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숭아문학상 최우수/판도라의 상자/유수현
판도라의 상자
유수현
어릴 적 살던 내 고향은 복숭아 과수원이 많은 고장이었다. 지천으로 널린 복숭아나무가 여름이 되면 단내를 훅훅 날리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바람에 나무 아래에 서기라도 하면 괜히 헛기침을 하게 만들곤 했다. 우리 집도 예외없이 복숭아 과수원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복숭아를 아주 좋아 했다. 복숭아 중에서도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부드러운 속살이 혀끝을 간질이며 과즙을 줄줄 쏟아내는 백도를 특히 더 좋아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다 그렇듯이 상품가치가 있는 것들은 모두 내다 팔고는 기껏해야 멍들었거나 벌레가 파먹은 것들 밖에 먹지를 못했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여자란 시집만 가면 천덕꾸러기가 된다면서 시집가기 전에라도 호강하라고 제일 크고 좋은 복숭아만 골라서 나에게 주셨다. 집안에서는 큰 아들이지만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농사엔 거의 문외한이었던 아버지 대신 엄마는 과수원 일을 도맡아 하셔야 했다. 그래도 항상 밝게 웃으시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내게 복숭아를 주실 때도 언제나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눈 속에 따뜻한 모습의 엄마를 심어주셨다. 더러 아버지의 무심함에 돌아서서 한숨을 쉬는 걸 몇 번 본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당시에 별다른 먹거리는 없어도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던 내 또래들에겐 과수원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일 수밖에 없었다. 넓은 과수원을 뛰어 다니다 배가 고프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떨어져 있는 복숭아들을 주워 먹으며 배를 채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무에 달려 있는 복숭아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누가 만든 법칙이었는지 모르지만 모두에겐 불문율처럼 지켜졌던 걸로 기억한다. 인심 좋은 우리 엄마는 일꾼들 뿐 아니라 따라와서 놀던 아이들까지 점심이며 새참을 챙겨주셨으니 아마도 과수원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아니었나 싶다. 점심에 새참까지 얻어먹은 아이들은 어둑어둑 해지면 그때서야 하루 품앗이를 끝내고 돌아가는 엄마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돌아가는 길엔 소쿠리마다 어김없이 복숭아가 한 가득씩 담겨져 있었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인데 조금 더 여유 있는 우리가 나눠 먹어야 세상이 공평한 것이라며 엄마는 뭐든 아끼지 않고 나눠주셨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우리 집은 늘 일손이 넘쳐났고 집안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무남독녀였던 나 역시 북적거리는 집안이 좋았고 넘쳐나는 친구가 좋았기에 그 땐 감히 상상도 못할 양과자 같은 먹거리들을 친구들에게 마구 나눠 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내가 좋았다기 보다 넘쳐나는 먹을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 지나고 복숭아가 사라지는 계절이 되면 복숭아를 못잊어 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설탕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 복숭아 조림을 만들어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해주셨다. 지금도 딱히 그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그걸 복숭아‘간주메’라고 불렀다. 일종의 복숭아 통조림 같은 맛……. 시원하고 달달한 게 여간 맛난 게 아니었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복숭아와 더불어 한 계절을 보내고 또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복숭아 과수원에서 눈부신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마가 되기 전부터 장마처럼 비가 많이 내려 엄마는 벌레들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과일은 비가 너무 안 와도 걱정이지만 너무 많이 오면 벌레들이 기승을 부려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더구나 복숭아처럼 속살이 부드럽고 단 맛이 강한 과일에겐 치명 적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복숭아에 농약 치는 걸 극도로 자제하고 가능하면 농약을 치지 않고 벌레들을 소탕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 한 채로 지쳐가고 있었다. 결국 인부들의 설득에 못 이겨 농약을 치기로 합의를 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그쳤고 인부들은 작업을 내일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 나는 마루 끝에 앉아서 질퍽하게 물이 고인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 길을 잃은 듯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눈으로 쫓으며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는 장화를 신고 징징거리며 따라나서는 나를 데리고 과수원으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과수원은 며칠 내린 비로 인해 온통 진흙투성이라 발을 옮길 때마다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정도로 미끄러웠다. 진흙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거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엄마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이 틀 무렵 동네 사람들이 동원이 되고 과수원을 샅샅이 뒤지고서야 농약 통을 등에 진채로 진흙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있는 엄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부들이 돌아간 후에 늘어나는 벌레들이 걱정이 된 엄마는 혼자서 농약을 치신 듯 했다. 하지만 몇날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피곤한 상태로 마스크조차 쓰지 않아 농약에 중독이 되어 쓰러지셨고, 아무도 없는 과수원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괴롭게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 해 가을, 엄마를 잃은 과수원은 말 할 수 없이 황폐해졌다. 아버지는 그런 과수원을 바라보며 한 숨만 쉬다가 겨울이 문턱에 들어서는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버렸다. 엄마가 없는 과수원에는 아버지나 나나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죽고 못 살 만큼 좋아했던 복숭아였지만 더 이상 내게 단 맛을 주는 과일이 될 수 없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만큼 복숭아가 싫었지만 여름만 되면 기를 쓰고 나오는 복숭아를 보면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려고 더욱 열심히 살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둘이나 낳았지만 엄마가 없는 허전함은 그 어떤 위로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찍 가버린 엄마가 얼마나 야속하던지…….
그 빌어먹을 놈의 복숭아가 대체 뭐라고.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하나님은 지독한 개구쟁이가 아닐까 싶다. 딸내미가 나의 유전자를 빼다 박았나 보다. 복숭아를 그렇게 좋아할 줄이야. 거기에다 시어머님까지 복숭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셨다. 복숭아가 있는 과일가게는 그냥 지나치질 못하시니 말이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얼마나 얄미운지 모르겠다. 사돈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복숭아를 덜렁덜렁 사 오시는 어머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복숭아를 먹기 위해 며느리에게 핑계를 대기엔 손녀만한 인물이 어디 있을까. 엄마없이 자란 게 너무 서럽고 힘들었던 내가, 딸내미 일이라고 하면 유난을 떨어대는 걸 어머님은 간과를 하신 것이다. 할머니와 손녀는 거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과즙을 줄줄 짜내며 복숭아를 먹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 왔다. 내 이성은 복숭아 앞에서 도리질을 해대지만 그 단맛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반사 신경을 자극해 참을 성 없는 나의 침샘을 끝없이 유혹하는 모양이다. 침만 꼴깍거리는 내게 어머님은 안사돈이 다 이해하실 거라며 복숭아 한 개를 내밀었지만 외면하고 돌아서 버렸다.
어제는 직장 동료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복숭아 이야기가 또 나왔다. 난 애써 말을 돌렸다. 좋아하지만 워낙 비싸서 먹을 수가 있나, 시어른들에 애들에 시동생까지, 어찌나 먹는 입이 많은지 내 입에 돌아올 게 없어서 시집와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독설이라도 하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가실까 싶어서 말이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내 업무실 문이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빼꼼이 열리더니 다짜고짜 커다란 복숭아 두 개 불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며 문을 활짝 열어보니 어제 같이 수다 떨던 윤경이가 빙그레 웃으며 두 손에 복숭아를 들고 서 있었다. 식구가 너무 많아 복숭아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해서 마음이 너무 아프더란다. 그래서 실컷 먹어보라고 제일 크고 예쁜 걸로 거 두 개를 사왔다며 내 손에 쥐어주고는,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만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팽 가버렸다.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얼굴만큼 큰 복숭아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과즙 같은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지금 내 책상위엔 아침에 윤경이가 주고 간 복숭아 두개가 엄마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얹혀 있다. 하지만 이젠 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복숭아를 내밀며 웃던 윤경이의 부드러운 미소가 어릴 적 내 눈을 보고 부드럽게 웃어주시던 나의 엄마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