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석 시 모음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이 머리 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적격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 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수라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으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호박꽃 초롱
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벗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툼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삼호 (물닭의 소리1)
문기슭에 바다해자를 까꾸로 붙인 집
신듯한 청삿자리 위에서 찌륵찌륵
우는 전복회를 먹어 한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하늑이는
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
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한다
멧새소리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가무래기의 락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빛을 얻으려 나는 왔다
빛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도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거러가며
내 마음은 웃줄댄다 그 무슨 기쁨에 웃줄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 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며 락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베개하고 누어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산숙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듣가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어 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나와 지렝이
내 지렝이는
커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천년 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 주면 그 흙이 지렝이가 되었습니다
장마지면 비와 같이 하늘에서 나려왔습니다
뒤에 붕어와 농다리의 미끼가 되엇습니다
내 이과책에서느 암컷과 수컷이 있어서 새끼를 낳았습니다
지렝이의 눈이 보고 싶습니다
지렝이의 밥과 집이 부럽습니다
하답
짝새가 발뿌리에서 날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위에 곱돌탕관에 약이 끊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삭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싣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바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외가집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와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고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