들과 집사람은  여느 날처럼 7시도 안 돼 출근하고 집에는 나 혼자다. 아무 보탬도 못 되고

하릴없이 얹혀 사는 처지의 내가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전업주부'는 아니지만 청소라든지 일이 

그나마 몇 지 있어 다행이지 싶다.

 

오늘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수거통에 내다 버리고 조금 떨어진 등나무 아래 벤치에 도카니 않으니

나도 몰래 상념에 잠기게 된다. 폐암수술 후 내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머잖아 떠나더라도

가족들 화목하고 무탈하게 잘 살아야 할 텐데….두 번이나 수술한 집사람 무릎도 빨리 나아야 하고...,

큰아들은 성혼해 따로 살림났으니 됐고, 이제 죽기 전에 은아들 장가는 꼭 보내야 할 테고….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봄은 바람의 계절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찬바람이 제법 분다. 근처 벤치에 등산용 파카를 입은 한 중년

 여인이 모자를 꽉 눌러쓰고 햇볕을 등진 채 앉아 있다. 이웃인지 옆에는 다른 한 여인이 긴 머플러로 

머리와 얼굴을 친친 감고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있다. 추운 곳에서 할 얘기가 참 많은 사람들인가 보다.

새 집 짓기를 얼추 끝내가는 까치 두 마리는 오늘도 왔다갔다 열심이다.

 

폐암수술을 한데다 요즘 혈당수치가 좀 오른 듯해 매일 한 시간 정도의 걷기운동을 거르지 않고 있다. 

늘은 좀 빡세게 관악산에 가려다 날이 차 그만뒀다.절제한 오른쪽 폐가  찬바람에 오래 노출되는 건

 좋지 않은데다 꽃 피는  봄날은 줄을 서 기다릴 테니 날 풀리면 자주 가지 뭐 하며 해이해진 탓이기도

 하다. 대신 선걸음에 안양천변 뚝방길을 조금 걷다 왔다.

 

어릴 때 낙동강의 양안 둑까지 물이 꽉 차고 가재도구랑 낙과들이 자물자물하고 바람이 몰아쳤어도

나룻배를 건너 통학을 했었다. 강을 건너는 데만도 두 시간 넘게 걸렸었다. 친구 아버지가 사공이었다.

 돛배가 아니라 노를 저어야 했고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밖에 태울 수 없는 조그만 나룻배였다. 

강심에서 바람이 세지고 파랑이 크게 일면 사공은 노젓기에 거의 죽을 쒔다. 꼬맹이들조차 뱃전에

위태위태 달라붙어 바가지 같은 것으로 또는 손바닥으로 물을 헤치며 도왔었다.

 

오일장날에는 소 돼지도 배에 함께 태우기도 했다. 드룰기는 했지만 배가 많이 흔들리다 보면  소가

강물에 빠지기도 했다. 보통 촌부들의 재산 1호였던 소는 그러나 강물에 휩쓸리면서도 무리하지 않고

자신을 물살에 맡겨 십 리나 떨어진 하류의 강기슭로 살아 나왔었다.헤엄을 잘치는 편인 말은 성급히

나부대다 지쳐 죽지만 외려 우둔한 듯한 소는 산다는 '우생마사(牛生馬死)'였다.

 

낙동강 가까운 산골동네에서 자라서였는지 나는 어릴 적부터 바람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여름철

 보리 타작할 때 불어주던 바람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타작 후 가래질해서 가시랭이 날리려면 바람이

절실했고 바람 일으키려 풍로를 힘들게 밟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불어주는 바람은 어쩜 축복이었다.

사하라 태풍 때는 집 주변의 감나무에서 우두둑 떨어지는 감을 주우려다 하도 바람이 세어 감나무

둥치에 두 손을 깎지 끼고 죽으라고 매달렸다가 나무 둥치 자체가 우직하고 뿌러지는 무서운 일도

있었다. 날려가는 나를 아버지가 뛰어 나오셔서 마치 감 줍듯이 주웠다.

 

기자로 전직하기 사우디 리야드 사막 속의 와디(비 올 때만 물이 잠시 흐르는 계곡) 놀러갔다가 전방

몇 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모래 바람을 만나기도 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려 200리터 크기의 

드럼통 세로로 잘라 만든 화덕에다 구워 먹던 양고기는 지금까지 그 황홀한 맛을 잊을 수 없다.

기억으로는 그 당시에는 소고기보다 네 배 정도 비쌌던 게 양고기였다. 

9월 말쯤 어느날 두터운 등산복 없이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중청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맞바람은

몸이 날려 거의 뒤로 밀릴 정도였다.체감온도는 영하로 떨어졌고 산행 후 감기로 며칠 고생하기도 했다.

 

바람이 어디 공기의 이동에 따른 자연바람만 있으랴. 어쩌면 마음속에서 일었던 바람이 인생을 살면서 부닥친 더 큰 바람이었으리라. 통제불능의 대책없는 바람도 있었다. 자연 바람이 기압 차이로 공기가

움직이는 것이듯 인생 바람도 마음이 한결같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떤 감정이 겁없이 부풀거나

마음이 가끔 공밭으로 외출할 때 이는 것이 아닐는지.

 

엄마는 중3때 대구로 자취시작하러 나가는 나한테 도회 바람이 들까 그게 큰 걱정이었던 것 같다.

"*비민히 하겠지만..." 하며 말꼬리가 길어졌다. 내겐 사족이었지만 그건 엄마의 가없는 사랑이었다. 

땅속에 파묻어 놓은 무가 혹시 바람이 들까 봐 단도리(채비)를 하고 또 하던 것처럼.

결혼해서는 한 눈 딴데 파는 바람이 날까 봐 또 노심초사하셨다 .하지만 어디 바람 잘 날이 있었으랴.

나 때문에 바람이 일었던지 바람 때문에 내가 흔들렸던지 아무튼 젊은 시절 내게서 늘 바람이 떠나지

않았다.

 

이제 내 몸속에는 몹쓸 신체적 바람이 들었다.연식이 제법 되긴 했지만 요즘 몸이 가볍지 못하다.

허파에도 바람이 들어 재작년에는 폐암수술을 했다.혈압도 혈당수치도 높은 편이다.함에도 마음속에

부는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뭔가 새롭고 흥분되는 일이 없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가족이나 사회통념의 잣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문득문득 인다. 세월의

흐름에 그 풀이 좀 꺾여지긴 했지만. 관뚜껑을 닫아야만 바람이 그칠는지….

 

법정 스님의 수필 '나의 취미는'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인내다.' 

'춘래불사춘' 자꾸 되뇌지 말고 이제 내 취미도 '인내'로 바꿔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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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으로, 시기에 어울릴 만한 상황이 아닐때 사용하는 말이다.

*비민히=으레 알아서

 

 

천(千)의 바람이 되어(A Thousand Winds)/Hayley Westenra

 

출처 : 小說 隨筆 & 삶의 얘기
글쓴이 : 野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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