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스크랩] 비슷한 느낌, 같은 수필

테오리아2 2017. 6. 1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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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두 글이 매우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같이 올려봅니다.


봄, 수목원을 읽다/윤승원




봄, 수목원은 만연체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화려한 문장을 쓰느라 술렁거린다. 노랗고 빨갛고 흰 색깔들이 나의 독서를 유혹한다. 나는 청명의 안개 속을 걸어 만화방창 꽃의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 병아리 깃털 같은 햇살이 민들레처럼 피어나는 낮 시간도 좋고, 청자 빛 하늘이 노을로 채색되는 저녁 무렵도 좋지만 나는 안개 자욱하게 깔린 여명의 수목원을 좋아한다.
제비꽃, 족두리풀, 목련, 명자꽃들이 새 명찰을 달고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듯 손을 흔들고 서있다. 문고판 같은 야생화며 전집류의 나무들이 수목원도서관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이 푸른 도서관의 사서는 잠시 출타중인 모양이다. 바람이 먼저 책을 읽으려는지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나는 서둘러 달려온 마음을 옆에 내려놓고 형형색색으로 단장된 신간들을 골라 읽는다. 사춘기 때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던 생각이 나서 설핏 웃음이 난다. 깨알 같은 글씨들을 놓치지 않으려 쪼그려 앉았다 허리를 굽혔다 발뒤꿈치를 들었다하면 그 때마다 나무와 풀꽃들이 내 불편을 덜어주려 같이 쪼그려 앉았다 허리를 폈다 키를 낮추어준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이만큼이나 할까. 초신성처럼 노란별을 마구 터트리는 생강나무, 자주색튀밥을 펑 튀기처럼 튀겨내는 박태기나무, 개 불알을 덜렁덜렁 매달고 있는 개불알꽃, 초롱모양의 귀걸이를 흔들고 있는 히어리. 나는 꽃과 나무가 전하는 휘황찬란한 문장에 주-욱, 밑줄을 긋는다. 문장들은 내 마음의 텃밭에 새겨진다. 꽃의 문장은 화려하지만 현학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무량한 깊이를 가진다.
꽃의 문장은 넉 장이다가 다섯 장이다가 홑받침이다가 더러는 겹받침이다가 변화무쌍하다. 꽃들의 배색은 어떤 단청보다 곱고 정겹다. 어느 채색가나 디자이너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독창적이다. 현호색은 보라의 농담(濃淡)이 아름답고 꿩의 바람꽃은 흰색과 노랑의 어우러짐이 다정하고, 깽깽이풀은 금방이라도 여우울음소리를 낼 것 같다. 꽃을 꺼내는 줄기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꽃받침과 꽃잎의 황금비율의 기울기 등은 인위적인 힘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없는 천연의 아름다움이다.
야생화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동물원처럼 야생의 식물을 가두어둔 것에 대해 내심 못마땅해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나마 꽃을 가까이 두고서야 각박한 현실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꽃을 바라볼 때의 마음엔 악이 없다. 사람들은 꽃을 보는 순간 선해지고 샘물처럼 맑아지게 된다. 잠시 꽃을 바라보면서 세파에 찌든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꽃들은 피어날 때를 알고 져야할 때를 제대로 지킨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한다. 명예와 부에 집착하지 않고 시들어 사라지는 것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타자와 더불어 대동(大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가지면 더 가지려하고,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만을 고집하며 주변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한낱 풀과 나무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꽃과 나무들은 우리를 가르치는 훌륭한 책이 아닐 수가 없다.
수목원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의 고비를 넘어오느라 받은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 받는다. 추위와 강풍을 인내한 꽃들이 피워 올리는 환희의 시간들을 보면서 내 삶의 고단함들도 어느 순간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나는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저 풀과 나무처럼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 내가 나를 반성하는 때도 바로 이곳 수목원에서이다.
혹, 도연명의 도원기(桃園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닐까? 나는 고기잡이가 되어 길을 잃고 여기 수목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도 가도 온통 꽃으로 덮여있는 화원의 심연. 꽃잎은 푸른 잔디 위에 펄펄 눈처럼 날아 내리고 나는 그만 속세에서 실종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꽃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꽃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이제 꽃과 합일하여 한 몸이 된다.
다산(茶山)은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시를 나누었다고 한다. 조선조 책벌레인 이서구는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자신의 방을 소완정(素玩停)이라 불렀다. 풀벌레며 새들의 죽란시사에 귀를 기울여본다. 꽃책으로 울타리를 삼은 이곳을 가만히 나의 소완정이라 불러본다.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券氣)라 했다. 무릇 글씨에서는 향기가 있어야 하고 서책에서는 기(氣)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벌, 나비며 햇살과 바람, 사람까지 찾아들게 하는 꽃들이야말로 자연이 쓴 최고의 금석문이 아닐까?
어느새 해가 떠오른다. 꽃잎 끝에 매달려 있던 이슬꽃들이 반짝 마지막 문장을 남기며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다가는 꽃. 생과 사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저 촌철살인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묘미 때문에 나는 여명의 수목원을 즐겨 찾는 것이다.
봄, 수목원은 싱그럽고 향기로운 도서관이다. 저마다 제 몸 속의 붓을 꺼내 혼신의 힘으로 일필휘지하는 꽃과 나무들. 나의 독서는 초록의 묵향에 흠뻑 물이 들었다. 나는 무슨 문장으로 이 봄을 기록할까? 수목원을 걸어 나오는, 오늘은 내 몸이 꽃이다.


-작가의 말
봄, 뿐만 아니라 저는 휴식이 필요하면 야생화를 만나러 갑니다.
야생화를 찾아다니면서 체력도 좋아졌고, 그들과 조금씩 친교를 더해갈 즈음 그들에게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여리디 여린 풀꽃으로 모진 비바람을 견뎌 내고 따가운 햇살과 매서운 겨울도 묵묵히 버티고서야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한 송이 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꿇어앉아서 보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사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 여겨 내 살아온 생이 힘들었다고 엄살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살다가 힘들고 힘에 부친다 싶으면 야생화를 만나러 산으로 들로 찾아다닙니다.
그들에게서 받는 위로가 사람에게 받는 것보다 좋았습니다.
자연은 제게 많은 것을 나눠 주었습니다.
건강과 웃음도 주고 겸손함을 가르쳐주고, 인내심도 길러주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표현했더니 천강문학상이라는 큰 상도 안겨주더군요.
제가 받은 천강문학상은 그들에게 주어진 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 수목원의 꽃을 책으로 비유한 착상이 뛰어나고 인유를 도입한 기법과 문장 구사력에 빈틈이 없다.“봄, 수목원은 만연체다.”라는 서문에서 시작한 흡인력과 집중력이 끝까지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깊은 성찰과 해석력이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얻었다- 천강문학상 수필 심사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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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 오래된 도서관 /김영식
2011.05.26

뻐걱, 숲의 문을 떠밀면 꽃과 나무들은 수백만 권 푸른 장서가 된다. 오솔길 하나 고즈녁하게 걸어오고 어디선가 차르르!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고마리며 쑥방망이, 꽃향유들이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다. 새로 발간된 문고판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어디 꽃들의 책뿐이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들이 온고지신, 초록 위에 단풍을 덧얹고 산등성이에 고요히 펼쳐져 있다.
이때쯤이며 으례 늙은 사서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 숲의 사서는 오랜 지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종내 가늠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숲에 살았다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산을 찾는 모든 이에게 두루 친절하기 때문이다. 인자요산이라 했던가? 품성이 온화한 사서는 어느 때 찾아가도 반가운 표정으로 산 구석구석을 안내해준다.
산중턱에 이르자 먼저 온 사람들이 땀을 식히며 쉬고 있다. 어떤 이는 산국을 읽기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서어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다래덩굴을 읽기도 한다. 빛나는 문장을 들려주려고 아침이슬로 부지런히 몸을 닦는 꽃, 나무들의 수런거림. 추사 김정희는 문자향이라 했다. 무릇 글에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숲속 도서관엔 저마다 향기 나는 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계곡이 행간처럼 깊어지는 골짜기에 느릅나무 군락지가 있다.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그중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나무 곁에 나를 앉힌다. 울퉁불퉁한 회색의 껍질들이 상형문자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래된 나무일수록 옹이가 많다. 옹이는 나무가 삶의 질곡을 넘을 적마다 그어놓은 밑줄일 것이다. 어떤 곳은 굵게 또 어떤 곳은 깊게 새겨진 자기성찰의 흔적들. 단단하고 서늘한 기전체의 문장을 읽는다. 라코타 인디언들은 살면서 힘든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길을 묻는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야말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나는 지혜의 책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들은 모두 할머니를 닮았다.
다람쥐가 가지 끝에 앉아 잣나무를 정독하고 있다. 산비둘기는 가까운 듯 먼 곳에서 '구구 없으면' '구구 없어도'하고 아침 산을 읽는다. 다람쥐와 산비둘기는 이 숲 도서관의 부지런한 애용자이다. 매일 숲에서 생활하니 독서가 심오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을 찾으니 아무래도 그들보단 독서가 얕은 게 사실이다. 두보는 남아수독오거서라 했다. 모름지기 학문하는 자는 다섯 수레에 가득 찬 책을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다섯 수레의 책은 대략 오천 권 분량이라 하니 제대로 된 한 줄의 문장도 어려워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독서량에 상관하는 것 같다.
감어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이다. 자연이야말로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가장 훌륭한 거울이 아닐까! 자연 앞에 서면 우리는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진다. 그러나 감어자연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고금의 문장으로 가득 찬 숲은 현자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숲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친절한 사서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책의 역사는 고대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500년경의 파피루스에서부터 대나무, 닥나무, 지금의 펄프까지 책의 재료인 종이는 모두 나무나 풀에서 기원했다. 그러니 이 도서관의 책들이야말로 완벽한 원서인 것이다. 햇살이 따가워지자 느릅나무가 몸속에서 시원한 그늘멍석을 꺼내 발아래 깔아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을 내려간다. 오늘은 저마다 어떤 책을 읽고 세상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일까? 노랑턱멧새 한 마리가 '츄이' '유이' 소리를 내며 물푸레나무 우듬지를 떠나 구름의 이마까지 솟아오른다. 저마다 가슴 속에 푸른 책 한 권씩 품고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을했살처럼 따듯하다. 바람결에 피토치드 은은한 향기가 건너온다. 오늘의 독서를 끝내고 돌아가는 하산.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선 늙은 사서가 오래 손 흔들며 배웅하고 있을 것이다.
-2009. 11. 3 경북일보
출처 : 동목 작가회
글쓴이 : 김근혜(수필1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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