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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밥집/대구일보 에세이 마당 2014.1.10

테오리아2 2014. 3. 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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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

 

이상렬

 

  어스름 녘, 눈발까지 날리는 날이면 국밥 생각이 절로 난다. 출출한 시간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은 허한 마음 든든히 채우기에 그만이다. 고인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결전을 앞둔 용사처럼 숟가락을 든다. 뽀얀 국물에 다진 양념을 풀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후, 휘 저어 국물 밑에 깔린 흰쌀밥과 말랑말랑한 수육을 한꺼번에 떠올린다. 그 위에 큼직한 깍두기 하나 올리고 후루룩 한 입에 넣으면 세상의 깊은 시름마저 꿀꺽 넘어간다.

  만만함과 편안함, 이것이 내가 국밥집을 자주 찾는 이유다. 드나드는 사람이나 내부 시설, 애써 꾸밀 필요 없다. 허름할수록 더 잘 어울린다. 국밥집 주인은 죄다 할머니이신 것도, 투박하지만 정겨운 것도, 주문을 하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나오는 것도 어딜 가나 똑같다. 더 이상 특별할 것도, 놀랄 것도 없다. 요즘같이 놀라서 간 떨어질 것 같은 일이 많은 세상에 누구라도 뻔히 예상되는 곳이다. 또 조금만 식상하고 지루하면 바꿔버리는, 더 이상의 ‘새로움’ 보다 ‘한결같음’ 이 그리운 이때에, 익숙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문을 열면 앞치마 두른 어머니가 입가에 벙글 웃음을 머금고 주방에서 막 나오실 것 같다.

  창가 구석에 중년 남성이 혼자 앉아있다. 국밥집은 어떤 사람, 어떤 상황도 다 어울린다. 가끔씩 혼자일 때 부담 없이 들어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때에도 어김없이 혼자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저 남자다. 외관상 혼자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장면이 그림처럼 깊어 보인다. 국밥집은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슬그머니 외로운 순간이 왜 없겠는가. 또 살다보면 혼자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그저 혼자 들려서 나처럼 앉아 있는 사람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뜨뜻하게 한 그릇 하면, 주린 배는 물론 허기진 마음까지 채울 수 있다. 매 끼니마다의 풍악을 울리는 식탁일 순 없지 않겠는가. 조금은 외로울 줄 알아야 사는 맛을 아는 사람들끼리 눈빛으로 주고받는 무언의 위안, 세상에 이만한 위로는 없을 것 같다.

  연통이 달려 있는 낡은 난로 옆에 노년의 남성 두 명이 자리를 잡고 몸을 녹이고 있다. 막 전쟁을 치른 듯 지쳐 보인다. 은퇴를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치열한 생업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거친 손, 횟가루 묻은 뿌연 작업복이 여실히 말해준다. 골골이 난 얼굴의 주름 속에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이 고여 있다. 한 노인이 국밥이 나오기도 전에 술 한 잔을 쭉 들이킨다. 큰 한 숨을 내 쉰다. 빈속을 술로 급히 채워야 할 만큼 쌓인 한(恨)이 그리도 모질었을까. 하루를 살면서 풀어야 할 꼬인 매듭이라도 있었으리라. 하기야 어찌 깊은 한숨 섞인 옹이 진 인생 서리 하나쯤 없겠는가. 그럼에도 국밥 한 그릇과 농주를 옆에 놓고 얼큰한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는 걸보니,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누추해 보이지 않는다.

  국밥집 사람들 이야기, 굴곡진 세월과 소박한 삶을 말아낸 민초의 맛이다. 고매한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이 ‘삶의 의미’ 라고. 박수를 쳐주고 싶지는 않다.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다. 인간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다. 황무지와 같은 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필요하겠는가. 다만 그곳을 걷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삶의 무게는 개인에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국밥집 사람들의 삶, 이들의 고민이라고 어떻게 하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살아있음의 증거’ 를 보여주는 때 묻지않은 당신들, 올해에는 이곳에도 정겨운 볕이 들었으면 좋겠다. 이 국밥집을 오가는 숨 가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냈으면 좋겠다.

  하루가 야위어가는 시간이다. 겨울바람이 허술한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배불리 먹어도 뭔지 모를 아쉬움이 그릇 안에 달라붙은 밥알과 함께 남아있다. 지금껏 그럴듯한 식당에서 폼 잡을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국밥 그릇 속에 나의 촌스러운 정서도 함께 담겨있는 한, 죽는 날까지 이 수준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

 

대구일보 에세이 마당 2014.1.10 이상렬

 

 

 

출처 : 이상렬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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