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몽류장 夢流場 외 1편 / 이령
몽류장夢流場
만국기는 구석 페이크 퍼에 안겨 펄럭이고 있군요 벽을 만나면 발목이 시큰거려요 아버지는 뛰고 손에 끌린 난 날고 꼴찌 상으로 받은 공책에선 사자가 으르렁 거렸죠 잠에서 깨면 지그제그로 걸었어요 운동회 때마다 비가 왔어요 손님 찾기는 난감 했죠 아무리 찾아도 비만 내렸으니까 죽을 땐 가죽만 남더군요 이름을 남길 수 없었던 아버지
대리석 바닥은 샤기카펫으로 가려요 사자가 카펫을 들추며 일어서네요 밤새도록 꾹꾹 밟기로 해요 갈기가 모조리 뽑힌 사자는 이제 바닥으로 사라졌어요
벽은 또 다른 벽과 만나죠 달아날수록 앞서 있던, 도처에 벽이 있는 걸 알고부턴 사자도 비도 무섭지 않아요 사자가 출몰하는 밤이면 생각해요 아침은 이미 백 미터 출발선에 있는거라구요
비 오는 운동회는 상큼하죠 비가 오지 않는 운동회는 심심해요 선반엔 알로카시아 하얀 화분도 올려둘게요 소파엔 알록달록 쿠션이 제격이죠 만국기 펄럭이는, 비오는, 으르렁거렸던 백 미터 달리기, 벽과 벽이 만들어 낸 우리들의 아침에 카라멜마키야또 한 잔 할래요? 시크하게.
낙엽葬
나무의 몸부림은 무덤이 된다
생의 기억들 밀어내는 계절
한 때 빛나던 것들 사그라진 숲
낙엽 봉분 아래 비석 같은 돌멩이 돌아
한 줄로 엮이는 개미무리가 있다
나뭇잎 하날 놓고 줄다리기에 열중하는 저들의 숨소리 너머
목줄을 놓는 나무아래
까만 고무줄 같은 고것들이 팽팽한 생명줄 다시 그리고 있다
나뭇잎 갉는 입
유년의 기억 바스락 거린다 어머니의 유선도
푸르른 적 있었다
도굴된 무덤처럼 수액 쏟아내고 마른 잎으로 떨어지던 날
잎 진가지 같은 어머니의 손
더듬이 같은 내 손에 부서지기까진 몰랐다 어머닌
비워내 가벼워지고 있는 나무란 걸
발아래가 제 무덤인 이파리들
개미사열에 놀라 투신하고 있는지 모른다
낙엽을 뚫고 나오는 개미들의 숨소릴 빌려
유언을 남기는 중일까 가을 숲은
어머니의 패인 젖무덤을 닮았다
이령_경북 경주 출생. 격월간 시사사 신인문학상.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웹진시인광장 편집장
《우리시 2017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