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분/당선소감
마분 | |
기사등록 2012.10.04 21:39 | ![]() ![]() ![]() ![]() |

만물은 숨 쉬는 경전이다. 무슨 고결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릇 만물 속에 그것을 훑어나간 신의 지문이 새겨져 있다. 곡식 한 알에도 하늘과 땅이 잠겨 있고 풀잎, 돌, 심지어 골목길을 배회하는 바람에도 깨우침의 소리가 담겨 있다. 아침마다 마주쳐 지나온 은행나무, 먹잇감을 찾아 더듬이를 곧추세우고 주변을 배회하는 작은 벌레들에게도 신비스러운 생명의 숨결이 깃든다. 그들은 서로 본능으로 교감하며 살아간다.
저수지 한가운데 무덤 하나가 나붓이 떠 있다. 삼정지(三政地)의 풍경은, 아무도 발걸음 할 수 없는 물속의 고요 그 자체다. 연꽃 만발한 수면 위에 자리한 마분(馬墳)은 한 장군을 모신 애마의 무덤으로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넋이 살아 있다.
서쪽 큰길을 건너 계정 숲에는 한 장군의 무덤이 있다. 극심한 가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다는 신비의 숲, 그 천연림의 나무들은 장군을 닮아 한결같이 우람하고 늠름하기만 하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달렸던 말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나라를 지킨 주인 한 장군은 죽어서도 서로를 가까이 하고 있다. 이 둘의 무덤 사이에는 아스팔트길이 두껍게 놓아졌음에도 생명의 종적을 찾아 지금도 거룩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 삼정지와 계정 숲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유유히 정을 통한다.
경산 자인의 도천산 정기 어린 기슭, 기름진 벌판에 단정하게 솟은 계정 숲에서는 매년 단오제가 열린다. 지역민들은 단오제를 ‘한장군놀이’라고 부른다. 옛 자인현의 한 장군은 고려의 장수로서 도천산에 토성을 쌓아 침략자들과 싸웠다. 왜적이 침범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그는 여자로 가장한 뒤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 관인 여원화(女圓花)을 쓰고, 산 아래 버들 못 둑에서 광대들의 풍악에 맞추어 여원무(女圓舞)를 추었다. 흥겨운 장단에 이끌려 왜적들은 산에서 내려왔고 여원무에 반해 흠뻑 취한다. 왜적들의 사기가 흥에 겨워 흐느적거릴 무렵, 여장을 하고 춤을 추던 한 장군과 광대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왜적을 물리쳤다.
한 장군에게는 말이 있었다. 용맹함과 충성심을 갖춘 명마였다고 한다. 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도 지칠 줄을 몰랐다. 말은 장군을 등에 태우고 빗발치는 전투의 현장을 달리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장군의 심장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여 흘린 격동하는 눈물과 장수로서의 표출할 수 없었던 고독을 읽었을 것이다. 동시에 장군은 말의 등에서 전해 오는 거친 심장 박동 소리와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자신을 향한 비장한 충정을 감지하였으리라. 전투를 끝내고 해질녘 석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저벅저벅 돌아오는 길,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함께 누볐다는 동지애를 침묵으로 공감하며 둘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이렇게 장군과 말은 가슴과 등으로 거룩한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해가 지듯 인생의 해가 졌다. 한 장군은 격정의 세월과 조국을 향해 뜨겁게 부풀어 오른 충성의 보풀들을 계정 숲의 제 무덤 안에 차분히 가라앉혔다. 말이 죽자 사람들은 그의 충정을 높이 사 한장군의 무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삼정지에 수장했다. 살아서 장군을 모시고 허허벌판을 내달리던 말은 고요한 물의 흐름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세월은 문명의 무시무시한 힘을 등에 업고 숲과 물을 갈라놓았다. 바위를 부수고 둔덕을 깎아내고 웅덩이를 메우고 묘를 옮기고 한 아름이 넘는 고목을 베어내고 천 년의 물길을 돌려 계정 숲과 삼정지 사이로 곧은 아스팔트길을 내었다. 그 곁의, 시간이 멈춘 듯 꼬불꼬불한 옛길은 흉물이 되어 버려져 있다.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괴물의 단단한 표피 같은 아스팔트길이 계정의 숨구멍과 삼정지의 물길을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차들은 그 길 위로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총알처럼 질주한다.
제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세월이라 해도 전장에서 피를 나눈 정만큼 끈끈하게 감돌아치는 게 있을까. 지금 숲과 물은 생명의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계정 숲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유일한 평지 천연림이다. 이 숲은 수령이 이삼백 년이 되는 이팝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무릅나무 같은 향토 수목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특히 이팝나무가 만개하면 흰 구름 같은 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계정은 어떤 가뭄에도 그 푸름이 시들지 않고 기개를 드높인다.
과연 계정 숲의 수분은 어디에서 공급되는 것일까. 숲의 실타래 같은 뿌리들은 삼정지를 향하고 있다. 삼정지의 수맥을 젖처럼 빨아들여 생명을 축이고 있다. 도시 문명이 계정 숲과 삼정지를 모질게 갈라놓지만 서로의 거룩한 소통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단단한 아스팔트길이 삼정지의 물길을 막아본들 나무들은 더욱 푸르고 꼿꼿하게 등을 펴고 선다.
자연의 승리 선언일까. 아무리 고도의 기술을 동원해 길을 놓았다 해도 물을 찾아가는 숲의 본능은 막아설 수가 없는가 보다. 장군을 향한 애마의 충정도 본능이었으리라.
말은 여전히 장수의 혼을 받들어 장군에게 달려간다. 삼정지 물은 말의 영혼처럼 제 주인이 누워 있는 계정 숲을 향해 치닫고, 흘러든 물은 울창한 숲을 먹여 살린다. 살아서도 장수를 지킨 말이 죽어서도 주인을 잊지 않고 한결같이 마르지 않게 정성을 쏟고 있다. 계정과 삼정지, 둘은 수백 년에 걸쳐 시공을 함께한 사이이며, 신의와 충정이 생명처럼 녹아 혈육의 정보다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서로 살만 부딪혀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듯 수백 년 사랑을 머금은 조화가 참으로 푸르고 끈끈하다.
삼정지 둑에 내려섰다. 계정 숲은 제 허리를 에돌아 살여울이 모인 삼정지의 무덤을 물끄러미 굽어보며 이제 그만 올라오라고 손짓한다.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져 물속에 제 몸을 담그고 있는 둑길을 천천히 걷는다. 석양이 붉어질 무렵, 계정 숲 위에 말그스름하게 뜬 낮달이 삼정의 물속에도 차분히 스며 있다. 어느 사랑이 이토록 끈질기고 장엄할 수 있으랴. 경이로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계정과 삼정지의 숭고한 소통은 이 땅의 메마르고 틈틈이 갈라진 우리네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무언의 경전이 아닐까.
낚시꾼이 던진 찌가 정적을 깨뜨린다. 버드나무 가지에서 울어대는 매미의 요란스러움이 물결을 타고 수면 위로 단정히 떠있는 말 무덤 앞까지 다다른다. 어디선가 우람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 떨어지는 석양 사이로 막 잠에서 깬 검붉은 한 마리의 말이 자인의 벌판을 누비며 달려 나온다. 말은 계정 숲을 향해 내달리고 한 장군의 무덤에서 등을 내려 제 주인을 기다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웅성거림이 오래 전 전장 판을 연상케 한다. 말의 등에 오른 장수의 함성이 나약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 귀에다 대고 일어나라고 웅장한 이명(耳鳴)을 몰고 온다.
<제3회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당선소감*
"수필 속에 오롯이 존재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가장 행복.."
늦여름 끝에서 만난 가을에 악수를 청했다. 낮에는 따가운 볕, 밤에는 시린 바람과 별, 몸을 움츠리면서도 계절의 오고 감을 감사했다.
나는 나를 못 본다. 지금껏 다른 이의 시선에 의해 내가 규정되어왔다. 수필을 만나며 그 속에 진정한 내가 서 있음을 알았다. 수필은 나의 거울이었으며, 이웃이었으며 가족이었다. 따뜻했다. 수필 속에 오롯이 존재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너’가 나를 보기 전에 먼저 ‘나’를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었다.
나는 오늘도 그런 수필을 쓰기위해 들판으로 나간다. 바람과 풀과 햇살과 물들이 내게 손을 내민다. 그것이 내 수필을 만들어가는 소박한 친구들이었다.
한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필처럼 살고, 수필을 위해 산다고 하셨다. 하늘을 종이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어찌 그 고마움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 정갈한 수필로 세상을 후련하게 뒤맑히시는 곽흥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함께 동행해준 숨겨진 옥석들, MBC창작교실 문우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새벽이면 컹컹 짖어대며 나를 깨워 글세계로 접어들게 해준 옆집 강아지가 빨리 감기 나았으면 좋겠다.
동상 작품에 이렇게 너른 지면을 허락해 주신 대구일보사에 큰 감사를 드린다. 보이지 않지만 늘 곁에 계셔주신 높으신 분께 한없는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1967년 경산 자인출생
△대구 반야월 성덕교회 목사
△작은 도서관 돼지등 관장
△2012 문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