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계란(鷄卵)의 추억
계란(鷄卵)의 추억 / 野草
아침 6시 조금 전 방에서 깨어나 집사람이 자고 있는 안방과 작은아들 방을 둘러봅니다. 아직 한밤중입니다.
일어냐야 할 시간인데, 아침잠이 달콤하기만 한 딱한 직장인들이라 10분이라도 더 자게 한 뒤 깨우려고 한참 기다려 줍니다.
그러면서 나는 계란 너댓 개를 삶습니다. 오늘도 다섯 개를 삶았습니다. 껍질이 잘 벗겨지게 소금도 약간 집어
넣고.
큰아들은 결혼해 살림났으니 아침을 먹거나 말거나 그거야 며늘아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집에 함께 있는
작은아들 때문입니다. 녀석은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6시반 이전에 현관문 나서니 그렇기도
합니다. 해서 매일은 아니지만 집사람이 야채과일 쥬스를 만들어 줍니다. 그렇지만 집사람 스스로가 10분 20분
더 이불 속에 누워 있으려다 보니 애가 빈속에 나갈 때가 많습니다.
대신 출근해서 먹을 수 있게 삶은 계란을 준비하는 게 야초 일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매일매일은 아니고요.
계란이 '신이 내린 20대 식품'에 들어간다지만 대개의 요즘 아이들이 별로 잘 먹지 않는데 다행히 울 녀석은
계란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60년대 학창 시절. 학교에 점심 도시락을 가져간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거의 꽁보리밥에다가
콩자반과 김치 몇 조각을 반찬으로 점심을 가져간 일이 없진 않았습니다. 옆의 친구들은 벤또(그땐 그렇게들
불렀지요) 두껑을 열면 계란후라이가 얹혀 있기도 합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못사는 집과 잘사는 집의 구별이 도시락으로 확연히 드러났다고나 할까요.
나는 계란후라이 도시락의 호사를 한 번도 누려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날계란을 훔쳐 먹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집에서 닭을 너댓 마리 쳤으니까 하루에도 서너 개의 계란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우리 꼬맹이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5일장에 내다 팔아 고무신 등이나 가끔은 생선 몇 마리를 사오곤
하셨습니다. 우린 그 귀중한(?) 살림 밑천을 겁없이 축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럭지가 짧으니 디딤판을 구해
훔쳐 먹었지요.
없어지는 게 표 안 나게 하려고 한쪽에만 구멍을 뚫어 속을 빨아 먹고는 빈 걸 광주리에 다른 것과 나란히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들통이 났지만 배곯는 자식들 짓을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
요즘 대개의 젊은 가정에서는 맛있는 반찬도 아이들 위주로 준비하는 듯하고 애들을 먼저 먹이기도 하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지요. 아버지는 늘 독상(獨床)에 반찬도 우리와는 때론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숟가락 들기
전에는 우린 마냥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버지 상에는 가끔 계란찜이나 탕이 올랐고 척새에 구운 갈치가 있는
날도 몸통 굵은 것이 올랐습니다.
엄마랑 아들 셋이 앉는 두리반에는 계란찜이 없는 경우도 많았고 갈치도 머리나 꼬랑지 쪽의 가는 부분만….
지금 생각하면 참 희한하게도 우리는 '어버지는 특별한 분'이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도, 그 어떤 불만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잡수시다 남길 타이밍을 노렸습니다. 아버지도 양이 차지 않으셨겠지만 절반 정도를 남겨
주셨고요. 엄마는 반찬도 없이 누룽지 확 불린 물이 훨씬 많은 걸로 배를 채우시곤 했습니다….
나름 먹고 먹는데도 우린 왜 늘 허기 속에 있었던지... 우린 계란 빈 껍데기에 쌀을 한 숟가락 정도 씻어
넣어 쇠죽솥 아궁이의 잔불에 살짝 올려놓았다 먹기도 했었습니다. 생고구마를 파묻어 두는 건 늘상이었고.
국민학교 소풍 때 우리들은 돈은 못 받았지만 각자 계란을 두 개 정도씩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소금으로 간한
주먹밥과 함께. 그래서 그랬는지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일영 쪽이나 강촌으로 놀러갈 때 하숙집에 특별히
부탁해 계란을 몇 개는 꼭 챙겨가게 되더라구요. 요즘도 교외로 바람쐬러 열차편을 이용하게 되면 역전에서
삶은 계란 한 줄 사게 됩니다.
비 내리는 오늘 점심은 계란 하나 풀어 떡라면으로 때울까 생각 중입니다.