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바가지와 물소리/이서린(만해축전 대상)
장사 수완 좋은 유능한 장사꾼이다.
손에 돈이 떡떡 붙는다고, 장터에선 ‘돈떡’으로 통할 정도이니까.
길 가던 손님이며 동네 꼬마들까지도 불러 모으는 우렁찬 목소리하며, 여자답지 않게 드센 기운, 한 번 찾아온 손님의 시어머니가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 만큼 사람과 빨리 친해지는 그 붙임성.
그렇다고 대단한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니다.
고급스럽게는 주방용 식기, 쉽게 말하면 싸구려 바가지, 그러나 엄마는 이 단순해 보이는 물건을 수십 가지 용도를 가진 필수품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한마디로 타고난 장사꾼이다.
“엄마, 얼른 나와! 나 늦었어.
담임이 왜 매일 지각하느냐고 또 한소리 한단 말이야.”
새벽부터 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야 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 나도 등교 전에 엄마와 함께 장터에 나간다.
두 사람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고물 트럭이 길고 긴 비탈길을 힘겹게 오른다.
새벽 여섯 시, 누군가에겐 단잠을 즐기도록 허락된 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힘겨운 하루 노동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다.
트럭에서 색색깔의 바가지가 담긴 상자를 내리는데 굵은 빗방울 하나가 머리를 때린다.
“또 장마인가….”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엄마의 이마에 잔주름이 진다.
장마란 놈은 끝났다 싶으면 다시금 시작해서 몇 날 며칠 장사를 망쳐 놓는다.
“에이, 엄마! 빗방울 한두 개 갖고 뭘 그래.
엄살 피우지 말고, 인상 찡그리지 말고 알았지? 나 간다.
잘해 사랑해.” 애교 아닌 애교에 엄마의 어깨도 다시금 훌쩍 올라간다.
“그래.
우리 딸! 오늘도 돈떡이다.
파이팅!”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수다를 떨면서 밥을 먹는데 순간 요란한 천둥이 귓전을 때린다.
이어서 들리는 쏴아 하는 빗소리.
때 아닌 소나기에 애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저렇게 갑자기 쏟아지다니 정신이 다 아찔하다.
엄마 걱정을 하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아이구, 이 일을 어쩌니? 비탈길에 좌판 벌인 게 화근이었어.
다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다.
어, 어머, 저것 좀 잡아줘요! 아이구…, 어떻게 좀 와 줄 수 없니? 미안해.”
세상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딸 불러내는 엄마가 어딨어? 가슴은 서러운데 발이 향하는 곳은 교무실이다.
“뭐? 조퇴를 한다고? 너 제정신이야? 너 내년에 고3이야.
임마!” 아니나 다를까, 담임은 조퇴 사유도 안 들어보고 무조건 성화다.
“저 가야 돼요.
저, 바가지가 떠내려가서….” “뭐, 바가지?”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본다.
하긴, 사제 간의 대화에 바가지가 등장하니 좀 웃기겠는가.
장장 30분 동안의 실랑이 끝에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에서 15분가량 걸어야 하는 장터까지 뛰고 또 뛰었다.
가방은 물론 교복 셔츠까지 흥건히 젖어 걸음이 자꾸 무거워졌다.
비탈길 중턱을 넘어서야 보이는 엄마의 얼굴.
“엄마!” “딸!” 실로 감동적인 재회였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의 상봉 장면을 몇 초간 연출하다 이내 떠내려가는 바가지를 보고 미친듯이 사방으로 뛰었다.
대충 상자에 바가지들을 던져놓고, 장막을 걷고, 트럭에 짐을 다 실은 뒤에야 우리 두 모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그치 딸?”
“더 나쁠 수도 있었으니까!” 우리는 마주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트럭 앞 유리로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두 모녀는 피곤에 절어 트럭 안에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엄마가 튕겨나가듯 몸을 벌떡 일으킨다.
“맞다! 지붕!” 그렇다.
비만 오면 찔끔찔끔 빗물이 새는 지붕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비에, 이미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으로 내달리는 트럭 안은 가관도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엄마는 알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과속을 하고, 그 옆에서 나는 “속도 줄여, 정신 차려”를 연발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생각했던 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벽으로 이어지는 천장 구석 틈에서 빗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천장 정중앙에 검은 물이 차고 있을 뿐이었다.
급한 대로 빗물 새는 곳을 비닐로 막아 놓고 바닥엔 바가지를 늘어 놓았다.
아침에 장난스레 한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장마가 왔다 간 칠흑 같은 밤이다.
우리 모녀는 빗물을 피해 거실 한구석에 나란히 배를 내놓고 드러누웠다.
두 여자를 둘러싸고 늘어선 바가지들은 저들끼리 겨루듯 서로 다른 물소리를 낸다.
‘똑, 똑, 투둑, 탁….’ 모녀의 귓가엔 물소리가 즐겁다.
장마가 왔다 간 칠흑 같은 밤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