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디, 오늘이라는 외 1편 / 이령
마디, 오늘이라는
늘였다 줄였다 사물의 각도를 엄지 마디로 재단하는 버릇이 있다 마디 속으로 십 배속 백 배속 네온 빛이 뛰어들고 담장의 장미넝쿨 향기가 휘리릭 감기고 까마귀 소리마저 떼로 쏟아지자 오늘의 사위가 깜깜 하다
마디 안에 들어오는 것들은 죄다 엄청난 결핍의 자기장이 흐르는 걸까 마디안의 전봇대, 마디안의 자동차, 마디안의 행인이 사라지고 배경이 접혔다 펼쳐지는 골목에서 이 통계적 성찰의 출입구가 어디일까를 생각 한다
집나간 언니를 넣기엔 한 치 반쯤 뒤로 꺾어야하고 등 돌린 엄마를 넣기엔 너무 짧고 아침 밥상에서 내지른 아빠의 성화를 넣다가 삐끗 한다
마디로 재단할 수 없는 것들이 갈수록 넘쳐나 통으로 사라지는 오늘, 입구를 찾지 못한다면 출구를 기약할 수 없듯 도무지 이 미로를 빠져날 수 없다 접었다 펼쳤다 늘였다 줄였다 굳지 않고 유연한 마디를 위해 오늘, 어제도 내일도 이 마디 안에서 길을 재고 있는 난.
에바페론에게
그녀의 입술을 훔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건너 아순시온 꽃길
활화산 조율중 이란 플랜카드 아래
그녀는 오색 혓바늘로 돋는다
는 건 내 생각
극과 극은 통하는지 오월은 잔인한 달이란다
내려 피는 꽃이 많아 숙연해진 거리
방금 건너온 그림자에도 소스라치는 달이 뜨고
이곳은 벽속에 침잠한 시간이 된다
그녀를 부르다 흔들리면 다시 목을 축이고
꽃잎 속에 입을 부빈다
그녀의 목젖은 부드럽고 내 눈은 흥건하다
네온사인 줄지어 젖은 입을 말려주지만
하, 누구 하나 달그림자로 덮어주질 않지
안개 같은 눈물 젖어들 때
드렁컨플라워 향기가 순하다, 이곳에도
살아 있는 그녀가 있네
거꾸로 가는 시계가 째각인다
마림바 소리로 북적이던 그녀의 묘비 앞
마냥 설레게 하던 그녀의 목젖은
하얀 양초였나, 태워서 불 밝힌 생
그녀의 입속에선 알싸리스테아린 냄새가 났지
플라멩고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태우고 간 촛불의 힘으로 키를 높였을 것이다
팜파스 농장에서 시작된 심지, 오늘밤
레콜라타 묘지위로 달이 환하다
이령_경북 경주 출생. 격월간 시사사 신인문학상.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웹진시인광장 편집장
《시인정신 2017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