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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원무(女圓舞)

테오리아2 2013. 6. 1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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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무(女圓舞)

 

 

               이상렬/ 2010년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 입상

 

 여인은 햇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깨끗한 봄 날, 화려한 꽃으로 수놓은 화관은 여인의 머리위에서 춤을 춘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 날아보려고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학처럼 숭고하기 까지 하다.

 

여인의 춤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속에 비장함이 있다. 아름답지만 민족의 한이 서려있다. 흥이 있지만 아픔과 눈물이 어려져있다. 여인은 머리위에 3미터나 되는 화관을 쓰고 온 힘을 다해 제 몸을 던진다. 힘에 겨워 보인다. 굻은 땀이 솟아져 내린다. 그럴수록 춤은 도천산의 정기를 받아 더 화려하게 봄 하늘을 수놓는다.

 

 순간, 춤꾼은 탐욕에 물든 침략자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유혹해 낸다. 욕정의 남정네들은 여인의 춤사위에 허물허물 녹아든다. 춤의 신기함과 풍악의 흥겨움에 넋을 잃는다. 그리고 이 춤은 침략자들을 향해 거룩한 응징의 칼로 변한다. 이 춤이 바로 여원무다.

 

 경산시 자인면에서는 단오절에 한장군 놀이라는 민속놀이가 행해지고 있다. 원래 한장군은 이 지역 단오절의 중심행사인 여원무(女圓舞)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이다.

 

 한장군은 고려의 장수로써 왜적이 침범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그는 여자로 가장한 뒤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관인 여원화(女圓花)을 쓰고 산 아래 버들 못 둑에서 광대들의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자 왜적들은 산에서 내려와 여원무에 반해 흠뻑 취한다. 그때 춤을 추던 한장군과 광대들이 모두 무사로 변하여 왜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 뒤 이 고장에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기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거행하고 성대한 놀이를 베풀고 있다.

 

 침략자들에게 짓밟혀 도천산(到天山)위에 웅거하며 지냈을 내 고장 나의 선조들을 생각해 본다.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온통 두려움과 회의, 불안과 염려만이 그들의 산 위의 삶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들의 내면은 희망의 파도가 일렁거리지도 않고, 생기와 기쁨의 샘이 솟지 않는 벼랑 끝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지치고 허기진 삶에 생기를 불러일으킬 자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한장군, 그가 여원무를 추며 분연하게 일어난 것이다.

 

 여원무는 잔치집의 취객들이 추는 유흥의 춤이 아니다. 현란한 조명아래에서 무희들이 흔드는 유희의 춤도 아니다. 여원무는 전장의 춤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생존이요. 사명의 춤이다. 그래서 여원무는 마냥 나약하지만 않다. 여원무는 여인의 부드러움 속에 남성의 강인함이 감추어져 있다. 가냘픈 여인 안에 대장부의 기백이 숨어있다. 절망 속에 피어난 희망의 춤이요. 갇힘 속에 족쇄를 푸는 자유의 춤이요. 눌린 응어리의 설움을 터트리는 해방의 춤이다.

 

 나는 여원무의 고장 경산 자인에서 태어났다.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불혹을 훌쩍 넘은 중년을 맞이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남의 세월처럼 여겨왔던 중년은 내게도 찾아왔다. 그래서 인지 생(生)의 언덕에 서서 맞이하는 거센 바람이 이렇게도 매섭게 느껴지는 걸까. 이 중년의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 앞으로 살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이 중년. 못다 이룬 꿈 때문일까.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어중간한 나이라서 그럴까. 현재의 허전함을 이기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미래로부터 힘을 빌려 오기엔 앞날이 너무나도 어둡기 때문일까. 나보다 너, 나의 삶보다 너의 삶을 위해 이렇게도 치열하게 달려왔건만 이렇게도 허전한 건 왜일까.

 

 이런 텁텁한 기분이 들 때면 나는 곧잘 차를 몰기를 좋아한다. 목적지가 없다. 무작정, 무조건이다. 목적지를 두고, 또 계획을 세워서 떠나면 또 하나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딸려 종속되거나 의무적 관계를 싫어하는 성미는 이런 것 하나에도 드러난다. 그냥 자유하고 싶어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참을 운전하다 보면 매번 차는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고향 경산을 돌아 자인으로 달리고 있다. 일종의 회귀본능일까. 이것이 바쁜 일상 중 나의 조각여행인 셈이다. 마침 자인 단오가 열리는 날이다.

 

 차를 몰고 가다보니 경산 공공단체 곳곳의 간판에 "삶의 춤 운동" 이라는 글귀가 부서지는 봄 햇살과 함께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경산시가 주도하는 캠페인이다.

 

"중인하심 선도경배(衆人下心 先覩敬拜)"

 

 즉 '만인에게 스스로 나를 낮추고 먼저 서로를 우러러 보면서 존경하고 내가 먼저 상대를 경배한다'는 뜻이다. 논밭에 나가 허리 굽혀 일하는 노동의 춤과 사랑과 평화의 덕목인 내가 먼저 허리 굽혀 절하는 예절의 춤이 삶의 춤이다. 삶의 춤은 나만을 위한 춤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춤이다. 자신은 내리고 다른 이를 올리는 춤이다. 자신을 비우고 조국을 살리는 춤이다.

 

 여원무는 삶의 춤이다. 몸의 춤사위를 넘은 내면의 춤이다. 콧노래를 부르고 흥에 겨워 추는 춤이 아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버거워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거룩한 춤이다.

 

 차를 잠시 멈추고 군중들 속에서 여원무를 바라본다. 내가 밟고 서있는 이 곳. 바로 이곳이 한장군이 삶의 춤을 췄던 곳이다. 이곳에 한장군이 숨 쉬었고, 또한 이곳이 한장군이 민족의 아픔을 껴안고 오늘 처럼 청명한 하늘을 보며 걸었던 곳, 뜨거운 심장으로 조국을 사랑했던 곳이다.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죽음 같은 암울한 현실에서 삶의 춤을 추었던 것이다.

 

 나는 여원무의 한장군을 만났다. 진정한 대장부를 만났다. 그래서 이제는 중년의 엄살을 떨고 싶지 않다. 살아보니 지금이 정말 좋은 나이라는 것을 여원무를 추는 대장부를 보며 느꼈다. 그도 중년일까. 그렇게 믿고 싶다. 춤의 마지막은 실로 격렬하다. 열정적이다. 그 열정 속에 중년의 그윽한 이름다움이 엿보인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기품이 있는 열정이라서 더 안정감 있어 보인다.

 

 여원무의 풍악 한 가락이 봄바람에 실려 날아와 눈물이 날 것 같은 허 한 마음을 다독거려준다. 이 춤이 생애 마지막 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몸을 던져 추는 저 대장부의 삶의 춤처럼, 나도 내게 주어진 삶의 춤을 여한 없이 추며 살자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아직 울렁거릴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이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 크리스찬 수필문학회
글쓴이 : 선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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